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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귀국 직후 맞이한 환각의 순간들

귀국은 때때로 본격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월정리, 제주




행위의 시작점을 주목하라


여행을 마치면 서울로 바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홍대에 잠시 들러 커피나 한 잔 하면서 두어 시간쯤 여행의 여운을 음미하다가 귀가하려고 했다. 그런데 항공권을 검색해 보니 서울행보다 제주행이 훨씬 저렴했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여행의 여운도 곱씹을 겸 그리웠던 풍경도 만날 겸 제주에 다녀오곤 했기에 이중으로 비용 들일 것 없이 제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반년 간의 여정을 압축한 전시회로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앞선 여행들 만큼의 활기는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쏭크란 축제를 기점으로 극도의 슬럼프가 시작된 후 갈팡질팡하길 반복하며 여러 주를 보냈다. 조건 없이 삶을 긍정하기로 마음을 먹고, 전시회도 개최하면서 회복세에 접어들었지만 충분한 균형을 되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예기치 못했던 슬럼프에 한 달 여의 전시회 준비가 더해지면서 사진과 글 작업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그동안의 여행을 통틀어 가장 부실한 성과. 얼마간의 실패감을 안고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시 찾아온 제주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입국장을 빠져나오자 따사로운 햇살이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여행자들의 얼굴에서도 화사한 웃음이 유채꽃처럼 피어났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수십 차례의 방문으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풍경임에도 시야로 들어오는 모든 풍경들이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다분히 환각적인 느낌. 귀국을 기해 내면이 크게 자극된 듯했다. 


한참 동안 행복감에 취해 있다가 제주에 사는 반가운 친구들 몇몇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한 친구의 생일을 기념해 저녁에 모인다기에 그리로 합류하기로 했다. 한참을 달린 동일주 버스가 하도리의 한갓진 길목에서 바퀴를 멈췄다. 곧이어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친구들이 직접 만든 잡채와 불고기가 생일상 위에 올랐다. 간만의 한국 밥상. 고작 맥주 두 캔에 취기가 올랐다.  


이후에도 친구들의 환영이 제주 곳곳에서 잇따랐다. 마침 같은 시기에 제주로 여행을 온다는 친구의 소식이 들리기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우르르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오랜만의 과한 음주 후 2차로 찾아간 곳은 노래방이었다. 반년 간의 고독 속에서 고생스러운 나날들을 묵묵히 지나온 직후라 작심하고 놀았다. 내면에서 표현 의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노래방에서 펄펄 날뛰는 내 모습이 한 마리 야생마 같았다. 


이후 며칠간은 올레길을 걸었다. 수년 전 올레 트레킹을 시작했는데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2~3개 코스를 꾸준히 걷다 보니 어느새 최종 도착점이자 최초 시작점에 가까워졌다. 완주까지 3개 코스만 남은 상황. 고맙게도 날씨는 못 견딜 정도로 화창했다. 한동안 날씨가 궂었다가 내가 제주에 도착한 날을 시작으로 맑은 날씨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올레 트레킹의 첫째 날. 버스를 타고 코스의 시작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내 바로 앞자리에 분홍색 니트를 입은 여성이 앉았다. 차창의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향기를 연신 내 코끝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샴푸인지, 향수인지, 아니면 화장품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주 깨끗하고 신선한 향기가 계속 코끝을 간질였다. 가만히 앉아 있던 그녀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정돈하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햇살에 비친 손등이 눈부시게 고왔다. 가지런히 뻗은 손가락은 또 얼마나 예쁘던지 갑자기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다. 감각이 전에 없던 수준으로 자극되면서 미시적인 풍경이 시선에 포착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올레길은 시종일관 아름다웠다. 며칠간 내렸다는 비가 대기를 정화시켰는지 발목 옆으로 스치는 바다의 빛깔도 역대급으로 근사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길목 곳곳에서 만났다. 풍광은 날이 흐를수록 더 근사해졌다. 이미 지나쳐 온 바다의 자태도 충분히 황홀했으나 그보다 더 고혹적인 바다가 나를 기다렸다. 빛깔이 얼마나 맑고 곱던지 발걸음을 멈추길 반복해야 했다. 해변마다 한참을 머물며 바다가 선사하는 황홀에 취했다. 절정으로 치달은 봄의 수려한 정취 때문인지 바닷가마다 형형색색의 인파가 모여 순간을 탐닉했다. 셀카 삼매경에 빠진 연인들, 친구지간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무리들, 수학여행길 위에서 제주의 봄을 만끽하는 학생들, 화목한 웃음이 피어나는 가족 여행객 등 많은 이들이 제주 바다의 낭만을 만끽했다. 다들 행복해 보여서 그 모습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컸다. 


전체 구간의 최종 도착점이자 최초 시작점에 이르는 마지막 코스는 서귀포에 사는 친구와 함께 걸었다. 내가 내려왔다는 소식에 그가 서귀포에서부터 차를 몰고 달려 나왔다. 우리의 발걸음이 지미봉 꼭대기에 닿을 무렵, 안 그래도 화창했던 날씨가 절정에 달했다.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동쪽 해변 전역으로 날씨와 풍광이 합일하는 장면이 탄식을 불러일으켰다. 종착점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경.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여행을 드디어 마무리했다. 국내 여행 중 집중력과 지구력을 최대로 발휘한 올레 트레킹이었다. 의미 있는 순간이다 싶었지만 격한 감정은 밀려오지 않았다. 차분하고 평온한 상태로 완주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후에는 그의 차에 실려 서귀포로 넘어갔다. 남은 날을 그의 집에서 머무르며 제주에서 가장 따뜻하다는 서귀포의 봄을 누렸다. 그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낮 시간에는 동네를 산책했다. 올레 시장을 거쳐 이중섭 거리를 지나 자구리 해안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자주 거닐었다. 그가 알려 준 비밀 장소에서 해가 지는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음악도 들었다. 어느 날엔가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옥상 카페에서 돌고래떼를 목격하기도 했다. 여러 마리가 번갈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나로서는 국내에서 처음 만나는 돌고래였다.


사실 앞선 제주 여행에서 제주와의 인연이 끝난 느낌을 받았다. 제주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비슷비슷하게 반복되는 여행 패턴도 싫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동안 제주와 연애를 해 온 듯했다. 한 장소를 이렇게까지 좋아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첫사랑에 버금가는 애착으로 제주를 계속 드나들었다. 서울로 복귀하는 비행기에서 저만치 멀어져 가는 첫사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이 애달팠다. 그런데 반년 간의 고독 여행을 마치고 제주를 유랑하는 사이 다시금 제주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감정이 전과 달랐다. 좀 더 깊고 묵직해진 느낌이랄까. 불 같았던 첫사랑의 뒤안길에서 성숙한 사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주에 있는 동안에도 자동기술법 글쓰기를 빠뜨리지 않고 했다. 여행 내내 사용했던 자동기술법 글쓰기 파일의 첫 쪽을 채운 곳도 제주였다. 시원한 통유리가 인상적이었던 서쪽 바다의 분위기 좋은 카페였다. 돌아보니 그날도 돌고래가 출몰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점원이 돌고래가 튀어올랐다는 사실을 들뜬 목소리로 동료 점원에게 전했었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돌고래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럼에도 귓가로 실려온 점원의 목소리는 듣기에 좋았다. 따져 보니 약 1년 하고도 한 달 전이었다. 중간에 긴 휴지기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때 시작한 자동기술법 글쓰기를 지금까지 이어왔다. 


제주 여행을 마지막으로 이번 여행의 자동기술법 글쓰기를 매듭짓게 될 것이었다. 제주에서 시작한 글쓰기를 제주에서 마무리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길었던 여행의 마지막 정류장인 열흘 간의 제주 여행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반년 동안의 대장정도 그 끝을 향해 함께 치달았다.




# 귀국과 동시에 찾아온 현상에 대하여

여행은 여행자의 내면에 커다란 활력을 채워준다. 그 힘으로 귀국 후의 일상을 얼마간 끌고 나갈 수 있다. 나 역시 그러한 상황을 반복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귀국 후에 벌어지는 양상이 과거와 많이 달랐다. 이전의 여행들에서는 변화가 여행 속에서의 현상으로 그칠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활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상에서까지 눈에 띄는 변화가 이어졌다. 여정 속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를 경험했지만 귀국 후에 더 큰 변화를 경험했다. 그 시작은 제주였다. 수십 번을 여행한 제주지만 전과는 다른 감각으로 열흘을 보냈다. 눈 앞의 장면들이 정확히 시야에 들어오면서도 감각적으로는 환각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내면 세계가 빠른 속도로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영성이 충만해진 상태라 할 수 있겠다. 이 정도 수준까지 경험해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나로서도 얼떨떨했는데 어쨌거나 지난 반 년 간 무의식 속에 축적된 것들이 귀국을 기점으로 발화한 결과였다. 귀국이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한 셈이다. 이번 여행에서 무의식의 자극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동기술법 글쓰기의 시작점이 제주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겠다.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던 현상들이 상징적 지점을 기다려 발화하지 않았나 싶다. 큰 변화를 기대하며 여행을 계획하는 이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례였으면 한다.



여행 후기

https://brunch.co.kr/@youngjincha/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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