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nry Nov 16. 2024

앞으로 가을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거리마다 온통 노란 물감이다. 누가 뿌렸을까? 알고 보니 섬세한 가을비가 그랬다. 오후 들어 잔뜩 흐린 하늘이 그예 비를 뿌린다. 빗방울은 때로는 흩날리는 안개처럼 부드럽게, 때로는 길 떠나는 나그네의 한숨처럼 무겁게 땅을 적신다. 꾹꾹 눌러 참았던 서러움이 봇물 터지듯 색색의 잎들이 비바람에 흩날린다. 비에 젖어 땅에 찰싹 붙은 낙엽은 떠나는 가을의 잔해다. 그런 모습이 서러운 까닭은 스러져가는 내 삶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씨앗이 땅속에 썩어야 나무의 새순이 돋는다. 꽃이 피고 져야 열매를 맺는다. 초록이 빛을 잃어야 단풍이 든다. 그렇게 가을은 온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인 동시에 조락의 시간이다. 채워짐과 비워짐이 공존하고,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수록 이별의 시간이 가까워진다. 가을은 풍성하면서도 쓸쓸한 모순의 계절이다.  


낡은 것이 떠나야 새것이 온다. 옛사람의 빈 자리를 새 사람이 채운다. 떠나가면 그만이고, 기억해 달라는 부탁은 헛된 바람일 뿐이다. 늘 푸른 줄로만 알았던 청춘은 어느새 떠나버렸다. 그리고 인생도 가을날처럼 저물어간다. 붙잡으려 해도 손에서 미끄러지는 시간처럼, 한 번 떠난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서럽고, 떠나보내는 일은 늘 쉽지 않은 것이다.  


나무는 하루해가 손수건 한 장 크기만큼 줄면, 한 줌 햇빛으로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한다. 자신을 건사하기에도 빠듯한 영양분은 가을 나무를 깊은 고민에 빠뜨린다. 며칠 밤을 뒤척인 나무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나뭇잎으로 영양분을 공급하는 길목에 단단한 떨켜를 만든다. 더는 나뭇잎으로 영양분과 수분을 보내지 않는다. 나뭇잎은 초록빛을 잃고 노란빛으로 물들고, 이내 가지에서 떨어진다.


늦가을은 성취와 허무, 결실과 조락 사이에서 방황한다. 나무는 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과 결별한다. 여윈 가지 끝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는 한 뼘 남은 햇살에 버티다가 끝내 땅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자신이 낳고 길렀던 것들을 떠나보낸 나무는, 후회와 자책으로 찬바람을 맞으며 깊은 침묵에 빠져든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길었다. 그래서 가을은 더 반가웠다. 하지만, 짧은 가을도 이제 떠나려고 채비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가을의 등을 떠민다. 떠나야 함을 알면서도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결별의 서러움과 끝내 돌아서는 체념이 마음을 적신다. 비에 젖은 풍경이 흐려지고, 이 가을의 기억도 흐려진다. 이 비 그치면 또 한 번 가을은 소리 없이 내 곁을 떠난다.


앞으로 내 생의 가을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해마다 찾아오는 계절이라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에서 진정으로 가을을 즐길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은 채, 마치 가을이 영원히 반복될 것처럼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 삶의 서러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며 살아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폭우 속의 "여름 3악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