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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끝없는 추락이 의미하는 바

무기력한 흐름과 그 후의 현상

님만해민, 치앙마이, 태국




몸부림칠수록 슬럼프는 거세진다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연일 갈팡질팡하고 있는 상태였다. 생활환경 만족스럽겠다, 주변에 볼거리 잔뜩이겠다, 쾌청한 날씨 계속되겠다, 근교에 풍요로운 자연 기다리고 있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 할 만한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생활이 날마다 흐느적거리길 반복했다. 심각한 상황이 도래했다는 사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자각했다. 일상이 어찌나 불안정한지 이 흐름을 그대로 뒀다가는 미래가 박살 나겠다 싶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영문도 모른 채 무기력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기분이 아득하고 또 아득했다. 


무기력은 일상을 끊임없이 파괴해 나갔다. 부지런한 하루를 자주 다짐했지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쓸 데 없는 데에 시간을 소모하는 현상도 늘었다.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딴짓으로 빠졌다. 예컨대,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버 공간을 표류하며 자극적인 컨텐츠의 유혹에 휘말려 들어가길 반복했다. 연예 기사, 스포츠 동영상, 잔기교로 도배된 자기 계발 관련 글, 가십성 정보를 담은 영상물에 이르기까지 영양가 없는 컨텐츠를 계속해서 소비했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컨텐츠들이 기다렸다는 듯 내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머리만 식히고 빠져나와야겠다 생각했으나 다음 컨텐츠를 자동으로 재생하는 시스템과 연관 컨텐츠 목록의 자극적인 제목들이 탈출을 방해했다. 소모적인 세계에 휩쓸렸음을 알면서도 저항 의지를 바닥에 눕혀 둔 채 욕망의 물길을 따라 흘렀다. 고도의 지능으로 기획된 디지털 시스템의 유혹을 떨쳐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블랙홀에 빠져든 듯 한참을 몰입했다. 자극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하루가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갔다. 무기력의 범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나날들. 갈지자로 걷는 걸음이 어지러웠다.  


안 되겠다 싶어서 하루를 시작하는 시점을 당기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의 시작이 늦으면 하루가 꼬인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실감하고 있었다. 단단히 마음을 다져 먹은 어느 날, 산뜻한 하루를 기대하며 여느 때보다 이른 시각에 숙소를 나섰다. 그런데 스쿠터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수동 모드로 전환해 시동을 걸었으나 역시 아무 효과가 없었다. 가장 무더운 계절로 접어든 치앙마이의 38도짜리 뙤약볕을 받으며 스쿠터샵을 향해 한참 동안 걸어야 했다.  


신속한 해결을 기대하며 스쿠터샵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사태는 난항을 거듭했다. 스쿠터샵 직원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그의 스쿠터에 실려 내 스쿠터가 주차된 숙소로 복귀할 때까지는 흐름이 괜찮았다. 그러나 선의에 찬 출장 직원의 마음과는 달리 스쿠터는 기동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시동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자 출장 직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보다 더 능숙한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새로운 출장 직원이 다시금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얼마 후 새로운 직원이 등장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러나 또다시 실패의 향연. 안 되겠다 싶었는지 두 번째 출장 직원이 첫 번째 출장 직원에게 나를 싣고 스쿠터샵으로 먼저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첫 번째 직원의 스쿠터에 실려 돌아온 스쿠터샵에서 같은 기종으로 스쿠터를 교체함으로써 상황을 일단락하기는 했으나 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몇 시간이 훌쩍 지난 상태였다. 생활을 바로 잡겠다고 마음 먹고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으나 생산적인 활동은 전혀 하지 못한 채로 늦은 오후를 맞이해야 했다. 모처럼 다잡은 의지가 다시금 꺾였다. 


생활이 불안정하게 흘러가는 양상을 매일같이 확인하다 보니 불안감이 증폭했다. 그럴수록 하루의 시작도 늦어지길 반복했다. 당연히 협업 공간에 도착하는 시간도 늦어졌다. 작업을 시작할 마음이 선뜻 생기지 않아 인터넷으로 잡다한 컨텐츠를 소비하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고는 아차 하는 마음으로 부랴부랴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미 하루가 반토막이 난 상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잘해보자 생각하며 작업을 했으나 할 일을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채로 하루를 마감해야 했다.  


시커먼 어둠이 시계침 소리를 진동시키며 다가올수록 불안은 더 크게 요동쳤다. 성과가 부실한 채 귀가하면 다음날 더 큰 공황을 겪겠다는 생각에 조금만이라도 작업을 더 하자며 책상에 붙어 있다 보니 대부분의 공간 이용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까지 자리에 머무는 날이 늘어났다.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협업 공간을 지키는 최종 3인 중 하나가 되었다. 능률이 급락했다는 반증이었다. 


며칠 쉬면서 상황을 재정비하는 편이 현명하겠다는 생각도 물론 했다. 하지만 불안의 힘이 도약의 의지보다 강했다. 마음만 그럴 뿐 몸은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되풀이했다. 일상의 틈새를 활용해 소심하게나마 재정비를 시도하려다 보면 오히려 시간에 더 쫓기는 기분만 들 뿐이었다. 자동기술법 글쓰기에 진지한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적는 날이 늘었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변화의 움직임은 만들어 내지 못했다. 자잘한 활동이나 이따금 해 볼 뿐이었다. 낙천적인 성격임에도 매일같이 자책감에 시달릴 정도였으니 상태가 극단적으로 바닥을 치고 있는 셈이었다. 


사태의 발단은 쏭크란 축제였다. 축제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는 심신의 상태가 좋았고, 내면에도 희망적인 기운이 잔뜩 감돌았다. 그런데 축제가 끝난 직후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공복감도 좀 느꼈다. 그러고서 얼마 후부터 내면세계가 닫힌 듯한 기분을 반복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자동기술법 글쓰기에도 그러한 자각을 여러 차례 적어 넣었다. 심신이 활짝 열려 있던 과거의 몇몇 시기와 비교하자면 거의 반대나 다름없는 양상이었기에 큰 문제에 봉착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나 자신을 활짝 열려고 떠난 여행길에서 그 반대의 상황을 마주하자니 여간 아찔하지 않았다. 이제껏 여행을 하면서 이 정도까지 내면이 닫힌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어서 더더욱 난감했다.  


이후에도 추락은 계속되었다. 기간이 길어지면서 추락의 낙차도 그만큼 커졌다. 흔들렸던 시기가 이미 여러 번 있었던 이번 여행이었지만 지금에 비하자면 모두 장난이었다. 극강의 추락을 무방비 상태로 경험하는 고통이 상당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활은 끝없이 방만해졌고, 의욕은 끝없이 하락했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날마다 했다. 괴롭고 또 괴로웠다. 난생처음 직면해 보는 상황이기에 마음이 더더욱 가파르게 몰락했다.




# 성장 직전에 벌어지는 퇴행 현상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시기의 추락은 성장 직전에 벌어지는 퇴행 현상이었다. 내면의 체질이 개선되는 과정에서 종종 벌어지는 현상으로, 새로운 요구가 기존의 습성과 갈등을 벌이면서 약간의 퇴행이 발생하게 된다. 항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몸속의 구성체들 간에 다툼이 벌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성장을 유도할 만한 사전 작용이 선행된 경우에 한해 찾아온다. 현상에는 언제나 인과율이 따르는 법이니까 말이다. 방만한 생활 태도나 내면의 균형 상실로 인한 슬럼프를 성장의 전조 현상과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겠다. 이 여행에서 슬럼프를 겪은 건 이때만이 아니다. 과거의 장기 여행들에 비해 유난스럽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는데 돌아보면 저조한 상태에 돌입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선행 작용이 있었다. 내 안의 무언가와 씨름을 하거나 이제껏 해보지 않은 낯선 시도를 했다. 모두가 나 자신을 바로잡거나 발전시키기 위한 것들이었다. 나쁜 습관을 검출해 그것을 교정하려고 노력한다거나 새로이 찾아든 화두에 대응해 내면의 상태에 변화를 꾀하려 한 시도가 배후에 있었다. 연재에 언급하지 않은 경미한 침체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그런 줄 몰랐기에 속수무책으로 상황에 휘말렸는데 원리를 알고 있었다면 좀 더 현명하게 대응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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