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 인종차별 썰, 근데 이제 약간의 사이다를 곁들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8개월간의 유럽살이가 항상 꽃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흔히 그리고 쉽게 처할 수 있는 나쁜 상황은 인종차별이었는데, 인종차별도 수위가 천차만별이라 대체로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애매한 것들이 많았다. 분명히 저 사람의 태도와 언행으로 내가 기분이 나빠졌는데, 그 태도와 언행이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어 내가 기분이 나빠져도 저 사람의 잘못을 '분명하게' 따지기는 애매한 그런 것들이었다.
정의감보다 겁이 커 난처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회피하고 보는 나와 달리 나와 여행을 함께했던 당시 나의 남자 친구(현 남편)는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또렷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자와 마주치면 그 자는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지난번에 소개한 멋진 톤킨 카페 친구들과 뮌헨으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유럽에 있는 동안 시기가 안 맞아 10월에 열리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를 놓쳤었는데, 마침 4월에 옥토버페스트의 축소판인 스프링페스트가 뮌헨에 열린다고 해 다녀올 셈이었다.
스프링페스트가 열리는 곳에 도착해보니 곳곳에 약 2,000명 정도 수용 가능한 텐트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미 많은 이들이 '하이디'에 나올법한 전통 의상을 입고 텐트 안에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텐트 안에서는 축제의 꽃인 생맥주와 여러 안주들을 팔았는데, 사람들은 양손에 1L짜리 맥주잔을 하나씩 들고 라이브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떼창을 하고 춤을 추고 난리가 났었다. 그 현장을 보고 있자니 독일 사람들은 재미없다는 편견이 산산조각 났다.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들은 아주 미친 자들 같았다. 그들은 아마도 반년치의 흥을 각각 옥토버페스트와 스프링페스트에 몰빵으로 쏟아부어 약 360일 정도는 재미없이 사는 것이 아닐까. 농담이다.
어쨌든 우리도 각자의 맥주를 시키고 아는 노래가 나오면 열심히 흔들어 제끼며 한참을 놀았다. 1L짜리 맥주잔을 몇 개를 비웠는지 다들 얼큰히 취했었고, 나는 테이블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찰나였다. 하필 노래도 템포가 느린 음악으로 바뀌어 조금 쉬어가는 분위기였는데, 어려 보이는 한 독일인 남성이 우리를 향해 신난다는 듯이 "니하오!"하고 우렁차게 외치고 말았다. 우리 무리 중엔 중국인이 아무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너 방금 우리한테 니하오라고 한 거야?"라며 나의 남자 친구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 우리에게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우리는 모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독일 친구는 계속해서 "응! 여기에 너희 말고 아시아인 없는데!"하고 신나게 대답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나의 (불의를) 참지 않는 남자 친구는 그 친구를 우리 테이블로 불러 앉혔다. 그리고 나의 중국계 '미국인' 친구 아담은 자연스레 그 옆자리에 착석했다. 그렇게 그들의 인종차별 강의(?)가 시작되었다.
나와 추, 그리고 킴은 (추와 킴은 체코로 이민 온 베트남계 친구들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앞 이야기를 참고해주길 바란다.) 흥미롭다는 듯 나의 남자 친구와 아담,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니하오'를 외친 용감하고 무지한 독일 남성을 마주 보고 앉았다. 아시아인에게 왜 니하오라고 외치면 안 되는 것인지, 그것이 왜 인종차별인지, 네가 하는 짓이 얼마나 부끄럽고 멍청한 짓인지, 네가 정말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친근함으로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면 어떤 식으로 대화를 시작했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 아담과 나의 남자 친구는 그 독일인 남성과 약간 과장하여 한 시간 조금 넘게 대화를 나눴다. (대화라기보단 약간 일방적인 강의 비스무리한 그런 것이었지만.)
그 독일 남성은 아마도 만취한 상황에서 본인의 눈앞에 동양사람들이 보였고, 만취하였기에 머릿속 필터가 먹통이었으며, 본인이 어디에선가 본 또는 평소에도 행했던 동양인들에게 흔히 하는 조롱을 퍼부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평소에 동양인에게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만취가 아닌 상태에서 동양인을 어떻게 대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그가 우리에게 행한 '니하오'라는 인사 아닌 인사는 우리를 굉장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물론 '니하오'를 친근감의 표시로 건넨 인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년간 숱한 인종차별로 쌓아온 우리의 데이터가 이것은 인종차별이라는 알람을 보냈다. 아마 그의 표정이나 제스처, 말투와 목소리 톤에서 우리는 익숙하고 싶지 않지만 익숙해져 버린 그 묘한 수치심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당신의 한마디로 인해 굉장히 불쾌해졌고, 당신의 그 행동은 우리에게 정말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었다는 것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또박또박 전달했다. 처음엔 실실 웃으며 팔을 괴고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그 독일인 남성은 점점 눈빛이 또렷해졌고, 마지막엔 허리를 펴고 다리를 모아 앉으며 굉장히 정중한 자세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공손하게 사과했다. 축제를 즐기러 온 너희의 기분을 망치게 해서 미안하다며. 너희의 여행에 내가 오점을 남겨 미안하다며. 남은 여행은 부디 행복한 시간이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그와 악수를 나누며 그에게도 남은 축제를 잘 즐기고, 혹시나 다음에 또 동양인을 만난다면 오늘 우리와 나눈 이 이야기를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 순간이 내가 유럽에서 가장 동등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나는 무의식 중에 약자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고, 그들이 나를 종종 기분 나쁘게 하여도 나는 '약자'니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갈등을 피하기만 했었다. 내가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데, 왜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내가 당신 때문에 기분이 나쁜데, 왜 나는 그것을 숨겨야만 했던 걸까? 불쾌하다고 표현하기는커녕 인상도 찌푸리지 못했고, 한숨도 쉬지 않았으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당연했던 나의 지난날이 서러웠고 억울했다.
이집트 샴엘셰이크에서 머물렀던 호텔에서도 인종차별은 일어났다. 호텔 수영장에 있는 바에서 호텔 투숙객들은 위한 이벤트를 하고 있었는데, 이벤트 진행을 하던 이집트인 남성은 모든 투숙객 앞에서 나의 남자 친구에게 '니하오'와 '몽키(원숭이)', 그리고 '칭챙총'까지 3연타를 하고 말았다. 나의 남자 친구는 역시나 그 남성에게 당신의 발언으로 지금 우리의 기분이 얼마나 불쾌한지, 당신이 어떤 실수를 한 것인지 등에 대해 낱낱이 말했다. 그는 공감하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가 떠날 때 그는 우리의 뒤통수에 대고 '바이 바이 몽키~'라며 낄낄댔다. 그는 우리를 한번 더 조롱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어휴 멍청한 놈, 어쩔 수 없는 놈이네.'라며 자리를 피했고, 내 남자 친구는 이런 일을 겪고도 평소답지 않게 평온해 보였다.
다음날 아침, 내 남자 친구는 나에게 영어로 작성된 엄청나게 긴 이메일 한 통을 보여주었다. 당시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메리어트 호텔이었는데, 그는 밤새 메리어트 호텔 본사에 장문의 컴플레인 이메일을 보냈던 것이었다. 아, 이렇게 해결하는 방법도 있구나...! 또 한 번 머리가 띵했다. 뮌헨에서도 서러웠고 억울했으면서, 그 후에 방문한 이집트에서 모욕적인 일을 겪어도 '어쩔 수 없네.'라는 생각만 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토록 분명한데 왜 '나는 너 때문에 기분이 정말 나빴어!'라고 당당하게 외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남자 친구의 '잘못된 것은 또렷하게 표현하는 점'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우리가 뮌헨에서 만난 독일인은 적어도 앞으로 다른 동양인을 만났을 때 우리와 나누었던 긴 이야기를 떠올리며 '니하오'를 외치는 것을 한 번쯤은 참을 것이다. 우리에게 바이 바이 몽키를 건넸던 무례한 이집트인은 바이 바이 메리어트를 겪고 나서야 본인의 어리석은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현실을 깨달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당신 때문에 기분이 나빴어요'라고 당당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생긴 나비효과다. 물론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지만, 더러운 것에 익숙해질 필요도 없지 않나?
사실 나도 아직까지 '불편하다, 불쾌하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혹시라도 해코지를 당하면 어떡하나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무기가 없다고 판단이 되는 상황이고,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이 생겼을 경우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옆에 있을 경우엔 '당신의 말도 안 되는 언행에 저는 조금 언짢군요.'를 말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꼭 인종차별이 아니더라도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일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0번 중에 10번은 아직 자신이 없고, 정말 용기 내서 한 두 번쯤은 그래도 또렷하게 표현하고 싶다. 이러이러한 것은 잘못된 행동이고, 그로 인해 나는 기분이 나쁘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