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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다 Jul 03. 2023

리듬 속에 그 춤을 - 윤피디

육아 회색 지대 인터뷰집

#심리상담사

#11살, 6살 아이 둘  


 윤피디님은 현재 제주도에서 심리상담 및 미술치료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11살과 6살의 남자아이 둘을 키우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에 오던 그녀는 최근 제주도에 정착해 그동안 살아온 삶의 양식과는 다른 삶을 사는, 새로운 변화를 마주하게 됐다.

 일과 육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생각, 느껴왔던 감각들이 새삼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인터뷰를 통해 그녀가 그려낸 삶의 리듬과 역동을 함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육아를 하기 이전부터 심리상담 일을 하셨네요. 혹시 육아를 시작한 뒤로 일을 하는 데 있어 바뀐 게 있나요?

 엄청 많죠. 제가 아이를 갖기 전에 5년 정도 일했던 곳이 학대 아동들을 전문적으로 상담하는 정부 보조기관이었어요. 통계적으로는 60%가 아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하는데, 그게 부모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죠. 중요한 건 이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아가는 과정인데, 아이가 학대를 당했을 때 부모의 정서적 지원이 생각보다 너무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저희 기관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가 부모교육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일반화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부모들로 인한 편견이 제 안에 많이 쌓이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일하면서 5년 동안 아이를 갖지 않았던 이유가 아마 부모의 역할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이 많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후에 아이를 출산하고 일했던 곳이 알코올이나 마약중독자인 부모와 아이들을 상담하는 기관이었는데, 그때 제가 인식이 변했음을 알게 됐어요.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이들을 단순히 ‘부모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대하고 있지 않더라고요. 아이가 있음으로 인해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봐주고 있지, 뭘 잘했다든가 이러면 안 된다는 식의 특정한 틀을 깨고 상담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왜 그럴까?’를 생각해 봤는데, 제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을 하면서 저라는 사람이 이론적으로 옳은 바를 언제나 행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았어요. 이건 저의 인격적인 성숙의 문제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우리의 위치가 이론적으로 옳은 것 만을 따라갈 수 있지 않아요. 이건 너무 빛 좋은 개살구예요. 상담이론, 발달이론, 부모 코칭 이론들이 제 안에서 무너지는 경험을 해보고 나니까 그 이후에 부모의 위치에서 무언가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어요. 물론 상담프로세스는 거의 비슷하고 겉보기엔 똑같았을 수 있죠. 상담이 더 잘되거나 안 된 것도 아니었고요. 다만 제가 상담자로서 내담자를 이해하는 깊이와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를 낳기 이전에는 ‘어떻게 부모가 이렇게 무심하고 방관적일 수 있지?’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이것이 한 엄마의 개인적인 인성이나 성격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의 구조, 계급의 문제라는 것도 너무 잘 알게 됐죠. 일하면서 만난 저소득층 흑인 엄마, 중산층 흑인 엄마, 중산층 백인 엄마가 아이를 대하는 관점, 정서, 불안도는 분명 차이가 있었어요.


- 상당히 거시적인 관점에서 부모의 역할, 육아라는 주제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달라졌을 수도 있어요. 센터에서 상담일을 하면서 엄마라는 위치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고, 제가 직접 육아를 하면서도 힘들다고 느끼는 지점들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 없으니까 이해해 보고자 고찰하고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다방면의 책으로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저 나름 극복하고 타협해 나아갈 수 있는 키워드로 찾은 것이 ‘모성신화’와 ‘공생’이었어요.


- 모성신화를 극복한다는 건 엄마들에게 ‘과한 기대감들을 내려놓자!’하는 건가요?

 이걸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면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게 돼요. 우리가 자본주의와 같은 어떤 사회적 제도에서 탈피할 수 없듯이 모성신화라는 개념도 내려놓거나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모성신화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마주하고 가야 하는 요소로 생각했어요. 모성이 신화인 이유를 알고 있으면 삶의 실질적인 행위들이 변화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작은 실수나 자기비판적인 생각이 들 때, 이것을 완화해 줄 수 있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어요.

엄마가 아이에게 무한하고 신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함께 있다는 것을 알 때, 아이는 나의 존재와 분리된 또 하나의 존재이기에 서로 존중하면서 같이 살아간다는 개념으로 바뀔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공생하는 거죠. 언제나 자애롭고 너그러운 신처럼 아이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리로 내려와서 ‘그도 인간 나도 인간, 나도 너한테 의지하고 나도 너한테 의지하면서 같이 살자’가 됐죠. 근데 완전히 모성신화를 내려놓을 수는 없더라고요.


- 왜 모성신화에서 완전히 벗어나거나 자유로울 수는 없으셨어요?

 제가 아이들 교육에 굉장히 관심이 높고 열의를 가진 어떤 동네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요. 모성신화가 교육열로 드러나기도 하거든요. 저는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달라, 나는 그렇게 안 살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안되더라고요.

 사람은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람들과 암묵적으로 합의한 코드 속에서 살아가잖아요. 제가 모성신화를 깨부수는 관점으로 삶을 운영해 간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제 관점대로만 대할 수는 없더라고요.

 암묵적으로 합의된 모성에 대한 사회적 코드, 이 사회에서 엄마라는 역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통상적인 개념을 적어도 이해하고 있어야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어요. 그래서 이 땅에 적을 두고 있는 이상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모성신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모성신화를 타파하는 방식으로 제 삶을 운영해 가려고 해요. 모성신화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지역으로 옮기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자 했죠. 그런데 이게 단순히 저의 의지나 열정만으로 가능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러한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자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만약 삶의 환경이나 방식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없었다면, 그래서 오롯이 나의 의지와 사명감만으로 꼭 해야만 한다고, 대단한 일이니까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저는 너무 힘들어서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결론적으로는요.


 뛰어난 정보력으로 최상의 교육을 시키고, 아이가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되기를 요구하는 사회다. 그리운 엄마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둘리와, 엄마가 보고 싶으면 세상 끝까지 달리겠다는 하니를 보고 자란 우리 세대는 ‘우린 엄마이니까!’라는 마법 같은 주문을 되뇌며 아이를 위한 정보를 찾고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에서 모성신화를 깨부수고 나아가 사회 구조와 시스템을 봐야 한다고 당신이 사들이는 교구와 교육법의 이면에 있는 상업성을 들여다보라고 얘기한다면 서로가 불편해진다.

 그저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고통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원인이 무엇인지,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은 없는지 고민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공감하는 것, 나아가 가능하다면 나만의 방식으로 구성된 삶을 실험처럼 살아보는 것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윤피디 님의 삶에서도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남편분께서 살림과 육아를 담당하고 윤피디님이 가장으로서 경제활동을 책임지게 되셨다고 들었어요. 어떠세요?

 맞아요. 그동안은 성실한 직장인이었던 남편이 육아와 집안일을 100% 전담하게 됐죠. 기간상으로는 이제 한 달 정도밖에 되진 않았는데, 저는 정말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 달을 보낸 것 같아요.

 남편도 아이들과 너무 잘 지내요. 물론 새로운 출발에는 언제나 허니문스테이지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힘들어하는 때가 오겠죠. 저 역시도 그동안에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은 짊어지지 않은 채로 저의 신념과 정체성에 부합하는 일들만 해왔는데, 이제는 가정을 경제적으로 온전히 책임지면서 고군분투하는 시간도 오겠죠. 그런데 지금 당장 걱정할 문제는 아니고 어쨌든 저는 이렇게 한번 살아보니까 너무 좋아요.


- 남편분이 하시는 육아의 모습은 어때요? 뭔가 다른가요?

 말하면서도 참 다양한 감정이 드는데, 남편이 육아와 살림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되면서 제가 기존에 아이들을 다루던 루틴과 전략은 완전히 무너졌어요.

아이들은 아빠와 밤 11시까지 보드게임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졌다고 울고, 신난다고 웃고 난리가 나요. 제가 만약 평소처럼 육아를 하는 상황이었다면 아이들은 이미 8시에 이 닦고 세수하고 자러 갔을 시간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신나서 놀고 있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지금 안 자고 있다고?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라는 생각을 할지언정 참 예뻐 보였어요. 양가적인 생각인 거죠.

생각해 보면 남편은 아직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요. 육아를 하다 보면 고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꾸려나가야 하고, 이런 상황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예측을 하면서 지켜내고자 하는 기준도 생기잖아요. 남편은 아직 그런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정보도 없고, 훈련도 안되어 있죠. 그럴 수밖에 없고요. 그동안의 저는 해줄 수 없던 육아를 남편은 어쨌든 지금 당장은 하고 있어요.

저의 육아 키워드는 효율성이었거든요. 최대한 효율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상을 구성하고자 했었어요. 근데 제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효율적으로 아이들을 다루고 나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던 거였어요. 근데 이제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을 챙기지 않고 밥 먹고 일하러 나가면 되는 거예요. 너무 행복한 거죠.

저는 아마도 늘 일과 육아를 온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느낌을 괴로워했던 것 같아요. 육아와 일을 완전히 분리하고 일만 해보니까 너무 신세계예요. 너무 좋아요. 적어도 지금은요!


- 윤피디님에게 일이 굉장히 중요했군요. 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일을 경제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으로써의 개념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계속 생각하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 중 하나인데, ‘왜 사람은 태어나서 꼭 몸을 움직이고 노동을 해야 하는 걸까?’에 대해서 고민해 봤거든요.

 애니메이션 중에 ‘Wall-E’ 보셨어요? 먼 미래에 지구의 생명체는 모두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구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면서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떠돌아다녀요. 우주선 안에서 자동의자에 앉은 채로 모든 일상을 해결하죠. 심지어 춤을 추는 것도 의자에 누워서 의자를 돌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도 스크린으로 대화해요. 모든 것이 다 AI 시스템과 로봇에 의해 기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상태예요. 그런데 지구의 청소 로봇이었던 월-E가 회복된 지구의 증거로서 흙 위의 새싹을 발견하게 되고 그 싹을 갖고 우주선에 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의자에 누워서 모든 것을 로봇에 의존하던 인간이 그 새싹을 보면서 감각이 깨어나는 거예요. ‘와 이게 흙이라는 거구나!’ 하면서 냄새를 맡고 만져보고 하면서 막 신기해해요.

 그동안 움직이지 않고 사용하지 않아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던 후각, 촉각과 같은 감각들이 깨어나는 거죠. 그런데 이 생명을 계속 유지하고 살아가게 하려면 흙에 물을 주고 가꾸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잖아요. 저는 결국 노동이 이 생명과 연결되기 위해 우리 몸의 감각을 깨우는 움직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일이 춤추기 일수도, 그림 그리기 일수도, 농사짓기 일 수도 있어요. 인간의 모든 움직임과 행위가 내가 태어난 이 세상과 연결되는 하나의 매개체로서 기능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음악을 들으며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연결됨을 느끼고, 손으로 흙을 파고 무언가를 심을 때 그 흙의 촉감, 냄새로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일을 해야 해요. 그런 모든 행위들을 다 일로 봐줬으면 좋겠고요.


- 내가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을 이용해 어딘가와 연결되는 과정이 윤피디님이 생각하는 일이군요.

 맞아요. 일은 결국 ‘나만의 세계를 벗어나는 행위’거든요. 무언가를 그리든 심든,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든 그 일을 통해 나를 벗어난 타인을 보게 돼요. 물론 타인과 교류 없이 혼자서 몰두해 그림만 그리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은 자연이든 우주든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자아를 벗어나고 초월해 가기 위한 과정이 바로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성격이 성숙하다. 발전한다고 말할 때 3가지 척도를 보거든요. 자율성, 연대감, 자기 초월, 이 3가지 영역을 봐요. 우선 자율성은 내가 스스로 잘 기능하고 있는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거예요. 연대감은 나를 벗어나 내가 타인과 어울리면서 남에게 나라는 존재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연대 속에서 나를 알아보는 것이죠. 그리고 그 연대감에서 더 성숙하면 내가 이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우게 되는데 이걸 자기 초월이라고 해요. 이렇게 단계적으로 발전하며 성격적인 성숙이 이뤄진다고 보는데 저는 이 세 단계가 모두 일을 하면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아이에게는 놀이가 일이겠죠. 놀이로 이 성숙을 이루어 가고요, 무언가를 배우는 학습도 결국 일이죠. 예술활동, 수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일이고 그 과정에서 성숙해 가겠죠.

 그런데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숙한 인간으로서, 소위 말하는 성공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그 감각들을 자주 차단해야 하는 것 같아요. 특히 아이들에게 ‘하지 마, 손으로 음식 만지지 마, 흙 묻히지 마, 예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감을 둬’ 이런 것들은 자꾸 감각을 긴장하게 하고 막아버리잖아요. 미디어로 공부를 하는 것도 시청각적으로 너무 과한 자극을 줘서 감각을 마비시킨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식적으로는 똑똑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자기가 느끼는 감각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제대로 느끼거나 사용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종종 슬퍼지기도 해요.


- 윤피디님의 지금의 스튜디오 역시 그런 감각을 깨우고 연결되게 하나요?

 완전요. 저는 정말로 이 공간 안에서 제 모든 감각을 깨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감각을 느끼는 일도 매우 중요하죠.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바라볼 때 얻는 시각적 정보, 목소리, 살짝 닿았을 때 움츠러드는 그 느낌 등 모든 감각에 대한 반응이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고 이것을 갖고 일하는 것을 너무 좋아해요.

저는 사실 이 스튜디오를 아주 극성맞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하고 있어요. 실제 제 아이들은 의도적으로 기획하려 하지 않으면서 이 스튜디오는 아주 극성맞게 기획해요. 어쨌든 사람은 아니니까요. 앞으로 어떻게 변형해 갈지 기획하면서 기대하고 바라보게 돼요. 저는 이 스튜디오가 고유의 목소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일반적인 상담에서 기대하게 되는 조언이나 해결방법에서는 조금 빗겨 나간 듯하면서도 도움이 되는, 그런 독특한 목소리를 내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슈를 해석하는 다른 관점이 필요한데, 저는 지금까지 그러한 관점을 갖기 위한 공부를 많이 해왔고, 여전히 하고 있거든요. 이런 곳이 모두에게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 잠깐 언급하셨는데, 일에 관한 것들은 기획하면서 아이들은 기획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쓰셨어요. 아이들은 왜 기획하지 않으세요?

 저는 아이들이 되게 잘 읽히거든요. 뭘 도와주고 어떻게 해줘야 어떤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가 보이고 정성스럽게 해 줄 수도 있죠. 근데 그걸 다른 아이한테는 해줄지언정 제 아이에게는 일부러 안 했어요. 제가 개입해서 뭘 하려고 하면 사실 결과가 보이고 그 결과가 나오면 제가 신이날 거거든요. 어느 순간 아이에 대한 기대치는 계속 올라가게 될 거고 아마 절제하기도 힘들 거예요.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갈등이 생기겠죠. 그럼 이건 나의 기대로 움직이는 레이스가 되는 거예요.

 아이들은 반짝반짝하며 변화를 보여주다가도 그 고유의 생각과 주장이 있어서 종종 ‘나 더 이상 안 해’ 하고 멈추거든요. 그때 ‘어 그래, 괜찮아, 존중할게.’라고 해야 하는데, 내 안에서 ‘아 이거 이렇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밀어붙이게 될 것 같은 거죠.

 제 직업의 특성상,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직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해 봤기 때문에 그 갈등들이 미리 두려워서 시도하지 않았던 것도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굳이 제가 기획하지 않아도 이 아이가 스스로의 때에 어떠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기 삶을 어떻게든 이끌고 가볼 수 있는 기회를 미리 뺏어서 재단하고 만지고 기획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결과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말이죠. 만약 나중에 저희 아이가 커서 ‘나는 너무 어렸고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어, 나는 지금 좋은 타이틀과 대학을 원하는데 그때 나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지 않아서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을 못하고 있잖아!’라고 한다면 저 진짜로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해? 나도 내 삶에 있어서 머리 빠지게 고민하고 최선의 선택을 했던 거야,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30대에 네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도 있어!”라고 할 것 같아요.


- 뭔가 인터뷰가 전체적으로 신나는 감정이 느껴져요.

 맞아요. 저는 사는 게 신나요. 하하하. 재밌어요. 물론 늘 그렇진 않지만 지금의 저는 신나요. 저는 감정에 엄청 솔직한 편이라 제가 너무 힘들고 괴로우면 ‘나 지금 진짜 화나’ 이렇게 말하고 너무 신나면 ‘나 지금 진짜 신나고 재밌어’라고 얘기해요. 그때그때 느껴지는 감정에 충실하려고 하죠. 궁금하면 행동하고 바로 가서 감각해요. 물고 뜯고 만져봐요.  

저는 제가 무언가를 감각하면서 어떤 운동 속에 있고 무언가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하면 신이 나요. 정체되어 있다고 느끼면 너무 슬퍼요. 제가 움직이고 있고 어디론가 가고 있으면 돼요. 누가 옆에서 ‘너 거기 절대 못 갈걸?’이라고 해도 제가 가고 있으면 그냥 좋은 거예요. 내가 변화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고 그 운동 속에, 리듬 속에 있으니까 신나는 것 같아요.


 변화의 역동 속에서 그녀는 기꺼이 슬퍼하고 기뻐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몸이 무언가를 느끼고 그것이 어떠한 감정을 일으키는지 들여다보면서 이 감정을 자신의 언어와 생각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육아 회색지대에 서 있는 나는 감정을 느끼는 일은 불필요하고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일을 하면서 느낀 나의 감각 또는 감정들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하면 좋은 점 혹은 나쁜 점들을 나열해 갔다. 육아를 하다가 화가 나면, 그 순간을 느낄 새도 없이, ‘화가 나려고 하잖아, 어떻게 해결하지?’로 넘어가곤 했다.

 감정을 건너뛴 이성은 행동할 수 없는 지식에 불과했고 그렇게 넘어간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이유를 모른 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나의 생각이 연결될 때, 비로소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인터뷰 한 소감이 있다면요?

 최근에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요즘의 저희 가족과 제 삶의 변화 그리고 계획에 대해서 반복적인 서사를 기반으로 설명하고 해명해야만 했어요. 그런데 오늘의 대화는 그저 한바탕 재밌게 이야기를 쏟아낸 것 같아요. 시원한 느낌이었어요.  


 윤피디님과의 인터뷰는 리듬 속에서 추는 춤과 같았다. 그녀에게 주어지는 어떤 환경이 삶의 리듬이라면 그녀는 그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같은 리듬 안에서도 신나고 빠르게 움직이기도 하고 느리고 편안하게 움직이며 숨을 고르는 때도 있었다. 다른 누군가와 손을 잡고 움직이기도 했다. 리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음악은 없는지 찾아보기도 하고 찾을 수 없으면 잠시 쉬면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만의 속도로 오늘 주어진 삶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육아 회색지대에서 방황하는 우리 역시도 지금의 삶이 들려주는 리듬을 온몸으로 느껴봤으면 좋겠다. 육아하면서 느끼는 분노, 억울함, 환희, 일을 하지 않으며 느끼는 지루함, 따분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고자 하는 에너지, 그 에너지를 내가 좋아하는 것에 쏟아부을 때의 느낌, 감정, 생각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 가능함을 아는 것, 그리고 이 리듬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하고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몸을 움직이고 멈출 수 있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한번 더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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