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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Aug 26. 2023

빛은 밝아지고, 색은 어두워진다.

【색(色)의 인문학 20】


처음에는 밝고 화사한 그곳

빛이 바래고 해지고

세월의 흔적만 덕지덕지 한 것은

빛바랜 색깔 때문이야



그곳의 색이 바랬다.



가끔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 양양으로 여행을 가. 양양 버스터미널은 수십 년 동안 한자리에 있었어. 켜켜이 쌓인 흔적만큼이나 시간의 때가 덕지덕지 붙었지. 간간이 덧대기 공사를 해도 건물은 해졌고, 대합실 벽은 누렇게 변했어. 처음 칠할 때 눈부시게 하얀 벽의 색이 변했다는 뜻이야. 벽지도 창문도 낡고 원래의 맑고 깨끗함이 사라졌어. 그간 몇 번이나 덧칠한 탓에 벽은 낡고 탁한 색으로 변했어.


그곳에 있으면,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야. 낡고 흐릿하지만,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좋았어. 가물거리던 추억을 소환해 곱씹는 재미가 있었어. 이방인의 눈에는 해지고 색 바랜 벽지도 아름다웠지. 그렇지만, 정작 이곳에 사는 사람은 얼마나 불편할까? 스쳐 지나는 이의 우수만으로 이대로 버텨달라고 하기엔 염치없는 부탁이긴 해.       


최근 양양 터미널을 다녀온 사람은 무슨 소리냐고 타박할 거야. 맞아. 이 내용은 2022년 여름 이전의 이야기야. 작년 8월쯤인가 새로 단장한 터미널로 이사를 했어. 낡은 것은 새것에 밀려나는 게 밀려나게 마련이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1990년의 풍경이 시간을 훨쩍 건너뛰어 현대식으로 바뀌었어. 1층 대합실은 말할 것도 없고, 2층에는 전망 좋은 카페도 생겼어.



새로 생긴 터미널은 밝고 산뜻해. 흰색 페인트를 칠한 벽은 눈이 부셔. 깔끔하게 단장한 대합실에 앉아 먼 길 떠날 생각에 마음이 절로 들떴어. 그러나 이곳도 언젠가는 색이 바랠 거야. 아쉽게도 흐르는 세월은 영원히 이 모습을 간직하도록 허락하지 않아. 10년 혹은 20년 뒤에 이곳에 오는 사람은 빛바랜 건물을 바라보며, 과거의 추억을 회상할 거야.


시간이 지나면 색은 변하고 어두워져. 벽지도, 사진도, 그림 속의 색도 변해. 하얀 벽면은 누렇게 되고, 심지어 그림 속 하얀색도 점차 어두워져.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색채라고 별수 있나. 아무리 잘 보존하고 완벽한 진공이 아니라면 변색하는 것을 막을 길 없어.  


색은 왜 바래는가?

물체에 색을 입히는 물질에는 염료(染料)와 안료(顔料)가 있어. 염료는 주로 직물, 의류, 플라스틱, 음식, 종이 등에 색을 부여하는 데 사용되고, 안료는 페인트, 잉크, 코팅제, 화장품, 플라스틱 등에 색을 입힐 때 사용해. 이것들을 자연에서 구할 때는 무척 힘이 들었지만,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생활 속의 색채 혁명이 일어났어.


염료와 안료에 들어 있는 색소(色素)가 색을 결정해. 색소의 화학적 구조, 특히 원자들 간의 결합과 전자의 배열에 따라 색상이 전해진다는 말이야. 이 부분은 화학적인 내용이 깊어지니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갈게. 대신 어떤 염료나 안료의 색소라도 원자와 원자가 결합한 분자 구조를 가졌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돼. 그 결합이 끊이거나 변하면 색이 바래거나 변하는 거야.


그렇다면 벽의 흰색이 바랜 것은 흰색 색소의 분자 구조가 변했다고 볼 수 있어. 색소의 본래 원자와 원자의 결합 형태가 깨졌다는 이야기야. 오랜 시간 온도, 습도, 공기와 만난 색소의 분조 구조는 변하기 마련이야.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색은 바래고 탁해지지.


아이러니하게도 빛은 세상의 색을 만들었으면서도 색을 변하게 하는 주범이야. 햇빛은 색소의 원자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지. 자외선은 에너지가 높아 염료 속에 들어 있는 원자를 아예 파괴해. 사람 피부의 원자 고리까지 망가뜨릴 정도로 강한 에너지를 가진 게 자외선이야. 아무리 볕이 좋아도 햇빛 아래 오래 서 있는 건 좋지 않아. 그리고 잊지 말고 자외선 차단제를 얼굴에 꼭 바르는 게 좋아. 


물감 속에 들어 있는 구리나 납 성분도 변색의 원인이 돼. 이것들이 공기나 습기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색이 변해. 공기 중의 산소 원자와 결합한 물감 속의 구리 원자는 산화해 누런색을 띠게 되는 거야. 과도한 열도 색상을 형성하는 분자 구조를 변화시키기도 해. 너무 뜨거운 열기구 곁에 장시간 예쁜 색을 두지 않는 게 좋아.


그림도 자칫 공기나 습기에 노출하면 색이 변하게 돼. 미술관의 그림은 첨단 장비를 동원해 빛과 공기를 차단하지. 이런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명작은 오랫동안 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어. 과거에는 그림 보존하는 기술이 없어 훼손된 명화가 한둘이 아니야.


빛은 밝아지고, 색은 어두워진다.

빛의 색은 공기나 습도를 만나도 변하지 않아. 빛은 분자나 원자의 구조를 가진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진 전자기파이기 때문이야. 빛은 색소를 가진 게 아니라는 뜻이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빛의 색은 변색할 일이 없어. 공기 중의 입자와 만나면 색을 산란할 뿐이야. 태양이 식지 않는 한, 빛은 원래 그대로의 색상을 유지할 거야.  


빛 속의 색으로 세상을 칠하면 어떨까? 색은 변하지 않을 거야. 안타깝지만 그럴 방법은 없어. 물체의 색에 부딪혀 반사한 빛의 색이 우리 눈으로 들어올 뿐이야. 우리는 물체의 색이 바랜 만큼의 빛의 색을 보게 돼. 그러니 세상이 변색하면 변색한 대로 색을 볼 수밖에 없어.


빛의 색은 섞을수록 밝아져. 일곱 빛깔 무지개색을 다 합하면 원래의 백색광으로 돌아가지. 그러나 인간의 색은 섞을수록 어두워져. 무지개색 일곱 물감을 섞으면 어떻게 될까? 검은색에 가까울 만큼 색은 탁해져. 빛은 신의 색이고, 색은 인간의 색상이야. 신의 색은 늘 한결같지만, 인간의 색은 변하기 마련이야.


빛과 색이 있어 참 행복해. 만일 빛이 없었다면 세상은 그냥 암흑천지야. 공포의 어둠이 지배하고 죽음의 침묵만이 존재할 거야. 또 색이 없는 세상은 단 하루도 살 수 없어. 온통 백색광이 쏟아지는 세상이나 무채색의 세상을 상상해 봐. 보이지만 아무것도 볼 것이 없을 거야. 입체감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어.


빛과 색은 자연이 인류에게 준 축복이야. 눈부시게 밝은 날에는 밖으로 나가 색색의 꽃을 바라보면, 빛과 색이 주는 행복함에 젖을 거야. 이것이 바로 색채의 미학이고 색채의 치유 효과야. 거기다가 무지개색 식단까지 차린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어. 더 늦기 전에 색과 빛의 힐링을 만끽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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