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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짓는남자 Oct 29. 2019

생각 좀 하고 대답하겠습니다

내성적이지만 충분히 잘 살고 있습니다 #8

“0 과장, 지시한 일은 다 처리했나?”
“네. 다 했습니다.”
“그럼 자료 좀 가져와 봐.”
(잠시 후)
“근데 이 부분은 왜 이런가?”
“어, 그건 말이죠...”(동공이 좌우로 심하게 요동 친다.)

내향인이라면 이런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상대방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 말이다. 상대가 질문을 하고 빤히 쳐다보지만, 내향인인 우리는 눈만 껌뻑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우리 모습에 상대는 당황한다. 대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답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상대를 쳐다보니까. 우리는 뭐라고 말하려고 하지만 이내 입을 다문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떠돌지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하고 싶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상대는 “어서 대답해줘”라는 눈빛을 보내며 재촉하지만, 우리는 계속 어버버 한다. 갑자기 벙어리가 된 듯하다.

내향인이 벙어리가 된 이유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당황해서도 아니다. 머릿속에 할 말은 있지만, 정리가 안 되서다. 대답에 필요한 단어가 머릿속에 마련되어 있지만, 점점이 흩어져 있는 단어 조합이 얼른 안 되기 때문이다. 생각이 문장으로 얼른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대답에 필요한 정보가 머릿속에 있지만 대답하는 데 사용할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을 때 상황과 비슷하다.

외국인이 “익스큐즈 미” 하며 우리에게 말을 걸고 뭐라 물었다고 치자. 질문 내용은 이해했고, 어떤 단어를 사용해서 답해야 할지까지 떠올랐다. 하지만 뭐라 답해야 할지 머리를 아무리 회전시켜도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무지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 내향인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와 비슷하다.

이런 내향인의 모습을 보며 외향인은 오해한다. 직장에서는 업무 능력 부족이나 무능한 직원으로, 일상에서는 거짓말쟁이나 말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우리도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도 얼른 대답하고 싶다. 할 말이 있긴 하지만 출력이 안 되니 답답하다. 유려한 대답은 둘째 치고, 일단 대답에 필요한 단어만이라도 던지고 싶다. 외향인이라면 완벽한 형태의 문장이 아니라도 대답했을 것이다. 어순이 맞지 않더라도 대충 주어와 서술어만 맞춰서 대답했을 것이다. 영어를 잘 못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필요한 단어만 대충 조합해서 외국 사람에게 의사 전달을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내향인은 그러지 못한다. 내향인은 문장력을 중요시한다. 필요한 단어만 툭 던질 수 없다. 최대한 어색한 곳이 없게 다듬어야 한다. 다듬고 다듬어서 대답해야 한다. 문장이 조금이라도 어색하면 안 된다. 절대 그렇게 대답할 수 없다. 그렇게 대답하기 싫다. 왜냐, 그러면 말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비칠까 봐서다.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보일까 봐 완벽한 문장으로 대답해야 한다. 정말 그렇게 대답하려고 해서 도리어 모자란 사람으로 비치는 데도 말이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안 된다. 완벽한 문장으로 대답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도 대충 대답하면 성에 안 찬다.




내향인인 나도 그런 일을 회사에서도 겪고, 지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겪는다.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사에서는 이렇게 대답하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 물론 0.1초 내로 상황을 판단하고, 이렇게 대답해도 될 때만 말이다.

지인들과 대화하는 중이라면 대충 얼버무려도 된다. 굳이 완벽한 문장을 만들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향인의 단어 검색 버퍼링’으로 인해 그러기 힘들다. 그리고 ‘내향인의 완벽주의’로 인해 그런 대답을 하기 싫다. 괜히 자존심 상한다. 자기만족을 위해, 완벽한 문장으로 대답하고 싶다. 그러다 타이밍을 놓쳐서 대답하지 못하거나 아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결국 어딘가 모자란 사람으로 비치는 데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나도 빨리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모든 질문에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그럴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빨리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을 해볼 수도 없다. 다양한 상황을 설정하고 대본을 만들어서, 연극배우처럼 계속 연습해 본다고 한들 그리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이건 연습의 문제가 아니라 성향의 문제니까. 물론 머리를 빨리 굴리고, 말을 내던지는 연습을 하고 또 하면 출력 속도가 조금은 빨라지겠지. 하지만 연습으로 나아지더라도 굳이 연습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연습하는 게 피곤하니까.




내향인은 ‘마음속 수다쟁이’다. 내향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입으로 말하기보다 머릿속에서 말하길 즐겨한다. 입으로 말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단어 검색이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 어렵다기보다 말하는데 필요한 단어를 고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리고 그 단어를 문장으로 만드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내향인은 문장을 만들었어도 두서없으면 내뱉지 않는다. 상대방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명려한 문장을 만들었을 때에만 말을 한다.

외향인은 내향인의 이런 내막을 모르니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둔한 사람이니,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니 하고 말이다. 그런 게 아닌데, 머릿속은 정말 바쁘게 돌아가는데 말이다. 내향인에 대한 오해가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풀리길.




내향인은 문장력을 중요시한다. 필요한 단어만 툭 던질 수 없다. 최대한 어색한 곳이 없게 다듬어야 한다. 다듬고 다듬어서 대답해야 한다. 문장이 조금이라도 어색하면 안 된다. 절대 그렇게 대답할 수 없다. 그렇게 대답하기 싫다. 왜냐, 그러면 말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비칠까 봐서다.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보일까 봐 완벽한 문장으로 대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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