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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치킨의 맛

학규의 이야기

by 바람부는 언덕


clark-douglas-T60-ki_FzmE-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Clark Douglas


인생은 어쩌면, 아주 어쩌면 치킨의 맛일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학규는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 모두가 늦은 밤 시켜먹는 치맥에 홀려 있을 때에도 학규는 배달 한 번 시켜본 적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뒤집혔고 치킨은 맛있어졌다. 기름을 한가득 머금고 있다가 바삭, 하는 순간 지방과 탄수화물, 소금과 각종 조미료를 한꺼번에 터뜨리는 이 치킨이라는 놈. 정말 대한민국은 치킨 천국이다. 그리고 학규 역시 이제 막 천국의 문에 들어선 참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학규는 자신의 부모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인생의 첫 기억이 보육원에서 시작된 봉구와는 달리 학규는 9살 봄에 보육원에 왔다. 한 해 전 겨울 학규의 가족은 스키를 타러 강원도로 향하고 있었고 그러다 차가 미끄러지면서 큰 사고가 났다. 부모님은 모두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살아남은 학규는 오래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다행히 건강을 되찾아 무사히 퇴원을 했지만 그 사이 집도, 부모님 재산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주변 친척들이 탈탈 털어간 것이다. 학규는 그 후 1년 간 작은 아버지 집에서 사촌들의 괴롭힘과 작은 어머니의 구박을 견뎌야 했다. 딱 한 번 견디다 못한 학규가 대들자 작은 아버지는 학규를 보육원으로 보내버렸다.




보육원에서의 시간은 오히려 평안했다.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잠꼬대조차 하지 않는 봉구가 늘 곁에 있었고 동생들과 원장님, 주방 실장님까지 모두가 학규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모두 외로웠고 그래서 더 따뜻했다.

다만 음식이 늘 고역이었다. 주방 실장님은 정말 좋은 분이셨지만 인격이 음식 솜씨를 나아지게 할 수는 없었다. 학규는 매 식사 때마다 엄마 음식이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았지만 동생들이 보고 있으니까 억지로 참고 먹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면서 매일 밤 주방으로 숨어들어 몰래 라면을 끓여 먹었다. 어떤 날에는 계란을 풀기도 하고 두부도 넣고 콩나물이나 김치도 넣었다. 한창 자랄 때라 뭘 넣어도 맛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막 끓인 라면을 한 젓가락 들어 올리는 순간 주방 불이 탁, 하고 켜졌다. 거기에 봉구가 있었다.


“나도.”


그 한 마디에 학규의 라면이 반토막 났다. 다음 날부터 학규는 라면을 두 개씩 끓이기 시작했고 라면이 끓는 동안 봉구는 주방에 앉아 공부를 했다. 봉구는 전교 1등이라고 했다. 보육원 주방에서 공부하는 전교 1등 고아. 그런 봉구를 보다가 학규는 라면에 파를 썰어 넣었다. 어느 날은 참치 캔을 따서 넣기도 했다. 이상하게 봉구를 보고 있으면 뭘 자꾸 먹이고 싶었다.


두 사람의 주방 습격을 오래 모른 척 하던 원장님이 결국 둘을 호출했다. 하지만 혼내기는커녕, 어린 동생들이 매우 부러워하고 있으니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규칙이란, 학규와 봉구만이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것. 이를 위해 원장님은 학규에게 요리사라는 꿈을 제안했다. 나중에 학규 네가 진짜로 요리사가 되든 말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일단 동생들 앞에서는 요리 연구를 한다고 말해두자는 거야. 그 덕에 학규는 매일 밤 맘 편히 요리를 할 수 있었고, 봉구는 배를 든든히 채우며 늦게까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좀 더 들자 보육원 No.3라 할 수 있는 현경이 이 모임에 합류했다. 늘 하얀 양말을 신고 다니던 현경은 보육원 동생들 뿐 아니라 학교 남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 주현경 걔 말이야, 좀 쌔끈하지 않냐?”

“걔 고아라며?”

“조용히 해. 쟤들도 고아야.”


남학생들 사이에서 현경의 이야기가 나오면 늘 학규와 봉구가 함께 소환되곤 했다.


“암튼, 내가 걔 한 번 사귀어 보려고.”

“걔가 너랑 사귀어 준대? 3반 진석이도 차였대.”

“야. 난 다 계획이 있지! 걔는 고아니까 친오빠처럼, 어?, 친절하고 따뜻하게, 어?”


그런 이야기가 하루걸러 하루 학규의 귀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현경도 알아서 선을 잘 긋는 것 같았고 남자아이들의 관심이란 그렇게 불타올랐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전교 회장인 희준의 이름이 들렸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희준 선배가 내 번호 물어봤다?”


현경이 그렇게 말하던 날 야식 메뉴는 감자전이었다. 감자를 강판에 곱게 갈아 강포에 걸러서 잠시 두면 아래에 전분이 가라앉는다. 그 위에 고인 물은 따라버리고, 감자 거른 것과 전분만을 섞어서 기름에 부치면 아주 고소하고 쫀득한 전이 완성된다. 그런데, 희준이라고? 박희준, 그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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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걘 안 돼.”


학규는 처음으로 현경의 일에 참견을 했다. 학규는 희준이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덩치 큰 남학생들을 양쪽에 데리고 다니면서 깡패처럼 선거운동을 했었다. 본인이야 다 큰 남자 어른을 흉내 내고 싶었겠지만, 그 모습은 여지없이 깡패였다. 게다가 입만 열면 어제 만난 여자애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걔는 화장을 떡칠하고 왔다느니, 입 냄새가 나서 키스를 못하겠다느니, 헤어지자고 하니까 울면서 매달렸다느니. 종종 학규네 반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늘어 놓을 때마다 학규는 수돗가에서 귀를 박박 씻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현경은 학규의 조언을 받아들여 희준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담배 피우는 학규의 옆에 와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몸에 안 좋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현경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학규는 그 시간이, 보육원에서의 날들이 조금 덜 외로웠던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보육원을 떠나게 되었을 때 원장님은 학규와 봉구를 위해 바비큐 파티를 열어주었다. 학규는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원장님께 집게와 가위를 빼앗듯 받아들고는 불 앞을 떠나지 않았다. 고기는 전혀 먹고 싶지 않았다. 슬픈 걸까. 대체 왜? 내가 그렇게 이곳을 좋아했었나? 아니면 낯선 서울에서의 삶이 두려운 걸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샅샅이 뒤집고 있던 그때, 봉구가 커다란 쌈을 눈앞에 쑥 들이밀었다. 깊은 동굴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봉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학규는 입을 벌려 그 쌈을 받아먹었다. 고기가 세 개쯤 들어갔을까. 마늘도 두 개, 김치가 하나, 쌈장이 살짝. 녀석, 내 입맛을 좀 아는데? 그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자 저쪽에서 발끝만 바라보고 있던 현경이 다가왔다.


현경과 눈이 마주치자 학규는 단번에 깨달았다. 현경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도 싫구나. 아, 나는, 주현경을, 좋아하고 있구나.


그 날 밤 학규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을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아무 일 아니야. 오늘이 지나면 나는 서울로 간다. 그러면 다 잊을 수 있어.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이라는 녀석은 어디론가 반드시 새어나와 학규의 귓가에서 왱왱 울려대는 것이다. 나는 현경이를 좋아해.


학규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냉장고를 뒤져 달콤한 크래커와 카스텔라 빵과 믹스 커피를 찾아냈다. 크래커를 부수고 카스텔라를 둥글게 자르고, 믹스커피에 물을 섞은 뒤 마구 휘저어 크림으로 만들었다. 크래커 가루를 바닥에 깔고 카스텔라를 그 위에 놓은 뒤 커피 크림을 그 위에 얹었다. 급히 만든 것 치고는 꽤 그럴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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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티라미수라 부르며 현경과 봉구와 함께 나누어 먹고는 꼬박 밤을 샜다. 주방에 있는 온갖 주전부리를 꺼내 먹으면서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 유치원 선생님이 될 거라는 꿈, 그런 것들을 얘기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침 해는 떴고 그렇게 학규와 봉구는 보육원을 떠나 서울로 왔다.




그 후 학규는 낮에는 요리학교를 다니고 밤에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살았다. 간간히,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자주 현경이 떠올랐지만 그때마다 찬 물에 손을 담가 채소를 씻으면서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너무 힘들면 가끔, 세 달에 한 번쯤 밤차를 타고 보육원에 가보기도 했다. 여지없이 하얀 양말을 반듯하게 신고서 학교에 가는 현경을 먼발치에서 보면 또 한 석 달은 견딜 만 했다.


시간이 흘러 현경이 졸업을 할 때가 다가왔다. 학규는 딱 한 번 고백을 해볼까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학규는 그 누구와도 가족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잔인한 존재였다.


평생 학규 옆에 있어줄 것 같았던 엄마와 아빠는 한순간 이 땅에서 사라져버렸다. 처음에는 병실 문이 닳도록 드나들던 친척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자 학규를 모르는 아이처럼 대했다. 가족이란 너무나도 허약한 공동체이면서, 너무나도 이기적인 공동체다. 학규는 다시는 가족을 갖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언제 죽을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므로 그 누구에게도 가족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반면 현경은 그 누구보다도 가족을 원했다. 사랑하고 싶어 했고 사랑받고 싶어 했다. 보육원 동생들을 친동생처럼 예뻐했고 원장님과 주방 실장님에게도 딸처럼 잘했다. 그 햇살 같은 모습을 볼 때면 학규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지만, 마음 한 쪽이 늘 아려왔다. 난 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겠구나.




결국 학규는 현경과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아마도 같은 서울 땅에서 살고 있겠지만 우연이라도 현경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현경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현경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 달콤한 연애를 하고 행복한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고 늘 바랐다.


딱딱한 학규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한 것은 봉구가 결혼을 했을 때 부터였다. 봉구가 지연을 데리고 왔을 때(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연이 학규를 만나려고 봉구의 옆구리를 찔렀겠지만)는 학규는 한동안 지연을 의심했다. 부모 없는 봉구를 마구 부려먹는 건 아닐까. 지연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지연의 부모님을 의심했다. 봉구가 예비 장인 장모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에는 몰래 따라가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서 지켜볼 정도였다. 하지만 학규가 참견할 일이 전혀 없을 정도로 지연은 봉구를 사랑했다. 도리어 봉구가 너무 무디고 말이 없어서 혹시라도 지연이 실망하고 헤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봉구가 회사에서 짤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지연에게 가서 자신이 대신 빌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훌륭한 가족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학규는 다시 현경을 떠올렸다. 지금쯤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혹시 결혼을 했을까. 했다면 어떤 남자일까. 행복하겠지? 혹시라도 남자가 이상한 놈이면 몰래 따라가서 죽여버....

그런 생각 끝에 학규는 늘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나는 가족을 만들지 않을 테니까. 다시 만나도 현경과는 아무 일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 현경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학규는, 완전히 회로가 멈춰버렸다. 그날 늦은 오후에 학규는 지연의 전화를 받았다.


“학규 씨, 혹시 주현경이라는 분 아세요? 봉구 씨랑 보육원 동기라고 하더라고요. 글쎄 현경 씨가 우리 서린이 유치원 선생님인 거 있죠?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서 같이 식사하기로 했는데 혹시 학규 씨도 올 수 있어요?”

삐-


학규의 머리가 새 하얗게 변했다. 그날 저녁 어떻게 음식을 하고 장사를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십 몇 년 간 단련해 습관이 되어버린 기술로 어찌어찌 음식을 만들었던 것 같기는 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학규는 와인 한 병을 손에 들고 봉구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띵동-


문이 열리자 학규는 최대한의 텐션을 끌어올렸다.


“주현경이 왔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현경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학규는 곧바로 주방으로 가 괜히 봉구를 야단쳤다.


“이럴 줄 알았어. 이 자식 오늘도 볶음밥이지? 넌 어떻게 하나를 가르쳐주면 딱 하나만 하냐.”


그리고는 현경을 보지도 않은 채 등을 돌려 카나페를 만들었다. 손이 떨렸다. 치즈를 반듯하게 잘라 크래커 위에 올려야 하는데 자꾸 손이 떨렸다. 삐뚤빼뚤한 카나페를 보다 못한 학규는 그 위에 파슬리 가루를 뿌려 자신의 혼란을 감췄다. 이어 카나페가 담긴 접시를 들고 돌아선 후에야 학규는 현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sander-dalhuisen-NFlyFizf2JU-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Sander Dalhuisen


현경은 아름다웠다. 키가 더 큰 것 같았고 머리를 길게 길렀고, 옅은 화장을 했다. 교복과 비슷한 하얀 블라우스를 입었는데도 이제는 여고생이 아니라 완연한 여자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후로 현경은 부지런히 봉구와 지연, 학규를 불러 모았다. 지연과는 죽이 잘 맞는지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불러대는 바람에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꼭 모여서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처음에 학규는 레스토랑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빠질까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현경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이제껏 어떻게 살았는지, 요새는 무슨 책을 읽는지, 어디에 살고 뭘 먹는지 모두 다 궁금했다. 그래서 작전을 바꿨다. 계속 만나고 싶다면, 아예 현경의 친정 오빠가 되자.


그리하여 학규가 현경의 연애에 지대한 참견을 하게 된 것이다. 남자 얘기만 나오면 불을 켜고 달려들어 그 놈은 왜 안 되는지, 남자를 볼 땐 어떤 점을 봐야하는지 장황하게 설교하는 친정오빠.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바로 전주 이모님 댁에서 김장을 하고 올라오던 날, 현경이 학규의 집에서 자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래, 친정오빠니까, 야식 정도 만들어 줄 수 있지, 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맛있는 것 좀 해달라는 현경의 요구에 응했다. 사골국물로 김치찌개를 구수하게 끓이던 사이, 현경이 주방 구석에 숨겨둔 소주를 찾아냈다.


“와, 오빠 완전 어른이네? 집에 소주를 다 감춰두고. 혼자 살면서 뭐 하러 감춰두고 먹냐.”


javier-esteban-eJzsgd1_Ovc-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Javier Esteban


그건 자존심이었다. 학규는 자신의 외로움을 자기 자신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경은 가뿐히 그것을 찾아내어 환하게 밝은 식탁 위에 턱, 하니 올려 두고는 곧바로 한 잔을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너 집에 안 가? 이따 내가 데려다 줘?”

“아니. 나 오늘 집에 안 가.”


두근.


하마터면 학규는 자신의 뺨을 때릴 뻔 했다. 친정 오빠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동생을 두고 무슨 마음을 품으려 했는가. 자아가 분열되려는 걸 느낀 학규는 소주를 한 입 털어 넣었다. 아무 생각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친정 오빠의 가면을 쓰고 김치찌개를 안주 삼아 현경과 한 잔 두 잔 기울였다. 밤이 깊고 식탁 위 소주병이 하나 둘 늘어가자 현경이 취했다. 학규는 현경을 질질 끌고서 침대 위에 던지듯 눕혔다. 마음의 문을 잠그듯, 침실 문을 잠근 채로 닫고 나와서는 남은 소주를 병째 들이켰다. 그리고 옷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당연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상태로 밤을 새웠다. 주현경, 저 아이는 늘 학규를 밤 새게 만든다.




친정 오빠의 자아가 더 사라지기 전에 학규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그 즈음에 레스토랑에 자주 오던 손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옆 동네 약사였고 여러 조건이 괜찮아 보였다. (물론 그런 남자라 하더라도 현경을 힘들게 하면 몰래 따라가 죽여버...) 지연과 봉구, 서린이까지 총출동한 소개팅이 무사히 끝나고 현경이 그 남자와 한 달 간 만나보겠다는 말을 했을 때 까지만 해도 학규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이상하게도 학규는 요리가 싫어졌다. 그 전까지는 아침에 눈 뜰 때부터 밤에 잠 들 때까지 요리만 생각했다. 더 좋은 식재료, 더 좋은 조합, 더 좋은 요리법을 찾아 책과 강의와 유튜브와 여러 식당들을 다녔다. 레스토랑 구석구석을 닦고 문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과 인사하고, 식사 후 나가는 표정을 살피는 일이 좋았다. 그런데 현경이 연애를 시작하자 그 모든 것이 빛을 잃었다. 1++ 한우를 봐도 가슴이 뛰지 않았고 토마토의 붉은 빛도, 노랗게 빛나는 달걀 노른자도, 아무런 영감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손님들 표정부터 달라졌다. 당신도 변했구나, 하는 실망한 얼굴이 늘어갔다. 주방 벽에 기름때가 앉았고 가게 앞에도 낙엽이 쌓였다. 고작 3주 만에 학규의 세계가 바싹 낡아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봉구가 찾아왔다.


“진짜 이대로 있을 거야?”

“뭘”

“현경이.”

“너 미쳤어?”

“미친 건 너야, 이 새끼야.”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봉구가 알고 있다니. 그럼 지연도 알고 있다는 뜻이고, 학규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아직 현경은 모르나. 학규는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봉구가 학규를 툭 치더니 창밖을 가리켰다. 봉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길 건너편 주얼리샵이 보였다. 봉구가 인사도 없이 집으로 가버린 후 학규는 레스토랑 문을 닫았다.


[당분간 개인 사정으로 문을 닫습니다. 죄송합니다.]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는 휴업이었다. 꽁꽁 닫힌 문을 보며 학규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이제와 때늦은 핑계를 대보자면, 학규는 분명 먼저 말하려고 했다. 다만 사방이 밀가루 범벅이고 다들 없는 솜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만두를 빚고 있어서 차마 입을 열지 못했던 것뿐이다. 정말로, 하늘에 맹세코 이 난장판이 끝나고 현경과 함께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말하려고 했다. 좋아한다고. 아마도 너는 그 남자에게 가겠지만, 그런 너에게 이런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아주 이기적이게도 내가 살려면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혹시 이제라도 나에 대해 생각해줄 수 없겠냐고. 분명히 말하려고 했다.


anshu-a-E5xgkSFan84-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Anshu A


하지만.


“됐어. 내가 할게. 치사해서 내가 한다. 나 오빠 좋아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좋아했어. 잊으려고 다른 남자 많이 만나봤는데, 안 되더라. 오빠 결혼 관심 없다는 말 듣고 주빈 씨도 만나봤는데 안되겠어. 이미 며칠 전에 헤어지고 오는 길이야. 언니, 이거 이 집안 내력인가봐요. 여자가 먼저 좋다고 말하는 거.”


쪽팔리지 않았다. 봉구가 “넌 모지리야, 이 새끼야.”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현경이 ‘나 오빠 좋아해’라고 말하는 순간, 학규의 머리는 맑아졌고 환해졌으며 총천연색 팡팡 폭죽이 터졌다. 그래서 얼른 반지를 꺼내 내밀었다. 이 일은 두고두고 학규의 흑역사가 되었지만 흑역사면 어떠랴. 현경이 나를 좋아한다는데.


그리하여 학규는 현경의 손에 이끌려(이것도 이 집안 내력인가 싶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고 같이 밤을 보냈다. 토요일 아침에는 티라미수를 만들어 사실은 네가 나의 첫사랑이었다고 새롭게 고백을 했고,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도 않은 채 집 안에서 꼭 붙어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었을 때 함께 치킨을 시켜먹은 것이다.


lucas-andrade-3Uj0GwVmOeY-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Lucas Andrade


인생은 정말이지 해가 지고 나서 시켜 먹는 치킨의 맛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치킨을 기다리는 시간은 고소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어 먹는 치킨의 맛은 고소하다. 혼자서는 죽어도 먹기 싫던 치킨이 이제는 고소하다.


학규는 가족이 싫었다. 가족이라는 말도, 가족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건 가족을 미친 듯이 갖고 싶다는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학규는 눈앞에 있는 현경을 보며 이제 자신의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규에게도 가족이 생긴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심심하고 출출하다는 이유로 함께 치킨을 시켜 먹을 가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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