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요 Sep 14. 2021

오늘 오전 비행기인데요, 항공사가 파산했습니다.

뻥 아니고 100퍼센트 리얼 실화.

감격스러운 오로라를 선사한 아이슬란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던 교훈 넘쳤던 아이슬란드 여행은 마지막까지 순탄치 않았다. 


아이슬란드 링로드 투어를 마무리하고 국제공항이 있는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 도착했다. 아이슬란드에서의 마지막 날, 아이슬란드에 도착하자마자 면세점에서 샀던 그 많은 술 중 남은 술을 들이붓고 여러 고난을 겪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다친 곳 없이 무탈했던 여행을 자축하며 잠에 들었다.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



굉장히 이른 오전의 비행기인 데다 공항에 가기 전 렌터카도 반납해야 해 일찍 눈을 떴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휴대폰 알람을 확인하는데 항공사에서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기상 상황으로 연착인가 싶어 봤더니 비행기가 취소됐다는 소식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가 항공편을 예약했던 사이트에 전화를 하니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단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으로 갔다. 곧장 우리가 예약했던 항공편의 항공사 카운터에 가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봤더니 기다리란다. 다른 비행기를 잡아주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대기하라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침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 참 어제 분명 그래도 여행 무탈했다고 자축했더니 입방정도 아니고 보기 좋게 탈이 났다.







기다리라니까 일단 기다렸다.
기다리며 이와 비슷한 전례가 있는지 열심히 구글에 검색을 해보는데
아뿔싸. 항공사가 파산했단다.
네? 잘못 봤습니다?



원래 기업이라는 것이 이렇게 돌아가는 건가? 파산할 징조가 보이면 비행기를 운영하지 말던가, 최소 며칠은 여유를 두고 항공편을 조정한다던가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갑자기 하루아침에 '저희 파산했으니 오늘부터 항공편 다 취소해요.' 라니. (하지만 이런 식의 운영은 꽤나 빈번한 모양이다. 아, 정말 세상은 무섭다.)


항공사 카운터에서 길 잃은 어린양들을 인도하던 직원들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건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코도 석자지만 저들은 얼마나 정신이 없을까.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이윽고 매니저급으로 보이는 항공사 직원이 여행객들을 향해 우선 각자 돌아가는 항공편과 숙소 등을 알아서 예약한 후 항공사에 청구를 하라는 말을 전했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구글에 검색해보니 우리같은 경우에는 숙소와 추가 항공요금, 식비까지 모두 청구해서 돌려받았던 사례가 많았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는 비행기표 예약 사이트에 계속 전화를 걸었고, 기나긴 대기 끝에 겨우 연락이 닿았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그들은 곧바로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예약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일의 비행기표였다. 그러니까 렌터카도 다 반납하고, 에어비앤비도 다 체크아웃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 더 묵어야 한다.





클리셰. 야속하게도 이런 고난과 역경이 있는 날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게다가 해도 뜨지 않아 바깥은 아직 컴컴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공항 바로 근처에 호텔이 하나 있어 우선 그곳에서 묵기로 했다. 장대비를 뚫고 캐리어를 질질 끌며 호텔에 도착했다. 어차피 청구할 거 아침이라도 먹자 싶어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과 포동한 오믈렛을 먹고 있자니 지금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분개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누군가를 향해 비난했을 것이며, 새로운 비행기를 탈 때까지 이 일을 곱씹으며 짜증내고 통탄해했을 것이다. 나에게만 세상은 잔혹하다며 왜 이렇게 인생이 꼬이냐, 왜 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인가 하고 불만 가득한 표정을 계속 짓고 있었겠지.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좋은 것을 봐서 그런지 썩 매끄럽지 않은 일처리에도 아무 생각 없이 아침을 먹고, '아이슬란드가 우리 보내주기 싫은가 봐~'라는 농담을 하는 여유로운 내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다행히 다음날 예약한 항공편은 일정 변경 없이 예정 시간을 딱 맞춰 프라하에 도착했고, 항공사는 제대로 파산해 청구한 금액을 돌려받긴 개뿔, 우리는 잠수 이별을 당했다. 하지만 비행기표가 하루 미뤄진 것 외에는 타격이라 할 것이 없었다. 아이슬란드에 있는 동안 눈폭풍을 맞아 자동차 바퀴가 휙휙 돌아가고, 허벅지까지 쌓인 눈에 차가 빠져 바퀴가 헛돌고 시동이 꺼지는 별별 일은 있었어도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오로라까지 봤다. 아 물론 통장 잔고는 조금 아팠지만...


아, 생각보다 별일이 아니었구나. 항공사가 파산해 비행기가 취소되었을 땐 '이게 무슨 일인가. 나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하고 극적인 걱정을 조금 하긴 했지만, 빠르게 다른 숙소를 잡고, 야무지게 아침까지 챙겨 먹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물론 항공사가 파산하는 경험을 또다시 겪고 싶진 않지만 (꽤나 혼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니까) 내가 대비하거나 예상했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일들은 분명 또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나의 뒤통수는 얼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숨을 고르고 한 발짝 물러서 조금은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봐도 좋을 것 같다. 오히려 조금 여유로울 때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꽤 나쁘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묘한 아이슬란드, 여행 마지막까지 이렇게 교훈을 준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생겨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으며, 그 누구를 비난하려고 하지 않아도 일은 어떤 방향으로든 풀려나갈 것이라는 것.




온더락 위스키 feat. 아이슬란드 청정 빙하



아이슬란드 여행을 한 모든 이들을 모아놓고 배운 점 하나씩만 모아도 최소 해리포터 시리즈 분량은 나오지 않을까. 나만해도 벌써….

이전 19화 아무 생각 없이 올려다본 하늘엔 오로라가 있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