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의 이야기
인생은 어쩌면 달콤쌉싸름한 티라미수의 맛일지도 모른다고 지금 현경은 생각하고 있다. 왼손 약지에 단아하게 빛나고 있는 얇은 실반지는, 현경의 삶에 하나의 선을 그었다. 이제부터 넌 혼자가 아니야.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현경은 사실 친부모님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네 살이었을까 다섯 살 이었을까. 친부모님은 현경을 보육원에 두고 떠났다. 그때 현경의 품에는 낡은 곰 인형이 있었고 옆에 선 원장님 손에는 현경의 옷이 담긴 작은 여행 가방이 있었다. 그날 저녁 어린 현경은 원장님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가서 옷을 정리했는데, 그때 원장님이 현경의 짐을 보며 말했다.
“양말이 참 희네.”
어린 현경의 눈에도 낡은 옷 속에서 유난히 하얀 양말이 눈에 띄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양말만큼은 새로 사서 넣어주신 게 아닐까 싶다. 현경은 부모님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부모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기억 어딘가에는 두 분의 따뜻한 품과 미안해하던 목소리, 힘겹게 돌아서던 발걸음이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현경은 철이 들 때부터 양말만큼은 하얗게, 더 하얗게 빨아 신었다. 때로는 실장님께 부탁해 락스를 얻어 표백을 하기도 했다. 현경에게 하얀 양말이란 엄마 아빠에게 나 잘 살고 있다고, 그러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넌지시 전하는,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는 연인을 위해 마을 어귀에 달아놓은 노란 리본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이 괜찮은 건 아니었다. 현경에게도 사춘기는 찾아왔고 세상과 자신에 대한 끝없는 의심과 의문에 시달리며 이유 없이 괴로운 날도 많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굳이 하지 않았을 질문이 다른 보육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현경에게도 있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타고난 성격과 좋은 머리로 어딜 가나 환영을 받는 현경이었지만 남 몰래 그런 고민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현경은 봤다. 학규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학교에서는 물론 보육원에서도 담배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학규는 될 대로 되라지, 싶은 표정을 짓고는 보육원 옆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그래도 어린 동생들 보기에는 좀 그랬는지 나름 숨어서 피는 모양이었다.
“간접흡연이야. 저리 가.”
현경을 볼 때면 학규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현경은 굳이 그 옆에 가서 서 있었다. 학규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어쩐지 좋았다. 텁텁하면서도 구수했고 그 나쁜 것들이 폐에 들어왔다가 나가면서 더 나쁜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만 같았다. 덜어내고 덜어내도 자꾸만 맺히는 응어리들이 담배 연기와 같이 흩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현경은 학규 옆에서 한숨을 한 번, 두 번, 반복해서 쉬었다.
“고민 있냐.”
며칠 째 아무 말 없던 학규가 현경에게 물었다.
“오빠는? 고민 없어?”
“많지.”
“무슨 고민?”
“오늘 저녁엔 뭐 해 먹을까. 그런 고민.”
“치.”
학규의 그런 말에 현경은 피식 웃곤 했었다. 세상 온갖 고민은 다 떠안은 표정으로 뻐끔뻐끔 담배를 피던 학규가 고작 저녁 간식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니. 현경은 그 말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학규의 그 말이 좋았다. 다 벌 거 아냐. 저녁에 그냥 맛있는 거나 먹고 푹 자고 일어나면 돼.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학규의 저녁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학규와 봉구, 그리고 현경뿐이었다. 늦게까지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원장님이 눈감아주신 덕분이었다. 밤 9시쯤이 되면 학규는 매일 오후 담배를 피우며 고민했던 메뉴들을 내놓았다. 때로는 콩나물이 잔뜩 들어간 라면이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치즈를 올린 떡볶이도 만들었다. 비가 오면 전을 부쳐 초간장과 함께 가져오기도 했고 남은 찬밥을 볶아 오기도 했다. 현경은 그 음식을 희미하게 담배 냄새를 풍기는 학규와 언제나 항상 말이 없는 봉구와 함께 먹었다.
매일 먹는 세 끼의 밥이 현경의 몸을 키웠다면, 학규의 그 음식들은 현경의 마음을 키웠다. 그 시간에는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던 넓은 식당 한 쪽만 조명을 켠다. 그러면 조명 아래 한 테이블 만 어둠의 바다에 동동 떠 있는 섬이 된다. 그곳에 셋이서 둘러 앉아 야식을 먹는 것이다. 어쩐지 함께 사는 식구가 밥상을 놓고 앉은 것 같았다. 현경은 그때마다 혼자서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했다. 요새 읽고 있는 책 이야기, 학교 친구 이야기, 최근 관심이 생긴 학교 선배 이야기까지.
“그 놈은 안 돼.”
학교 선배의 이야기에 학규가 딱 잘라 말했다.
“입이 거칠어. 생각도 가볍고.”
“잘 생겼잖아. 나한테는 잘 해주고.”
“걔 벌써 여자 친구가 세 번인가 바뀌었어. 별로 안 친한 나도 알 정도야.”
“치.”
현경은 나중에 그 선배가 정말로 바람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 쉴 새 없이 문자를 보내며 관심을 보이던 그 순간에도 옆 반 다른 여자아이에게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현경은 학규 덕분에 일찌감치 그 선배와 연락을 줄이고 있어서 험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시간은 흘러 학규와 봉구가 보육원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 그날 저녁 원장님은 아이들에게 바비큐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때도 고기는 학규가 구웠다. 불 앞에 서서 온 몸으로 열기를 받으며 말없이 고기를 굽는 학규를, 현경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봉구가 학규에게 크게 쌈을 싸주었다. 학규는 그 쌈을 한 입에 받아먹었다. 그러자 봉구가 작게 웃었던 것 같다. 학규도 웃었었던가. 아무튼 그 모습에 현경도 학규 곁으로 다가가 고기를 집어 먹었다. 자꾸 눈물이 날 때마다 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있던 현경에게 학규의 문자가 왔다.
[식당으로]
봉구의 수능도, 현경의 기말고사도 끝이 났기 때문에 학규의 야식도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던 때였다. 현경은 후드집업을 챙겨 입고서 식당으로 향했다.
“마지막 야식이다.”
학규의 말에 현경은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어금니를 꽉 물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현경에게 학규가 포크를 하나 내밀었다.
“먹어 봐. 처음 만들어 본 건데 맛이 어떨지 모르겠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아이보리 빛 크림이 담겨 있고 그 위로 갈색 파우더가 뿌려져 있었다.
“근데 이거 먹으면 잠이.. 안 올지도 몰라. 커피가 들어갔거든.”
그 말에 현경은 얼른 한 입 떠 먹어보았다. 오늘 밤은 밤새 깨어있고 싶었다. 오빠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케이크는 속절없이 입 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맛있다.”
“티라미수야. 너 우울해 보여서.”
병풍처럼 서 있던 봉구도 티라미수를 한 입 떠먹더니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렇게 학규와 현경, 봉구는 마지막 야식으로 티라미수를 먹었었다. 그 덕에 세 사람은 밤새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현경은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학규는 요리를 배워 작은 식당을 열고 싶다고 했다. 봉구는 일단 대학에 가서 졸업을 하고 생각해봐야겠다고 말했었다. 저 사람은 평생 목표라는 게 생기긴 할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은데도 수능 점수는 잘 나왔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라고, 현경은 생각하며, 티라미수를 한 입 더 떠먹었다. 달콤 쌉싸름한 맛. 이별과 새로운 시작이 교차하는 지금 이 순간에 딱 알맞은 맛.
학규가 보육원을 떠나고 나서도 현경은 종종 연락을 했었다. 하지만 학규가 워낙 바빠서 연락이 뜸해졌고 몇 번 휴대폰을 바꾸면서 연락이 아예 끊어져 버렸다. 그렇게 현경의 첫사랑은 희미해졌다. 다행히 현경도 대학에 진학하면서 청춘을 즐기느라 바빠졌고 첫사랑의 아련함을 느낄 새 없이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하지만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티라미수를 볼 때마다 마음이 둥,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아직도 학규는 담배를 피울까. 그때 그 담배냄새는 왜 그렇게 좋았던 걸까. 학규가 피우던 담배 포장지를 기억해 내 그걸 사본 적도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대학 선배에게 부탁해 한 번만 피워달라고 해서 그 옆에 서 보았다. 하지만 그때 그 냄새가 아니었다. 하긴, 학규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에서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가 났었다. 어지간히 좋아했던 모양이라고 현경은 그 시절 자신을 마음 속에서 토닥토닥 안아주며 학규에 대한 마음도 다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봉구를 만났다. 꽃잎같이 작고 예쁜 서린이의 아빠가 봉구라는 말을 듣고는 정말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서린이가 봉구가 아니라 엄마인 지연을 닮아 천만다행이라고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알고 있다. 뒤로 넘어갈 만큼 놀랐던 마음에는, 드디어 학규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꽤 많이 섞여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날 저녁 봉구의 집에서 학규를 다시 만났다. 학규는 이제 담배 냄새가 아니라 구운 토마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인지 예전보다 표정이 밝아졌고 말도 많아졌다. 당시 별거 없던 봉구의 주방에서 뚝딱뚝딱 샐러드와 카나페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고 현경은 새삼 놀랐다. 맞다. 이 남자, 이런 사람이었지. 그 차갑던 보육원 주방에서도 늘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던 사람.
그 후로도 몇 차례 학규를 만나면서 현경은 깨달았다. 자신이 학규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세월이 흘러 이제는 담배가 아닌 와인을 선택한 이 남자를, 그 시절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학규는 결혼이나 연애 얘기가 나올 때면 늘 딱 잘라 말했다.
“난 결혼 안 해. 연애도 안 해. 그냥 혼자 살 거야. 그게 내 DNA에 새겨진 내 운명이야.”
대체 이유가 뭐냐고 현경은 묻지 않았다. 학규가 요리를 좋아하는 것이 운명이었던 것처럼, 학규에게는 혼자만의 삶이 정말로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현경은 생각했다. 반면 현경은 결혼을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둘 만의 가정을 꾸리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아이도 낳아서 기르고 싶었다.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부모님의 사랑은 여전히 현경의 가슴에 남아 있었고, 그것을 갈구하게 만들었다. 사랑을 받을 수 없다면 사랑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게 현경의 DNA가 내리는 명령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학규를 포기하려고 했다. 학규가 해준다는 소개팅에 선뜻 오케이를 한 이유였다. 게다가 꽤 괜찮은 남자였다. 부모님 허락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취향도 잘 맞았고 손을 잡는 것도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키스는...
늘 키스가 문제였다. 어떤 남자를 만나든 손을 잡고 포옹을 하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키스를 하고나면 상대방에게 정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건 사실 냄새의 문제였다. 키스를 하는 순간 코끝에 스치는 상대의 살 냄새, 스킨 냄새 또는 방금 함께 먹었던 피자 냄새 심지어 갑비싼 향수냄새까지. 그 모든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몇 번 참고 만나봤지만 이상하게도 그걸 넘어설 수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현경은 일부러 결혼 이야기를 꺼냈고 남자들은 도망갔다.
이번 소개팅을 한 남자, 김주빈에게서는 가루약 냄새가 났다. 하루 종일 약을 지어주는 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주빈은 그 냄새를 묵묵한 나무 향기가 나는 고급 향수로 가렸지만 현경의 마음은 일찌감치 닫혔다. 문제는 주빈은 결혼 이야기를 꺼내도 도망을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결혼을 해도 괜찮겠다고 현경은 잠깐 생각했었다. 냄새쯤이야 살다보면 익숙해 질 거라고, 아마 주빈도 현경의 어떤 점을 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 상상해보았다. 작은 집에서 주빈과 함께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해서 다시 만나고 저녁을 먹고 씻고 잠드는 하루하루를. 예쁜 아이도 그려보았다. 그렇게 몇 번이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그 상상은 그림처럼 멈춰져 있을 뿐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다 딱 한 번, 학규와 결혼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길, 창밖으로는 잎을 떨어뜨린 나무들이 앙상하게 서 있었고 행인들은 외투를 단단히 잠그고 바람을 맞으며 걷던 어느 저녁이었다. 그런 스산한 풍경을 보며 현경은 학규와 한 집에 사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작은 집에 불이 환하게 켜지고 냄비가 보글보글 끓고 맛있는 냄새가 나고 예쁘고 귀여운 두 아이가 거실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던 현경은 결국 종점까지 가서야 정신을 차렸다.
‘첫사랑의 저주.’
현경은 씁쓸했다. 반대편 버스를 타고 돌아오던 현경은 그 길로 주빈을 만나러 가서 이별을 했다.
“미안해요. 주빈 씨랑은 결혼할 마음이 들지 않아요.”
그렇게 주빈과 헤어지고 나서 현경은 카페에 들러 티라미수 케이크를 먹었다. 이걸 먹으면 밤에 잠을 잘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바닥만 한 케이크를 다 먹어버렸다. 그래야 첫사랑의 저주가 풀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날 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현경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학규라는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 멀리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릴까. 그러면 자포자기하다 학규를 잊고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학규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요리사를 만나볼까. 그러면 키스도 괜찮을 테고 어쩌면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오만가지 쯤 하다가 현경은 버럭 화가 났다.
“이학규, 이 새끼를 진짜!!!!!!”
대체 이 남자는 뭔데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이민을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화가 났다. 어릴 때 음식 좀 해줬다고 여태 내 머리와 마음을 헤집고 다니다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질러 버리기로 했다. 자신의 고백으로 학규를 눈 앞에서 쫓아내 버리고 싶었다. 이 모임이 깨지면, 이학규 네가 아웃이야. 내가 봉구 오빠랑 지연 언니를 독차지 할거라고!
그리하여 다소곳이 앉아서 만두를 빚던 현경이 고백을 해버린 것이다.
“치사해서 내가 한다. 나 오빠 좋아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좋아했어. 잊으려고 다른 남자 많이 만나봤는데, 안 되더라. 오빠 결혼 관심 없다는 말 듣고 주빈 씨도 만나봤는데 안되겠어. 좀 아까 헤어지고 오는 길이야. 언니, 이거 이 집안 내력인가봐요. 여자가 먼저 좋다고 말하는 거.”
그러자 봉구가 현경을 거들었다.
“넌 모지리야, 이 새끼야.”
그 말을 들은 현경은 난생 처음으로 봉구를 친정오빠라고 느꼈다. 앞으로 이 오빠가 내 친정오빠구나, 하고 생각했다. 반면 학규는 말이 없었다. 말 그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만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 이 자리가 네 사람이 함께 모이는 마지막 모임이 되려는 찰나, 학규가 벌떡 일어나 뭔가를 내밀었다.
“나랑 결혼하자, 주현경. 나랑 결혼해줘!”
그날 저녁, 현경과 학규는 만두 맛도 못보고 나왔다. 밀가루로 하얗게 덮인 봉구의 주방을 그대로 두고서, 현경은 학규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학규에게 입을 맞췄다. 토마토와 와인 냄새, 그리고 그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티라미수 냄새가 났다. 이 냄새라면 밤새 입을 맞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현경은 학규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옆에는 지난 어느 날과는 달리 학규가 잠을 자고 있었다. 현경은 학규의 살냄새를 맡으며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나 잔 걸까.
“일어났어? 나와서 커피 마셔.”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들은 학규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현경을 일으켰다. 주방에 나가보니 고소한 커피 냄새가 났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예쁜 컵에 담긴 티라미수가 있었다.
“티라미수네.”
“응. 기억 나? 그 날.”
“응. 기억 나.”
학규가 티라미수를 현경의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내 첫사랑 주현경.”
그 말에 현경은 다시 학규에게 입을 맞췄다. 역시나 티라미수 향이 났다. 인생은 아무래도 이 티라미수의 맛이라고 현경은 지금 생각하고 있다. 씁쓸한 가루를 뒤덮고서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한 입 떠먹기 전에는 맛을 알 수 없다. 그 아래 감추어진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그리고 바닥에 감추어둔 커피의 쓴 맛을. 십여 년 전 그 날 밤, 학규가 선물해주었던 달콤한 밤은 이별로 끝이 났지만, 오늘 아침의 티라미수는 두 사람에게 오랜 낮과 밤을 선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