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독서 동아리 <오후의 글방>에서 발표할 원고이다. <오후의 글방>은 화성시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50세 이상 세대를 위한 독서클럽이다. 작년 8월에 시작해 어느덧 1년째, 격주 수요일마다 꾸준히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모임의 주제는 영화 『밀양』이다. 나는 이 영화를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 말한 '부조리'라는 주제와 연결해 보았다.
『밀양』은 전도연, 송강호 주연의 2007년 5월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다. 이 영화는 2007년 칸 영화제 장편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이 영화로 주연 배우 전도연은 한국배우 최초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된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는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슬픔보다는 태양 빛이 너무 눈부시다는 사실에 더 신경을 쓴다. 사람들은 그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도 무표정한 그의 태도는, 뫼르소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며칠 후, 뫼르소는 알제 해변에서 “태양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에” 총을 쏘아 아랍인을 죽인다. 그는 죄책감도 없이, 햇볕이 너무 뜨거워 방아쇠를 당겼다고 말한다. 심지어 자신의 살인에 대해 어떤 변명조차 하지 않은 채,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 말도 안 되는, 상식 밖의 일들이 이 소설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당연히 슬퍼해야 하는 것 아닌가?
햇볕이 뜨겁다고 사람을 죽이다니, 그런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가 믿어온 ‘인간다움의 본질’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우리는 인간이 본래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어왔다. 그리고 그 믿음이 곧 인간다움의 기준이자 본질이라 여겨져 왔다.
부조리한 세상
하지만 뫼르소는 달랐다. 그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회의 기대를 거부했다. 부조리란 합리적 질서를 기대하는 세상이, 정작 비합리적이고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모순된 상황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부조리했을까? 왜 그는 프랑스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을까?"
작가 카뮈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출신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뫼르소도 그렇다고 추정할 수 있다. 뫼르가 프랑스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30년 전후는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완전히 정착되었다. 당시 식민지 출신이라는 사실은 곧 차별과 배제를 의미했다. 소외된 자리에서 바라본 세상은 공정하거나 이성적인 곳이 아니었다. 뫼르소에게 세계는, 납득할 수 없는 기준과 억지 논리로 움직이는 부조리한 곳이었다.
변호사가 정당방위를 주장하자고 설득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사형을 피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태양 때문에 그랬다”는 말을 굽히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교도관이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권했을 때도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않았고, 후회해야 할 때조차 후회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도 끝까지 담담했다. 그의 모든 무표정은,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 자신이 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어요.
이와는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공간에서,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 역시, 세상의 부조리 앞에 무너진다.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밀양으로 내려온 그녀는, 또다시 가장 잔혹한 시련을 겪는다. 아무 잘못도, 아무 죄도 없는 그녀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납치되어 살해당하는, 극단적인 부조리가 닥친 것이다.
아들 준의 죽음은 그녀에게서 삶의 모든 의미를 앗아간, 절대적인 절망이었다. 평범하고 착하게 살아가던 그녀에게, 갑작스럽고도 난데없이 닥친 이 비극을, 그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그녀는 교회를 찾는다.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 속에서, 위안을 얻고 싶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신의 품에 기대어,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가해자를 직접 만나서 그를 용서하기 위해 감옥을 찾는다. 그를 용서하고, 자신도 구원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남자는, 차분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어요. 평안합니다.”
그 순간, 그녀는 무너진다. 피해자인 자신은 여전히 깊은 고통 속에 있는데, 아들을 죽인 그는 평안을 누리고 있다. 이 상황을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정의와 구원, 그리고 신에 대한 그녀의 모든 믿음을 뒤흔드는, 근본적인 부조리였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도대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신은 왜 이토록 정의롭지 않은가. 그녀는 신을 떠난다. 이후 신애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목사에게 도전적으로 묻는다.
“하느님이… 누구세요?”
영화의 마지막,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자르는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예전의 신애가 아니다.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며,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 선택엔 고통과 외로움이 따르지만, 그녀는 부조리한 세상에 분연히 맞선다.
가수 나훈아는 노래 <테스형〉에서 외쳤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하늘은 못된 짓을 한 사람을 반드시 벌하고, 선한 사람은 언젠가는 구제받는다. 세상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모든 일이 결국 올바름으로 돌아간다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우리는 믿고 살아왔다. 학교에서, 책에서, 부모님의 말씀을 통해 수없이 들어왔던 삶의 진리였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일수록 이 믿음에 더 의지했고, 나쁜 일을 멀리하며 조심조심, 하루하루를 견뎠다.
정작 살아보니, 세상은 그런 원칙대로만 굴러가지 않았다. 이유 없는 고통과 상실, 설명되지 않는 비극이 예고 없이 들이닥쳤고, 이성도 정의도 통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졌다. 이 세상은 합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힘과 권위가 진실을 억누르는 부조리의 무대였다. 뫼르소와 신애는 바로 그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끝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나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