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유감(有感)? 유감(遺憾)?

by Henry
문경새재.jpg 비 내린 날 문경새재


비 내리는 금요일 문경

문경의 펜션에서 보낸 금요일 밤은 참 좋았다. 문경 읍내 마트에 들러 고기와 상추, 깻잎, 그리고 몇 가지 주전부리를 샀다. 비 오는 날의 우울한 기분을 달래줄 술도 빠질 수 없다. 친구가 최근 선물 받은 고급 중국 백주(白酒)를 챙겨 온 덕분에, 캔 맥주 두 병이면 충분했다.


펜션으로 가는 길, 제법 너른 하천이 길을 따라 흐른다. 며칠째 퍼부은 장맛비에 물은 거칠게 넘실거렸고, 하천은 제 목소리를 더 크게 냈다. 비가 이렇게 실하게 내린 날이 아니면, 이런 야성의 거친 숨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다. 개울가 풀잎은 모두 한쪽으로 누워 있었다. 세찬 물살이 훑고 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산 중턱 높은 곳에 자리한 펜션. 발아래로는 고즈넉한 문경 읍내가 펼쳐지고, 등 뒤로는 병풍처럼 펼쳐진 산줄기가 존재감을 자랑한다. 비가 잠시 멈추자, 맞은편 주흘산 허리를 하얀 구름이 감싸며 천천히 오른다. 했다. 마치 구름 속 용들이 산 능선을 타고 유영하듯. 이 정도면 동탄에서 먼 길 달려온 보람이 충분하다.


슬슬 배가 고파온다. 펜션 주인이 바비큐 그릴을 내어준다. 이미 숯불이 지펴져 있어, 고기를 올리자 금세 지글지글 익어간다. 함께 올린 소시지와 어묵도 이내 제대로 익어, 고소한 연기 향을 뿜어낸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어두워질수록 불빛은 더 또렷하게 빛난다. 빛이 사라질수록, 불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아쉽게도 우리는 어느덧 인생의 해넘이를 걷지만, 서로에게 작은 위안이 될 이 밤의 빛나는 불빛이면 충분하다.


긴 머리 소녀

한여름 날씨는 변덕스럽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비가 왈칵 쏟아진다. 다행히 처마가 길게 드리워진 덕분에, 테라스의 그릴과 우리가 앉은 나무 탁자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이 처마를 두드리는 소리는 잔잔한 음악처럼 귓가를 맴돈다.


그 순간, 친구 하나가 입가에 옛 감성을 띄우며 흥얼거린다.


“빗소리 들리며 떠오르는 모습~”

"에이, 긴 머리 소녀는 무슨."
"이제는 흰머리 아줌마, 아니 할머니지!"


서로를 놀리며 웃는다. 빗소리는 여전히, 그 시절의 감성을 타고 흐른다.


친구들과 함께 나눈 저녁, 술잔을 기울이며 풀어놓은 일상의 이야기들, 그리고 며칠째 계속되던 비가 만들어낸 운치 있는 밤이다. 제법 세찬 빗소리를 들으며 숯불 향이 밴 고기와 곁들인 백주의 맛은 가히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아무 근심 없이 투명하고 하얀 술잔이면 족하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세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왜 문경일까.

하고많은 여행지 중 문경까지 오게 된 건, 이곳에 문경 CC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한 세 친구는 골프를 무척 좋아한다. 아니, '골프 마니아'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열정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의 열정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골프를 '즐긴다'라고 말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왜 굳이 문경 골프 여행이냐고? 세상일이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자주 어울리는 네 명의 친구 중, 나를 제외한 셋은 골프에 진심이다. 그렇다 보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다. 일 년에 한두 번쯤은 그들의 골프 여행에 동행한다. 요청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모든 걸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고 보면 내 사정도 딱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례행사로 가름할 겸 해서 대구에 사는 그들과 중간 지점인 문경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한때는 나도 레슨을 받고, 연습도 제법 열심히 했다. 처음엔 몇 시간씩 스윙을 반복하기도 했다. 필드에 나가 채를 휘두를 때마다, 공이 파란 하늘을 가르며 시원하게 뻗어가는 모습은 나름의 쾌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초, 길어야 몇 분. 곧 다시 마음은 평정으로 돌아왔다. 더 멋진 샷을 날리고 싶다는 욕망도, 굳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연습해도 금세 싫증이 났고, 마음은 심드렁해졌다. 문제는, 그 감정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골프가 잘 되는 날도 이런데, 하물며 공이 제대로 맞지 않는 날의 기분이야 말할 것도 없다. 홀마다 반복되는 똑같은 동작을 왜 하는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다. 18홀마다 짜릿한 승부를 즐기는 사람들에 골프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스포츠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런 체질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러고도 내가 골프 애호가가 될 수 있을까.


금요일 저녁 내내 속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토요일 아침 티업 시간에 비 올 확률이 95%라고 나오지만, 폭우가 쏟아지고 기도했다. 비가 많이 오면 당연히 골프를 취소하겠지. 세 사람은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나 혼자 이런 생각을 하니 내 심보도 고약하다. 솔직히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초록색 풍경화

토요일 아침, 여전히 비가 내린다. 새벽에 천둥 번개까지 요란했다. 속으로 ‘앗싸!’하고 외쳤다. 하지만 내 고약한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그 바람은 헛된 기대일 뿐이다. 꽤 세차게 내리던 비를 보며 친구들이 내뱉은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비 맞으며 치자!" 나는 당황했다. 정말로? 이런 날씨에?


그냥 뒀다간 우중 골프를 강행할 기세였다. 나는 소심하지만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 비에 골프가 웬 말이냐? 몸 상할까 걱정된다는 둥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대안으로 문경새재 산책을 제안했다. 비 내리는 산길을 걸으며 자연과 호흡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여유를 즐기는 것. 그것도 나름대로 운치 있는 여행이 아니냐는 말도 덧붙였다.


간간이 비를 뿌리는 문경새재의 산책길도 좋았다. 새재를 오르는 길옆으로는, 폭포수처럼 성난 물줄기가 굽이친다. 중간중간 바위에 부딪혀 튀어 오른 물살은 하얀 포말이 되어 흩어진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주흘산의 능선은 짙다 못해, 어디선가 검은 어둠을 길게 품고 있는 듯했다. 예로부터 음기를 품었다는 전설처럼, 주흘산의 줄기는 어딘가 모르게 음침하고도 신비로웠다.


한때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오르던 길목이 바로 이 자리였다니, 나도 모르게 역사 속 감회에 젖는다. 물기를 머금은 돌계단 위를 조용히 걷다 보니, 마치 시간의 틈새로 걸어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세월은 흘렀지만, 길은 여전히 누군가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나는 어느새, 장원급제를 꿈꾸며 길을 나섰던 옛 선비가 되어 있다.


문경새재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 도로에 접어들자마자, 거의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좌회전했다. 차는 조용히 마을을 지나, 잡풀이 키를 넘게 자란 산 중턱을 천천히 올랐다. 그 언덕 위에 자리한 작은 카페에 도착하자, 새재 너른 들판의 사과밭이 한눈에 펼쳐지는 장관이 눈앞에 들어왔다. 오늘 같은 날, 어디를 가더라도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졌을 것이다. 자연이 직접 붓을 들고 초록의 화폭 위에, 눈이 시원해지는 한여름의 풍경을 정성스레 그려 놓은 듯했다.


기어이 우중 골프

친구들은 감성이 다른가 보다. “비가 잦아드는 것 같아”라며 다시 골프장을 예약했다.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이 없어진 나는 결국 그들의 의견을 따랐다.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가늘고 잔잔한 비가 내렸다. 기왕 하는 거, 마음을 고쳐먹고 즐겁게 쳐보자고 다짐했다. 다행히 몇 개 홀을 지나자, 빗발은 누그러졌고, 실비만 간간이 오락가락했다. 잔디 위엔 희미한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공을 집어 드는 손끝에도 축축한 기운이 감돌았다.


평소 골프장에선 공을 여럿 잃곤 했지만, 오늘은 두 개만 잃었다. 드라이브도 잘 맞았고, 공이 시원하게 뻗어가는 샷도 꽤 있었다. 누가 봐도 ‘성공적인’ 라운딩이었다. 친구들은 내 실력 향상을 반가워했고, 함께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오늘 너무 운이 좋은 날이다.


단연코 내 실력이 좋아질 리가 없다. 이번 라운딩 전에 나는 연습 한 번 하지 못했고, 골프채를 손에 쥐어본 기억조차 없었다. 사실 바쁘기도 했지만, 차일피일 연습하는 날을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마침 문경에 비가 억수같이 온다는 일기예보에 마음이 더 게을러졌다.


하지만 문경 CC에서 마주한 풍경만큼은 달랐다. 제법 높은 산을 깎아 만든 코스였지만, 의외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산허리를 따라 유연하게 이어지는 코스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비기너에 가까운 나로서는, 가파르거나 막막한 코스를 보면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런 긴장감이 없어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비가 그치자, 비를 몰고 온 구름이 산등성을 따라 천천히 물러난다. 마치 하늘로 퇴각하는 군대처럼 조용하고 느리게, 그러나 장엄하게. 한여름 7월 중순임에도 햇빛 없이 흐린 하늘에서 불어오는 물기 머금은 바람은 놀라울 만큼 신선하다.


그렇게 다시 나는 길을 나설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그래, 이런 풍경을 보기 위해서라면… 가끔 골프장에 올 수도 있겠구나.”


비에 젖은 잔디 위로 솟는 흙냄새, 먹구름 사이로 스며드는 은은한 햇살,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여름날 오후의 아름다움, 그것은 진심이다. 친구들은 골프를 통해 그들만의 기쁨과 만족을 얻는다. 하지만 나는 비 오는 날의 풍경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느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삶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친구들이 골프를 통해 찾는 가치와 의미를 나는 존중한다. 나 역시,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을 당당히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시간 여행자들 아닐까. 누구는 골프 클럽을 들고, 누구는 커피잔을 들고, 또 누구는 음악을 들으며,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길을 걷는다.


‘골프 유감(有感)’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골프 유감(遺憾)’이라 해야 할까. 아마도 그 둘 사이 어딘가 일 것이다. 이렇게 나를 잠시 멈추게 하고, 바라보게 하고, 다시 걸어가게 하는 것이라면, 골프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주 가끔, 다시 그들과 함께하는 골프 여행길을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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