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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짓는남자 Oct 21. 2019

수줍은 게 아니라 할 말이 없을 뿐입니다

내성적이지만 충분히 잘 살고 있습니다 #6

“아휴, 우리 00는 왜 이렇게 샌님일까.”

작은 어머니가 어릴 적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좋은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작은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시면 인사만 하고 쓱 방에 들어가 버리는 내 모습, 명절 때마다 온 가족이 우리 집에 한데 모여 거실에서 대화를 나눌 때 아무 말 않고 음식만 먹는 내 모습을 보시며 하신 말씀이니까.

‘샌님’은 얌전한 사람을 뜻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다른 의미로 쓰였다. 원래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가 나이 많은 선비를 대접하기 위해 그 성 밑에 붙여 썼다. 오늘날에는 “여자처럼 숫기가 없고 활발하지 못한 성격의 남자를 비아냥대는 말로 쓰인다.”(네이버 국어사전)

즉 작은 어머니는 나에게 숫기가 없고, 활발하지 못하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조카를 걱정하시며 하신 말씀이지만, 그리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저 말을 한 번 했으면 고맙게 들었을 텐데, 스무 살이 넘어서도 같은 말씀을 여러 번 하셨으니 좋게 들릴 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내향인을 보며 흔히 하는 오해가 있다. ‘수줍음이 많아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이 없는 내향인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만도 하다. 다른 사람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데 소리 없이 웃기만 할 뿐, 아무 말하지 않는 내향인의 모습을 보면 수줍어서 그런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말을 하라고 해도 말하지 않는 내향인을 보면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수줍음이 많아서 자신감이 없는 건가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다.

내향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오해’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오해가 맞기 때문이다. 두 가지 면에서 말이다.

내향인이라고 해서 전부 수줍음 많은 게 아니다. 내향인 중에 수줍음 많은 사람이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내향인이 수줍음 많은 게 아니다. 또한 기질 특성상 외향인보다 내향인이 수줍음을 더 많이 탈 수는 있다. 따라서 수줍음 많은 사람이 외향인보다 내향인 중에 더 많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내향인이 수줍음이 많다고 볼 수는 없다. 내향인 중에는 수줍음이 적거나 없는 사람도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니까.

또 다른 면에서 왜 오해냐면, 내향인은 수줍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향인이 사람들 사이에서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맞장구만 치는 이유는 수줍어서 그런 게 아니다. 단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가장 큰 이유다!

수줍음 많은 내향인이라면 수줍어서 말을 못 하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든 적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다. 할 말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한다는 말인가.




내향인은 외향인과 다르다. 대화 머리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내향인은 대화 방식이 단순하다. 할 말이 있으면 한다. 그리고 할 말이 없으면 가만히 있는다. 아무 말 잔치를 하지 않는다. 외향인처럼 할 말도 없는데 굳이 아무 말이나 생각해서 마구잡이로 투척하지 않는다. 그건 내향인 스타일이 아니다. 할 말이 없으면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게 내향인 스타일이다.

내향인은 할 말도 없는데 억지로 말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억지로 말하려면, 할 말을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두뇌를 회전시켜야 한다. 외향인은 그 과정이 신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내향인은 그렇지 않다. 쓸데없이 머리를 머리면 피곤하다. 게다가 음료수 자판기처럼 두뇌 회전 버튼을 누른다고 해서 원하는 말이 한 번에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다. 말이 출력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렵사리 할 말을 떠올리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 엔터키를 누르려던 순간, 엔터가 아니라 삭제키를 눌러야 한다. 사람들은 애초에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대화에 끼어들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런 상황이 전개될 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으니, 내향인은 리액션만 펼친다. 이런 모습, 아무 말하지 않는 모습에 사람들은 내향인이 수줍음이 많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오해는 오해를 낳는 법. 내향인은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사람들은 수줍음이 많은 거라고 계속 오해하게 된다. 말을 하라고 발언권을 주어도 그저 웃고만 있으니 오해는 의혹이 되고, 의혹은 확신이 되어 ‘내향인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는 등식이 사람들 머리에 깊게 박혀 버린다.




가족들이 모여도 워낙 말을 하지 않으니 나는 수줍음 많은 조카이자, 형, 오빠로 이미지가 굳어 버렸지만, 결혼한 후 아내 덕분에 그 이미지를 조금씩 탈피했다.

결혼하기 전에야 내 방에 들어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결혼한 후 아내만 거실에 두고 방에 들어가 버릴 수는 없었다. 아내가 거실에 있으면 나도 함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내 마음이 편하니까.


가족들과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내 얘기가 나오기 마련이고, 나도 말을 해야 한다. 그때마다 말을 안 할 수가 없으니 조금씩 말했다. 내가 조금씩 말하기 시작하니 사촌 동생이 이런 말까지 했다.

“커서 오빠랑 대화한 거 처음이야.”

사실이다. 십수 년 만에 동생들과 처음 대화를 나눴다. 동생들이 올 때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방에 들어갔으니 그럴 수밖에.

어쨌든 나는 수줍음이 있는 내향인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수줍어서 말을 못 하지는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은 한다. 하지 않으면 잠 못 자겠다 싶은 말은 어떻게든 한다. 그런데 꼭 해야만 하는 말은 웬만해서는 생기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다.




내향인이 사람들 사이에서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맞장구만 치는 이유는 수줍어서 그런 게 아니다. 단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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