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이 필요하다
내 피에는 유목민의 DNA가 있을까. 오래전 떠났던 대구를 다시 찾았다. 대구백화점에서 대구역으로 이어지는 동성로를 걸었다. 30년, 아니 40년? 군데군데 새 건물이 섰지만, 스카이라인은 변하지 않았다. 그 거리, 그 골목, 그 하늘과 바람은 그대로다. 몸에 익숙하지만 낡고 유행이 지난 옷. 편안하지만 초라하다.
그 사이에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었나. IT 혁명으로 대한민국은 초고속 인터넷 강국이 되었다. 뒤이어 모바일 혁명이 왔다. 이제 AI 혁명이다. 기계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자율주행차가 거리를 달리고, 로봇이 공장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온다.
대구는 흐름에서 비켜섰다. IT 산업단지를 만들었지만, 판교나 테헤란로가 되지 못했다. 스타트업 지원센터를 세웠지만, 실리콘밸리는커녕 강남의 작은 사무실만도 못한 생태계를 만들었다. AI를 외치지만, 연구소도, 인재도, 투자도 다른 곳으로 몰려가고 있다.
“대구 사람들은 의리가 넘치네요. 우리는 남이가. 그거 아니에요?” 타지에 살다 보면 이런 말을 듣는다. 대구를 조롱할 때 쓰는 말이다. 이제는 그런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대구를 위해 변명을 하려 한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가 떠오른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 『역사를 위한 변명』을 썼다. 전쟁으로 수천만 명이 죽었다. 사람들은 절망했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었는데 현실은 야만이었다. 사람들은 역사 공부가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블로크는 역사는 여전히 의미 있고,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가치 있다고 변명했다.
대구도 그렇다. 뒤처졌다고, 낙후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대구의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고, 대구의 변명을 들어야 한다. 그 후 미래로 나아갈 방안을 찾아야 한다.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버림받은 연인의 독백
대구는 죽어가고 있다. 아니,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 한때 ‘대한민국 제3의 도시’라는 자부심이 얼마나 공허한가.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몰락한 양반이 뒷방에서 꺼내든 누렇게 바랜 족보와 다름없다. 고관대작을 지낸 조상들이 초라한 현실을 바꿔주지 못한다.
대구는 섬유산업의 메카였으며, 교육의 성지였다. 지금은 ‘대한민국 제일의 정치 도시’, ‘보수의 심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대선 주자들이 서문시장을 들러 어묵 한 꼬치를 먹고 사진을 찍는 곳. 선거철만 되면 ‘대구 시민 여러분!’을 외치다가,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히는 곳.
대구는 그때마다 압도적인 표를 보냈고, 위기 때마다 방패가 되어준 보수의 보증인이다. 승리는 늘 그들만의 잔치였고, 떠나면 돌아보지 않았다. 다른 도시에는 첨단 산업이 들어서는 동안, 대구에는 공허한 약속만 남았다. 지독히 슬픈 짝사랑이다.
그 사이 대구는 서서히 질식했다. 1인당 지역 내 총생산 30년 최하위, 20대 청년 순유출 전국 1위, 실업률 급증, 제조업 붕괴. 이 냉혹한 숫자 앞에서도 대구는 과거의 영광을 되뇌고 있다. 슬픈 자화상이다.
반도체의 경기·충청, 자동차의 울산·광주, 바이오의 인천 송도, AI와 로봇의 판교. 대구에는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대기업의 핵심 생산 기지도, 연구소도 없다. 대구는 ‘첨단 산업의 갈라파고스’가 되었다. 한때 사랑받았지만, 버림받은 연인의 쓸쓸한 독백만 남았다.
선거 때마다 압도적 지지에도
1인당 총생산 30년째 최하위
타 도시에 첨단산업 들어설 때
대구에는 공허한 약속만 남아
단심(丹心)에서 변심(變心)으로
대구는 보수를 향한 붉은 마음, 단심(丹心)을 지켰다. 이제는 헤어질 결심을 할 때다. 변심이 나쁜 것은 동지를 배신하거나 공동체의 이익을 해칠 때다. 대구가 실리를 추구한다고 대한민국 발전이 저해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쇠락하는 도시가 혁신 거점으로 부활하는 것, 청년들이 돌아오고 기업들이 모여드는 것. 그것은 국가 전체의 이익이다. 대구의 변심은 배신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이고, 발전이며, 대한민국 균형발전을 위한 선택이다. 대구도 변심할 권리가 있다. 아니, 변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광주를 보라. 과감한 개방을 선택했다. ‘광주형 일자리’로 노사 상생의 새 모델을 만들었다. 최근 정부는 광주를 국내 처음으로 ‘자율주행 실증도시’로 지정했다. 단순한 시범 지구가 아니다. 실제 시민이 이용하는 도로에서 자율주행 AI를 검증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렇게 광주는 미래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그동안, 대구는 어땠는가. ‘보수의 종가’라는 자존심을 지키느라 과거에 매달렸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지지했다. 대가는 허무하다. 보수를 향한 항심(恒心)은 지역 경제의 몰락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에 이바지하는 몫마저 사라지게 했다.
이제는 도약할 때다
피츠버그도 그랬다. 미국 철강 생산의 절반을 담당했던 “Steel City(철의 도시)”. 1980년대 초 철강산업이 붕괴하자 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인구는 70만에서 30만으로 반 토막 났다. “미국에서 가장 살기 힘든 도시”라는 오명을 얻었다. 피츠버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피츠버그는 철강의 부활을 포기하고, 카네기멜런대학(CMU)을 중심으로 AI와 로봇 도시로 전환했다. 그러자 우버, 구글, GM이 자율주행 연구소를 세웠다.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이 더 나은 삶의 질을 찾아 피츠버그로 이주했다.
1980년 인구 3만 명의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중국 심천. 지금은 인구 1천780만 명의 거대 도시다. 2019년 GDP가 홍콩을 넘어섰다. 화웨이, 텐센트, 로봇 회사 UBTECH 등 첨단 기업들이 밀집했다. 4시간 만에 창업하고 일주일 내 시제품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심천이다.
대구도 과거와 작별하고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피츠버그에 CMU가 있었다면, 대구에는 10여 개 대학이 있다. 이 인적 자원을 AI로 연결하는 것. 그것이 대구의 도약이다.
대구만의 승부수는 무엇인가? 의료 AI다. 반경 10km 안에 메가급 병원 6개가 밀집한 국내 최대 의료 클러스터다. 경북대 의대, 영남대 의대, 계명대 의대 등의 연구 인력까지 있다. 진단 AI, 신약 개발 AI, 돌봄 로봇-모두 의료 데이터가 핵심이다. 필요한 것은 중국 심천 같은 빠른 결단력과 행정지원력이다.
판교는 플랫폼 AI를, 광주는 제조 AI를 한다면, 대구는 헬스케어 AI로 승부한다. 여기에 대구의 지리적 이점을 더하자. 부산항 40분, 동남아 접근성 최고. 생활비는 판교의 절반. 동남아 AI 인재들에게 대구는 싱가포르보다 저렴하고 서울보다 살기 좋은 도시가 될 수 있다.
죽어가는 피츠버그 부활시킨 건
시장 리처드 캘리기리의 결단력
대구도 과거와 이별하고 AI 이끌
통찰·결단력 가진 새 리더 필요
AI 도시로 가는 길
피츠버그를 부활시킨 것은 시장 리처드 캘리기리의 결단력이었다. 취임 직후, “철강의 도시는 끝났다. 이제 지식의 도시로 다시 태어나자”라고 선언했다. 철강산업이 몰락하고 도시가 존폐 위기에 처했을 때, ‘피츠버그 르네상스 II’를 시작했다. 지식 기반 첨단 도시로 체질을 바꾸는 대전환이었다.
임기 중 그는 희귀병인 아밀로이드증 진단을 받고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집무실을 지키며 카네기 멜런 대학교(CMU) 등과 협력해 미래 산업의 씨앗을 뿌렸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도시 부활을 위해 헌신한 그의 투혼은 오늘날 피츠버그가 AI 시대를 선도하는 스마트 도시로 재탄생하는 토대가 되었다.
대구에도 그런 결단력과 통찰력을 가진 리더가 필요하다. “보수의 도시는 끝났다. 이제 AI의 도시로 태어나자”라고 선언할 지도자, 잠시 머물렀다가 훌쩍 떠나지 않을 지도자, “르네상스 대구”를 이끌어갈 리더. 그가 할 일은 명확하다.
먼저 의료 데이터를 공유하고 개방하는 것이다. 경북대병원을 비롯한 6개 메가급 병원, 어느 도시에도 없는 대구의 강력한 자산이다. 개인정보는 철저히 보호하면서, 고도로 익명화된 데이터를 AI 학습에 개방한다. 이를 위해 규제 없이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특별구역을 지정하는 것이 좋다.
데이터가 있는 곳에 기업이 오고, 기업이 오는 곳에 인재가 모인다. 그게 가능할까?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지도력이다.
매년 대학을 졸업하는 수만 명의 인재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떠난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실무 중심 AI 교육, 파격적인 청년 정착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청년들이 정착해 살아가는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협력사 수십 개, 일자리 수천 개가 따라오는 선도 기업을 유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율주행 로봇, 돌봄 로봇, 드론 배송을 규제 없이 실험할 수 있게 하자. 줄 수 있는 혜택을 모두 주자. 기업들이 찾는 대구가 되어야 한다.
메가급 병원 6개 밀집한 대구
경북대 의대 등 인력도 풍부
헬스케어 AI로 승부수 띄워야
중요한 건 빠른 결단·행정지원
IT도 놓쳤고, 반도체도 놓쳤고, 바이오도 놓쳤다. AI는 아직 판이 정해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결단하면 대구는 살 수 있다. 필요한 건 리더십이다. “피츠버그의 미래는 철강이 아니라 두뇌에 있다”던 캘리기리처럼, “대구의 미래는 보수가 아니라 두뇌에 있다”라고 선언할 리더. 대구·경북 통합이 논의되는 지금, 누가 ‘리처드 캘리기리’가 될 것인가?
수십 년째 그대로인 이 도시가, 10년 후에는 헬스케어 AI 스타트업들이 모여드는 한국의 피츠버그, 혹은 한국의 심천이 되어 있을까. 초라함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이 내가 준비한 대구를 위한 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