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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Sep 15. 2021

멋진 친구들은 취향이 확실하던데.

프라하에서 배운 취향의 중요성

여행을 다니지 않는 동안엔 계속 프라하에 머물렀었는데, 별일이 없으면 이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 베트남 카페 <TONKIN KAFE(이하 톤킨 카페)>를 가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이곳이 왜 베트남 카페인가 하면, 우선 사장 일동이 베트남계 이민자였고, 정말 맛있는 베트남식 커피를 팔았기 때문이다. 톤킨 카페는 프라하의 한인 민박에서 함께 스탭으로 일하던 H가 소개해준 곳이었는데, H가 카페 사장 일동과 친구였던 덕분에 나도 자연스레 그들과 종종 어울리게 되었다.


사장 추, 바리스타 킴, 그리고 그곳에서 가끔 팝업 스토어를 열어 타코를 만들어 파는 아담이 나와 가장 많이 어울리는 친구들이었다. 추와 킴은 체코로 가족이 다 같이 이민을 온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체코 사람이었고, 아담은 잠시 프라하에 왔다가 프라하가 좋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이 훌쩍 떠나온 장기 여행자인 한국인인 나. 내가 여행을 떠나지 않는 주말이면 우리는 거의 주말마다 톤킨 카페에 모여 맥주를 마시고, 기타를 치고, 24시간 하는 KFC에서 치킨 텐더 버킷을 사다 먹으며 놀았다.


사장 겸 바리스타를 맡고 있는 추는 미식가였는데, 프라하 곳곳의 맛집과 그 집의 대표 메뉴보다도 더 맛있는 숨겨진 메뉴를 종종 알려주곤 했다. 유난히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던 킴은 매번 새로운 한국어를 배워와 내게 서툰 한국어로 말을 걸었는데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중국계 미국인이지만 중국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아담은 알고 보니 나와 같은 대학교를 졸업한 동문이었다. 심지어 나이대도 비슷해 학교를 다녔던 기간도 겹쳤었는데, 워낙 학교가 컸고 전공도 달라서 마주친 적이 있을지는 의문이긴 하다. 어쨌든 미국에서 대학교를 나온 나는 새로 만나는 사람 중에 같은 대학교를 나온 사람을 만난 경험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 참 신기했다.




커피와 맥주, 음악을 좋아하고, 프라하를 사랑하는 이 젊은이들은 다른 점도 참 많았다. 추, 킴, 아담은 각자의 취향이 확고한 편이었다. 그들은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음식점에 가 메뉴를 시킬 때도 본인은 어떤 사이드를 추가하고 뺄 것인지 고민하지 않았고, 유럽의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 놓은 것 같은 플리마켓에 가서도 각자 사야 할 것이 확실했다.


결정 고자라는 표현이 익숙했던 나는 음식점에 가서도 메뉴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웨이터가 오는 순간까지 고민에 고민을 하다 내가 먹을 음식을 겨우 고르곤 했다. 한창 주문을 하다가 결국 끝까지 고민하던 다른 메뉴로 바꾼 적도 가끔 있었다. 오늘은 내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행복할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좋아 보이는 것을 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심사숙고하며 고른 디쉬가 생각보다 맘에 안 들면 크게 실망했다. 고민하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는데 내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반면 음식 주문 시간이 나보다 현저히 적었던 나의 친구들은 그들이 주문한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고 즐겼다.


그들과 뮌헨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마침 유럽 최대의 플리마켓이 열린다고 해 구경을 갔다. 끽해봐야 동네 오일장 같은 느낌이겠거니 했는데, 무슨 플리마켓이 남대문 시장보다 조금 더 컸다. 각자 물건들을 가져와 쫙 펼쳐놓았는데 과장을 조금 보태 유럽의 역사가 거기 있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옷, 신발, 장신구는 물론 LP판, 도자기, 장식품 등 물건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이 모여있었다. 워낙 마켓이 커 우리는 각자 구경하고 두 시간 뒤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두 시간 뒤 다시 모인 우리는 각자 사 온 것을 자랑했다. 아담은 역대 올림픽 코스터를 모으고 있었는데, 그 컬렉션에 포함될 세 개의 코스터를 기어이 찾아냈다. 평소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던 킴은 퀄리티가 좋은 중고 필름 카메라를 샀고, 추는 바리스타답게 앤틱한 커피 드리퍼를 샀다. 백화점이나 아웃렛처럼 플리마켓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쩜 딱 자기들 같은 물건들을 찾아왔는지 신기했다. 그 물건들은 마치 원래 그들의 것인 양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 정도로 그들은 본인이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본인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엘리, 너는 뭘 샀어?" 킴이 물었다. 가만 보자, 나는 장신구를 좋아하는 한국에 있는 친구 A를 위한 귀걸이, 빈티지 소품을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 B를 위한 빈티지 샷잔, 그리고…. 내가 산 것을 쭉 나열해보자니 정작 내 것은 없었다. 두 시간 동안 별의별 것을 파는 유럽 최대 규모의 플리마켓을 돌아다녔는데 나를 위한 것은 사지 못했다. 그때 처음 나는 '내 취향'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옷을 살 때는 당시 유행인 것, 다른 사람이 입으니 예뻐 보이는 것 위주로 구매했다. 그러다 보니 내 옷장엔 유행이 지나 못 입거나 막상 내게 어울리지 않아 못 입는 옷들만 한가득이었다. 식당이나 카페를 갈 때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소개하는 핫플레이스 위주로만 다녔고, 와인을 마실 때는 항상 누군가 추천해주는 와인만 마셨다. 그 많은 분야 중에서 나의 취향이 확실했던 것은 음악뿐이었다. 나름 나는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나는 주류에 휩쓸려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한때 취향 저격, 취향 존중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취향'이라는 단어가 모든 대화에 빠지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만큼 나의 일상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였는데 갑자기 '취향'이라는 이 두 글자가 굉장히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대체 무엇이 내 취향을 저격하는 거지? 나는 내 취향을 존중하긴 하는 걸까? 아니 존중하기 전에 내 취향을 알긴 아는 걸까?


취향은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 취향이 쌓이기 위해선 우선 무수한 경험을 해봐야 하는데, 일단 겪어봐야 이것이 나의 취향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겪어보고 나서야 난 이것이 좋았고 저것이 싫었다는 결론과 함께 취향이 쌓이게 된다. 기왕이면 앞으로는 내 취향에 맞게 고른 것들이 내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가 된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아껴두었던 향수를 뿌리고, 내가 좋아하는 원두로 갓 내린 커피를 마시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새로 나온 음악을 들으며 집을 나서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취향을 안다는 것은 곧 나의 감각이 어떻게 뻗어나가야 행복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의 취향은 내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든다.


마침 날씨가 바뀌어 새로운 계절의 옷을 사야 했는데, 이번엔 조금 다른 기준으로 옷을 사기로 했다. 그냥 무난하거나 지금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은 과감히 외면하고 그동안 도전해보지 않았던 옷을 시도해봤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남들의 시선은 딱히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단순히 내가 입었을 때 행복하고, 편하고, 그 옷을 입은 내 모습이 꽤 괜찮아 보이는 새 옷을 샀다. 그리고 카페에 가 나의 멋진 톤킨 친구들에게 알려줬다. 이것이 나의 취향이라고!


내 중심이 단단해지니 자연스레 취향도 쌓인다. 취향이 쌓이는 기분이 썩 좋다. 뭔가 어른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이렇게 프라하에서 갑자기 취향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줄이야. 역시 익숙하지 않은 곳에선 모든 것이 새롭고 자극이 된다. 이 맛에 여행하는 거지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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