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구신문>의 2026년 신년 기획특집 <AI야, 나랑 놀자>에 실렸던 글이다. 기획특집 칼럼이다 보니 다른 글보다 내용이 길다. 여기 올리면서 일부 문장만 다듬었다.
증기기관이 바꾼 세상 - 자본과 노동의 분리
1700년 말, 제임스 와트가 글래스고 대학 실험실에서 뜨거운 증기를 바라보던 그 순간, 인류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갈림길로 들어섰다. 주전자 뚜껑을 들어 올리는 증기의 힘. 그 작은 발견이 5000년 농경사회를 무너뜨리고 산업자본주의를 탄생시킬 줄 누가 알았을까.
산업혁명의 충격은 모직 공업을 뒤흔들었다. 숙련공 한 명이 종일 짜던 천을, 증기 방적기는 몇 시간 만에 생산했다. 1820년대까지 수만 명의 수공업자가 몰락했다. 설상가상으로 농경지마저 양 목장으로 변해 농촌이 몰락했다. 모직 공장에 원료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공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등장했다. 농부는 땅에서 분리되어 공장으로 이동했다. 자본가는 기계와 건물을 소유했고, 노동자는 오직 자신의 육체와 시간만을 소유했다. 토지·자본·노동의 결합이 깨지면서 산업 자본과 임금 노동이라는 새로운 두 축이 탄생했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 아들>과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초창기 노동자들은 참혹한 고통에 내몰렸다. 1811년 영국, 일자리를 빼앗긴 숙련 직조공들은 기계를 망치로 부쉈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이 역전되었다. 기계가 생산성을 높이자 가격이 내려갔고, 수요가 폭발했다.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자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그 후로도 기계는 계속 발전했지만 언제나 인간을 보조하는 도구였다. 컨베이어벨트가 등장해도 사람이 조립했다. 컴퓨터가 나와도 사람이 프로그래밍했다. 기계는 인간의 근육을 대체했으나, 여전히 판단과 결정은 인간의 몫이었다.
디지털 세상에 갇힌 AI의 돌파구
2022년 11월, ChatGPT가 등장했다. 출시 5일 만에 100만 사용자, 2개월 만에 1억 명.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확산이었다. ChatGPT는 시를 쓰고, 코드를 짰으며,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사람들은 “모든 지식 노동이 대체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한계는 분명했다. 공을 던지면 어디로 떨어질지 계산할 수 없었다. 컵에 물을 따르는 행동도 시뮬레이션할 수 없었다. 왜일까?
ChatGPT를 비롯한 거대언어모델(LLM, 방대한 텍스트로 학습한 AI)은 물리 법칙을 시뮬레이션하지 않고 오직 문자로만 세상을 배웠다. 수조 개의 문장을 읽었어도 실제 세상을 본 적이 없었다. 중력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물건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책으로 배운 연애가 실전에서 맥을 추지 못하듯, LLM은 디지털 세상에 갇혀 있었다.
AI에게 세상을 보여주다
2020년대 초중반, AI 연구의 두 갈래가 합류했다.
첫 번째 흐름은 AI에게 '세상 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사람이 걷고, 물건을 집고, 문을 여는 장면들을 학습시킨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물체가 떨어지는 현상들을 보여준다. AI는 이 과정에서 중력, 마찰력, 탄성을 스스로 터득한다. 교과서가 아닌 관찰로 배운다. 연애의 고수가 이론서가 아닌 실전에서 노하우를 터득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두 번째 흐름은 AI에게 '행동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언어 이해를 넘어 웹 브라우징, 앱 조작 등 실제 환경에서 작업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두 접근 모두 AI를 "대화하는 존재"에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에이전트"로 진화시키고 있었다.
2024년 구글 딥마인드의 '지니'는 한 장의 이미지만으로 그 속의 세상을 3D로 재구성했다. 오픈AI의 '소라'는 텍스트 지시만으로 60초짜리 현실적 영상을 만들었다. 단순한 합성이 아니었다. 물리 법칙을 이해하고, 3차원 공간을 계산하며, 시간에 따른 변화를 예측하는 진짜 '세상 이해'였다.
월드 모델을 장착한 AI 로봇에게 "저 상자를 선반에 올려놓으라"라고 지시하면, 로봇은 상자의 무게를 가늠하고, 거리를 계산하고, 장애물을 피해 최적 경로를 찾는다. 누가 가르친 게 아니라, 수백만 번의 관찰로 스스로 학습한 결과다.
피지컬 AI의 등장
2025년 3월, 휴머노이드 로봇 Figure 01이 BMW 공장에 배치되었다. 10월에는 테슬라 옵티머스가 배터리를 조립했다. 실험실 시제품이 아니라 실제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들은 장애물을 피하고, 부품을 조립하며, 불량품을 분류한다. 월드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피지컬(Physical) AI’다. 물리적 세계를 이해한 AI는 상황을 판단하고, 스스로 최적 행동을 결정한다. 프로그램이 아닌 학습으로, 명령이 아닌 판단으로 움직인다.
증기기관은 인간의 근육을 대체했다. 그러나 '무엇을 만들지'는 여전히 인간이 정했다. 컨베이어벨트는 물건을 옮겼으나, '어디로 옮길지'는 인간이 지시했다. 산업용 로봇은 용접했으나, '어떻게 용접할지'는 엔지니어가 프로그래밍했다.
피지컬 AI는 이 경계를 넘어섰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노동 그 자체의 분리 - 협상 테이블이 사라진다
산업혁명을 통한 제조 공장의 등장은 자본과 노동을 분리했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독점했으나, 노동 자체는 여전히 인간의 것이었다. 자본가도 공장을 돌리려면 인간 노동자가 필요했다.
AI 혁명은 노동 자체를 인간 노동과 기계 노동으로 분리하는 중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24시간 쉬지 않고, 실수하지 않으며, 불평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더 이상 인간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200년간 노동자는 투쟁할 수 있었다. 파업하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최저임금을 쟁취했다. 자본가도 노동자 없이는 공장을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협상력이 있었다.
2026년, 상황은 역전되고 있다. 자본가는 “그럼 로봇을 쓰겠다”라고 말할 수 있다. 노동이 인간의 독점물이 아니게 된 순간, 노동자는 협상 테이블에서 밀려난다. 이것이 인간 노동과 기계 노동 분리의 진정한 위협이다.
골드만삭스는 “2030년까지 제조업 일자리의 25~30%가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라 전망했다. 맥킨지는 “물류, 건설, 농업까지 확대되면 40%에 달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단순 반복 작업뿐만 아니라 상황 판단이 필요하고 섬세함이 요구되는 작업까지 대체 범위에 들어왔다.
비용 혁명 - 인간보다 싼 로봇
경제성은 더욱 충격적이다. 2024년까지 휴머노이드 로봇 가격은 20만~30만 달러였다. 그런데 2025년 말 중국 유니트리는 1만 6천 달러짜리 G1을 출시했다. 테슬라는 옵티머스를 2만 달러 이하로 낮추겠다고 공언했다.
월드 모델과 LAM은 학습 비용마저 낮췄다. 예전엔 로봇 훈련에 수개월이 걸렸다. 실제 공장에서 수천 번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했다. 이제는 가상 환경에서 수백만 번 시뮬레이션을 몇 시간 만에 끝낸다. 학습 비용이 100분의 1로 줄었다.
로봇은 24시간 일한다. 쉬지 않고, 아프지 않으며, 퇴직금을 요구하지 않는다. 2년이면 투자를 회수하고, 그 후 20년은 순이익이다. 가격 혁명과 학습 혁명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자본의 입장에서 선택은 명확하다.
이번에도 새 일자리가 생길까?
산업혁명 초기,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워 기계를 파괴했다. 시간이 흐르고 기계가 큰 폭으로 생산성을 높이자,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이번에도 그럴까? 낙관론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로봇을 설계하고, 제조하고, 유지보수하는 일자리가 생긴다”라고. “월드 모델을 훈련시키고 데이터를 관리하는 직업이 늘어난다”라고.
맥킨지는 2030년까지 전 세계 8억 개 일자리가 자동화될 것으로 본다. 새로 생길 일자리는? '수천만 개'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이 숫자 뒤엔 사람들이 있다. 조선소에서 30년 용접을 해온 근로자,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작업복을 입고, 불꽃 속에서 강철을 이어붙였다. 손끝의 감각으로 용접봉의 각도를 조절하고, 소리로 온도를 가늠했다. 그 숙련은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었다.
그러나 2026년, 피지컬 AI 로봇은 센서로 온도를 측정하고, 밀리미터 단위로 각도를 조절한다. 30년 숙련이 3개월 학습 데이터로 대체된다. 최근 회계 분야에서 AI가 등장하면서 신임 회계사 채용이 급감했다. 대학에서 4년간 회계를 전공한 청년도 일자리를 잃었는데, 이제 그런 일이 생산 현장에서도 일어난다. 그것도 10배, 100배 규모로.
2026년,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노동이 자본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지도 200년이 넘었다. 사회는 적응할 시간이 있었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복지제도가 만들어졌다. 재취업을 위한 교육 시스템도 발달했다. 산업혁명은 노동자들이 살아갈 대안을 찾을 시간을 주었다.
AI 혁명에도 그럴까? 그러기에는 기술 발전이 너무 빠르다. 2024년 시제품을 선보인 휴머노이드 로봇은 2025년 양산되었다. 2026년, 수만 혹은 수십만 대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전 세계 공장에서 일할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노동과 노동의 분리이다. LLM이 인간의 지능을 모방했다면, 월드 모델은 인간의 상식을 학습하고 있다. 피지컬 AI는 이 둘을 결합해 인간처럼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기계를 만들어냈다. 과연 자본가는 인간 노동을 선택할지 의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변화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다. 기계를 부수며 저항하듯 AI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사회 계약을 만들 것인가? 보편적 기본소득인가, 로봇세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해법인가? 2026년 새해, 우리가 답해야 할 가장 절박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