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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조건 없이 삶을 긍정하기로 했다

아침의 발코니로 날아든 어떤 깨달음

도이 수텝, 치앙마이, 태국




삶의 의미는 나아가는 데 있는 것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무기력한 일상이 속절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른 날처럼 만사가 귀찮았지만 그렇다고 무기력의 농간에 마냥 휩쓸릴 수만도 없기에 우선은 협업 공간으로 나가볼 참이었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협업 공간의 앞마당에서 커피로 마음을 고른 후 사진을 촬영하러 돌아다니면 어떨까 싶었다.  


거리는 무더웠다. 40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공기가 숨을 턱턱 조여왔다. 스쿠터를 달리는 내내 거리 풍경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길 반복했다. 협업 공간도 후텁지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무 그늘 아래로도 숨 막히는 열기가 어김없이 끼쳐왔다. 커피를 홀짝이는 마음이 점점 왜소해졌다. 사진 촬영을 나설까 말까를 두고 얼마간의 고민이 이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망설일 일도 아니었는데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책이나 좀 읽다가 더위가 누그러지면 촬영을 나서기로 계획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패착이었다. 잠시 숨이나 돌리자고 빈백 위에 몸을 눕혔는데 그게 낮잠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짧은 독서와 어영부영거린 시간을 합쳐 총 세 시간을 허망하게 흘려보냈다. 멍한 기분으로 올려다 본 천정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상황을 곱씹고 있는데 문득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주 5일제 여행의 휴일이었다. 숙소에서 낮잠을 실컷 잔 후 몸을 일으켰는데 허무감이 침대 위에서 술렁였다. 스스로 지정한 공식 휴일이니 푹 쉬어도 괜찮았지만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점까지 침대에 퍼져 있을 필요는 없었다. 피로하지도 않으면서 잠으로 소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울한데 곧이어 낭패감도 잔뜩 밀려들었다. 무언가 크게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이 침대를 뒤덮었다.  


원래는 오전에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었다. 충분히 수면을 취한 터라 몸도 가벼웠다. 한동안 자연을 누리지 못했기에 기상 후에는 도이 수텝까지 스쿠터 라이딩을 다시 한번 하기로 계획을 세워 두었다. 이후에는 수영, 영화 감상을 차례로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만사가 귀찮아져서 침대에서 퍼져 있다가 다시 낮잠을 자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전에 잠에서 깼을 때 일과를 시작했으면 도이 수탭도 다녀오고 수영도 할 수 있었다. 낮잠에서 부랴부랴 깨어나 허무감에 휩싸이는 대신 기분 좋게 영화를 감상하고 있어야 했다.


그날의 낭패감을 불쾌한 기분으로 더듬고 있다가 이번에는 기억이 그날로부터 3일 전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그날에도 아침에 잠을 깨면서 공허감을 느꼈다. 며칠간 비슷한 경험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다른 날보다 공허감의 수준이 훨씬 더 강렬했다. 알 수 없는 묘한 느낌 하나도 내 안 어딘가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발코니로 나가 아침 공기를 마시며 머릿속에 떠도는 인상들을 역추적했다. 그러던 중 기시감 비슷한 감정이 올라왔다. 문득 니체가 생각났다. 비로소 감정의 실체를 이해했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를 감각한 것이었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로 읊조렸다. "아, 이게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로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삶이란 좋은 일이 많아야만 긍정하고, 나쁜 일이 많으면 부정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긍정해야 하는 것이 삶이었다. 인생은 그냥 사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빠짐없이 던져진 숙명이면서 태초로부터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상태로 끝없이 이어져 온 시공간. 그게 삶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허무감과 카타르시스가 동시에 온몸을 내달렸다. 곧이어 극도의 평온감이 심신을 에워쌌다. 공허에 휩싸여 있던 마음이 단숨에 여유를 되찾았다. 이례적인 안정감이 발코니 주변을 뒤덮었다. 


그런데 불과 3일 만에 낮잠 한번 잤다고 허무감에 허우적거렸다. 인생살이의 중요한 해답을 찾았다며 앞으로는 삶을 무조건 긍정하겠다고 다짐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다시 순간에 일희일비하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이 즈음까지 무력한 나날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망각의 위력을 다시금 실감했다. 


무기력이 활개를 칠 때는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허무해했다가 기력이 감돌기 시작하면 무기력의 감정들은 금세 희미해졌다. 반대로 무기력에 빠지게 되면 정력적이었던 순간의 상태를 기억해 내기가 어려웠다. 불과 3일 만에도 극과 극의 상태를 오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분이 아찔했다. 한 번 깨달았다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깨달음을 상기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삶은 금세 흐트러진다는 교훈을 머릿속에 다시금 새겨 넣으며 빈백 위에 널브러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카메라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나서는 마음이 한결 평온했다.  


그날 이후부터 다시 삶을 긍정하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일이 없어도 그냥 긍정했다. 그러자 일상의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원인도 없는데 그냥 나아졌다. 속도는 느렸지만 어쨌든 조금씩 나아졌다. 그러다가 휘청거리는 일이 생기면 다시 삶을 긍정했다. 그러면 다시 생활에 안정감이 감돌았다. 불안하면서 또한 안정적이었다.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단한 일이 없는 날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그냥 긍정적이었다. 작업에서도 일정한 성과가 다시금 누적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공허함이 밀려왔다. 발코니에 서서 허공을 응시하는 내 앞에는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 아무런 축복의 사건이 예정돼 있지 않은 새로운 24시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텅 빈 하루가 놓여 있었다. 매일 아침 내 앞으로 놓이는 하얀 도화지를 어떻게든 다시 채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주도해야 하는 존재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 내일도 그럴 것이고, 모레도 그럴 것이며, 일 년 후의 오늘도 그럴 것이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라니 마음에 들든, 마음에 들지 않든 끝없이 찾아드는 새날들을 숙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할 터였다. 


삶을 긍정할수록 몸을 분주히 움직이는 날들은 계속 늘어났다. 하루를 씩씩하게 보내고 나면 언제 허무감에 시달렸냐는 듯 활력이 넘실댔다. 그 와중에도 권태로운 날들은 찾아왔다. 어떤 날은 두 가지 상태가 함께 찾아들었다. 낮에는 무기력에 휩싸여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다가 늦은 오후부터 분주하게 몸을 놀렸다. 반나절을 날린 건 아쉽지만 그래도 남은 반나절이 있지 않으냐고 생각하며 나머지 순간들을 바지런히 살았다. 


이따금 폭우라도 쏟아지면 외출하기 불편하게 웬 비냐고 불평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쾌재를 부르며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멨다. 생각해 보니 비 오는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거세게 퍼붓는 비를 뚫고 다니며 사진을 찍다 보면 활력이 다시 꿈틀거렸다. 무기력과 기력이 세를 팽팽히 겨루는 나날들. 매일 흔들렸지만 그래도 존재하려고 날마다 발버둥쳤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떤 게 잘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아가고 볼 일이었다.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는 날에도 그냥 나아갔다.




니체 사상의 진수, 영원회귀

‘영원회귀’는 니체의 핵심 사상 중 하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똑같은 것이 원의 형상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게 생이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전생에서 벌어진 일들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순서로 되풀이된다는 얘기다. 상황만 놓고 보면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니체가 이 사상을 설파한 이유는 삶의 긍정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같은 일이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어떤 자세로 그 삶을 살아낼 것인가? 어떤 대답을 할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자에게는 공허한 삶이, 긍정의 태도를 취하는 자에게는 의미 있는 삶이 도래할 것이다. 니체의 사상을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사상이 이론적으로 타당한지 여부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사유와 결단을 이끌어 내는 데 사상의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깊은 슬럼프를 마무리하고 다시 상승 기류를 타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 머리로의 이해가 아니라 몸과 정신의 동시 감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당히 강렬한 경험이었음에도 그때의 각성을 까먹고 살 때가 많다. 그러다가 생활이 흔들리면 한 번씩 끄집어 내 반추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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