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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일상을 새로이 변주하는 나날들

새로운 시선으로 생활에 탄력을 불어넣어라

님만해민, 치앙마이, 태국




일상의 쇄신을 원한다면 내면을 흔들어라


해외여행을 시작한 지 10년 차쯤이 되었을 무렵, 여행 정보와 노하우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때는 눈에 불을 켜고 여행 노하우를 수집하려 했고, 여행 정보를 떠들어 대는 일에도 광분했는데 그러한 행위가 어째 시시하게 느껴졌다. 남들보다 몇 번 더 여행해 봤다는 이유로 과대평가받는 상황에도 지쳐가고 있었다. 여행의 환상이 깨지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그 뒤에 숨어 있던 현실에 직면해 이래저래 당황해하던 시절이었다. 나르시시즘으로 한없이 흩날리던 계절을 지나쳐서 보니 여행은 몇 번의 경험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정의 내릴 수도 없는 깊고 거대한 복잡계였다. 여행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국면이 늘어나면서 결국 관심은 여행 지식과 노하우에서 여행 자체로 옮겨갔다. 


돌아보면 여행 지식과 노하우는 가변적인 도구에 불과했다. 먼젓번의 방문 경험을 떠올리며 다시 찾아간 곳에서 과거에 취득한 정보나 노하우가 쓸모 없어진 상황이 그동안 비일비재했다. 어제까지는 만인에게 통한 정보라고 해도 상황이나 환경이 바뀌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지는 것이다. 지식과 지혜는 그 성격이 엄연히 달랐다. 정보나 노하우를 암기하는 데 공들일 필요 없이 필요할 때 다시 정보를 취득하는 쪽으로 여행의 관점을 바꿨다.  


그러나 사소한 변화 하나로 여행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여행 자체에 대한 고민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여행인가? 여행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자가 스스로를 여행자라고 칭할 수 있는가? 여행을 하면서 마주하는 세부 국면들에 대해서도 물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둘씩 찾아오는 깨달음을 여행에 접목해 나갔다. 이번 여행에서도 그런 시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깨달음 하나가 또 찾아왔다. 


어느 주말,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섰는데 날마다 지나다니던 길목에서 갑자기 내가 치앙마이에 와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했다. 뭔가 멍한 기분이어서 왜 한국 밖으로 나서게 되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나치게 단조로운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경험을 확장하겠다고 먼 곳까지 와서도 아무런 시도 없이 지낸 날들이 길었다. 일상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둔 채 꽤 긴 시간 동안 같은 일과만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독'을 앞세워 여행하다 보니 스스로를 지나치게 격리시킨 듯했다. 닫힌 세계에 바람이 통할 리 없었다. 바깥세상과 호응해야 조금씩이라도 겪고 배우는 게 있을 텐데 나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그 안에 웅크린 채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 듯했다. 


치앙마이에서 지낸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정신세계를 강타하는 일들로 내적인 오르내림이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내면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이라 정신과 감정이 복잡할 뿐 생활은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딱 그 정도였다. 인식이 발돋움을 하고 있다거나 감각이 확장되는 느낌은 없었다.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현재의 답보 상태에 어떻게 변화를 꾀할 것인가? 체류지의 변경 외에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무엇인가? 앞으로 한 달 이상을 치앙마이에서 더 체류해야 하는데 주어진 환경을 이용해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익숙한 공간, 익숙한 활동에서도 행위의 순서를 변경하거나 시선의 초점을 바꿈으로써 감각의 갱신을 유도할 수 있을 듯했다. 가보지 않은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익숙한 환경을 창의적으로 응용하는 것도 충분히 유익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슷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던 일상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생활공간과 일상적 활동을 새로이 변주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괜찮다면 한국 생활에 적용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상의 범위 안에서 변주가 가능한 일들을 추출했다. 그러고는 현지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 자극을 얻을 수 있는 것들, 영감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집중적인 시도는 주로 식사시간에 이루어졌다. 이미 여러 식당을 번갈아 다니고 있었지만 이 참에 새로운 눈으로 주변을 재감식하면서 맛 좋고 가격 적당한 현지 식당을 좀 더 파악해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끊임없이 감각을 갱신하려는 상태 자체가 정보 확장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구체적인 맛집 정보의 암기보다는 실천의 가치에 더 높은 비중을 두고 새로운 식당 찾기를 연일 반복했다. 익숙한 길목들임에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동선을 만들어 내느라 매일 얼마간의 시간을 더 들여야 했지만 같은 식당들을 번갈아 방문하는 것보다 한결 역동적인 느낌을 매번 받았다. 막막한 기분으로 나설 때마다 어김없이 스트레스가 찾아왔지만 일상의 쇄신을 위해서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라도 내면을 계속해서 흔들어 줘야 할 일이었다.


어떤 날에는 바람도 쐴 겸 스쿠터를 몰고 현지인들이 주거를 밀집한 지역으로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식당들을 쭉 점검했고, 거리의 형세와 지역 문화가 만들어내는 풍경도 음미했다. 뒷골목을 누비며 식당들의 면면을 뒤쫓고 동네 풍경을 눈에 담는 사이 감각이 활성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목적을 품고 감각을 가동하고 있기 때문인지 익숙한 것들이 새로운 표정으로 내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느꼈다. 감각적인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내 세계 안에 존재했음에도 도외시했던 것들이 낯선 모습으로 새로이 피어나는 풍경을 구경하는 기분이 쏠쏠했다.  


평소 즐겨 찾던 식당에서도 예전과 달리 일부러 새로운 메뉴를 시켰다. 끊임없이 갱신되는 일상을 만들려는 시도였다. 쉽게 쉽게 살려는 태도에 일침을 가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생활이 탄력을 되찾았고, 심신에도 활력이 차올랐다. 어제와 다음 없던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는 현상도 경험했다. 똑같은 시간을 다른 길이로 느끼는 기분이 묘했다.  


그러는 동안 뜻밖으로 일상이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내면세계에 감도는 역동성은 여전했지만 내면의 활력과 일상의 고요는 서로 다투지 않고 나란히 나아갔다. 육체는 요란한 곳에 놓여 있어도 정신이 탄력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면 일상이 얼마든지 안분지족의 시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태국 제2의 도시라는 치앙마이의 도심 한복판에서 월든 호숫가가 거짓말처럼 열리는 나날들. 소란스러운 도시에서 누리는 극도의 평온함이 생활의 만족도를 끌어올렸다. 




# 변화가 벌어지는 곳이 어딘지를 주목하라

여행의 목적 중 하나는 새로운 환경을 이용해 상태의 변화를 꾀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상태의 변화는 결국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무리 낯선 곳을 여행한다고 해도 내 안의 요소들에 자극이 가해지지 않으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다행히도 여행은 힘이 강해서 여행자 대부분은 변화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때에 따라서는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변화의 수준이 미미할 수도 있다. 내면에 어떠한 자극이 어느 정도로 가해졌는지가 변화의 관건이라고 하겠다. 내가 치앙마이에서 한 시도 역시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삼았다. 일상의 조건이 제한적이었기에 많은 것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정된 환경 속에서나마 내면을 자극할 수 있는 활동을 얼마간 추출해 실행으로 옮기고자 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크게는 일상에서 반복되던 활동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행하는 것부터 작게는 사소한 행위의 진행 순서를 바꿔본다거나 관점을 달리해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까지 나름대로 다양한 접근을 했다. 결과가 상당히 만족스러웠기에 귀국 후에도 일상에 적용했다. 평소에 산책을 즐기는데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동선을 바꿔 보는가 하면 일상 루틴의 순서에 변경을 꾀해 보기도 했다. 산책의 경우, 미술붓이나 드로잉펜이 된 기분으로 동네에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럴 때마다 상상력이 자극되곤 했다. 방에 놓인 사물의 위치를 이따금 변경하기도 했는데 매번 감각이 새로워졌다. 그만그만한 일상 속에서도 가만히 살펴보면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빈 틈을 꽤 찾을 수 있다. 당장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고 상심하지 말고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주변 요소들을 살펴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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