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거울 속의 나, 누구인가
어느 날 아침, 거울 앞에 섰다. 낯선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깊어진 주름, 희끗희끗해진 머리칼, 퀭한 눈빛. 초췌한 얼굴 위로 어딘지 모를 우울한 그림자가 살짝 드리운다. 거울 속 중년의 사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넌 누구니? 네가 나라고?”
한때 ‘미소년’이라 불리던 모습은 이제 흔적조차 없다. 당황스러운 순간, 낯익은 듯 낯선 목소리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속삭인다. 시간이 참 무심하다는 원망 뒤로 짧은 침묵의 순간. 그리고 이내, 또 하나의 질문이 뒤따른다.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나이 듦에 대해 말해 왔다. 때로는 그것을 자연의 순리로, 또 때로는 세월의 무상함으로 받아들였다. "그저 시간이 그런 것인데, 사람이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며 체념하듯 고개를 저었다. 나이 듦은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시간의 흐름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 정의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뭐? 태어나자마자 죽으러 간다고? 처음 들으면 다소 낯설고 충격적인 말이다. 하이데거의 이 말은 우리가 '나이 듦'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또 어떤 태도로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길어야 백 년 남짓을 살아간다. 인생의 초입에는 아직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유년기를 보내고, 말미에는 몸과 정신이 서서히 흐려지는 노년을 맞는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상태로 살아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치는 비극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존재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며 살아간다. 기억과 경험, 기대와 두려움, 그 모든 시간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우리를 만든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과 함께 숨 쉬는 일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어른이 되고, 그리고 서서히 나이를 들어간다. 그 모든 순간에 시간은 우리와 함께 흐른다. 그리고 마침내 삶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시간도 조용히 멈춘다.
청춘, 상실과 결핍의 시대
그렇다면 젊음은 어떤가. 나이 듦과 비교하면 부럽고 열정적인 존재이다. 젊음은 언제나 무한처럼 보인다. 시간은 고갈되지 않는 자원 같고, 하루하루는 다시 시작되는 기회처럼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젊은이들은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아직 누려야 할 것들도 많고, 감당해야 할 일도 많기 때문이다.
청춘은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지만, 그 열정을 감당할 통장 잔고는 늘 바닥이다. 넘치는 욕망은 빈곤한 현실과 충돌하고, 미래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젊을 때가 제일 좋다”는 말은, 때로는 위로가 아니라 약 올리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청춘은 도전할 수 있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것이 청춘에게만 허락된 가장 큰 특권이다.
사실 청춘은 많은 짐을 이고 살아간다. 학비, 생활비, 스펙, 경쟁, 취업,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은 채, 삶을 ‘살아내느라’ 분투한다.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일, 그래서 청춘은 아프고 불안한 상실의 시간이다. 그 결핍과 상실은, 때로는 평생 마음속 멍울로 남기도 한다.
청년들은 지금, 거대한 생존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서울 거주 청년(19~36세)의 자산 빈곤율은 55.6%, 1인 가구 청년은 62.7%에 달한다. 청년 10명 중 4명은 빈곤을 직접 경험했고, 많은 이들이 생활비 부족으로 부모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다. 청년 빈곤은 단순히 소득 부족이 다가 아니다. 주거, 건강, 교육, 심지어 정서적 안정까지 흔들리는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결핍 상태다.
이들에게 청춘은 정말 황금의 시간일까? 아니면, 불확실한 가능성과 모호한 불안이 공존하는 시기일까? 그들은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다. 그런 청춘에게 ‘빛나는 인생의 황금시대’라는 말은 어떻게 들릴까? 아픈 청춘을 위한 위안일까, 아니면 입에 발린 공허한 빈말일까.
우리는 결국 시간이다.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등장한 것은 약 30만 년 전. 그때부터 2025년 현재까지 지구에 태어난 사람은 약 1,200억 명으로 추정된다. 지금 살아 있는 80억 명의 인간은, 인류 역사 전체의 단 7~8%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지구를 거쳐 간 93%의 인류는 이미 떠났다.
그들 중에는 태어나자마자 생을 마친 이도, 천수를 누린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원하는 만큼의 삶을 살지 못했다. 왕족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노예이든, 결국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나이 들었고, 병들었으며, 떠났다. 그들은 그것을 서러워하며 길지 않은 존재의 시간을 마감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러한 삶을 ‘시간성’이라 불렀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우리는 과거에서 왔고, 미래를 향해 던져진 존재이며, 나이 듦은 이 시간성을 가장 깊이 체험하는 과정이다. ‘던져진 존재’에서 ‘본래적 존재’로 나아가는 시기, 그것이 바로 노년이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 속에 태어난다. 시간과 장소, 부모와 환경—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 밖에 있었다. 하이데거는 이런 존재를 ‘던져진 존재’라 불렀다. 젊은 시절 우리는 이 던져진 조건에 맞춰 산다. 학교, 직장, 결혼, 육아. 정해진 궤도처럼 보이는 삶을 따라간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단어도 바로 이 던져진 삶의 불평등을 상징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삶의 풍경은 조금씩 달라진다. 은퇴하고, 자녀는 독립하고, 사회적 역할도 점차 줄어든다. 외로움, 허무함, 무가치함이 마음을 스친다. 하지만 바로 그때,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는 비로소 ‘본래적 존재’, 곧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에 도달한다고.
불안한 청춘, 고단하고 우울한 노년
따지고 보면, 노년이 되면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차이가 흐려진다. 외모도 비슷해지고, 사회적 지위도 희미해진다. 이제는 오직 내면의 깊이와 존재의 진실이 나를 말해주는 시기다. 물론, 너무 심각한 경제적 격차는 여전히 노년의 삶에 차이를 만들기도 한다. 그건 '고요한 노년'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아픈 현실이다.
실제로 노년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국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1위다. 2023년 기준 노인 빈곤율(65세 이상, 중위소득 50% 미만)은 38.2%이며, 76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은 무려 52.0%, 농어촌 고령자의 빈곤율은 56.5%에 달한다. 아프고 고단한 노년의 또 다른 얼굴이다
여전히 많은 노인은 일터에서 쉴 수 없고, 의료비와 생계 걱정에 시달린다. ‘존재의 진실’을 마주하기도 전에, 당장 끼니와 주거를 걱정해야 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존재’의 시간은, 경제적 조건이 허락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내는 노년은, 몸과 마음이 고단하고 우울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물론 노후를 잘 준비한 사람은 ‘본래적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 과연 몇이나, 삶의 본질을 탐구하며 살아갈까. 그들조차도 어쩌면, 주머니가 빈약했던 청춘의 나날을 못내 그리워할지 모른다. 기회만 닿는다면,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팔고서라도 다시 젊음을 사고 싶어 하지 않을까. 청춘보다 노년이 더 서러운 까닭은, 시간과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청춘이 늘 찬란할 수 없듯, 노년 또한 언제나 지혜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씁쓸하게 떠오른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말하는 본래적 존재의 가능성조차, 자본주의적 빈곤 앞에서는 길을 잃는다. 청춘은 가능성 속에서 불안을 견디고, 노년은 자유 속에서 남은 시간을 센다.
따지고 보면 불안한 청춘도, 고단한 노년도, 울적한 노년도, 결국 시간이라는 강 위를 흘러간다. 잠시 기뻐하고, 자주 불안해하고, 오래 고단하고 외롭게.
그것이 존재이고 그것이 시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