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침해하는 것들에게 저항심을 아끼지 말 것
저항심은 자유 의지의 다른 얼굴이다
'욕망에 충실하자'를 생활의 지침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생각한 것을 머릿속의 작용으로만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례가 늘었다.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행위를 자제하곤 했던 과거의 태도도 점차 개선되어 갔다. 욕망이 올라오면 일단 행동으로 옮긴 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고자 했다. 처신이 미숙해 번잡한 상황이 야기되더라도 그 안에서 균형점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치앙마이에서도 그러한 태도는 그대로 유지했다. 욕망을 행위로 옮길수록 내면의 불안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없지는 않았지만 해소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중심이 단단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갑자기 내 안에서 분노가 고개를 쳐들어 포악스럽게 괴성을 질러댔다. 그것도 하루에 두 번이나.
첫 번째로 분노가 치솟은 곳은 협업 공간이었다. 숙소 수영장에서 수영을 마치고 협업 공간으로 복귀해 자리에 앉았는데 중앙 에어컨의 바람이 내 자리까지 제대로 미치지 않았다. 한창 더운 시각이어서 공간 전체가 후텁지근하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벽걸이 에어컨을 켰다. 그러고서 몇 분 후 에어컨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은 서양인이 돌아왔다. 에어컨을 켤 당시에는 자리에 없다가 에어컨을 켜자마자 자리로 복귀한 것이었다. 좌석에 앉은 그가 나에게 에어컨을 켰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마치 지시를 내리는 듯한 말투로 껐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바람이 자신을 향해 쏟아진다는 것이었다. 그 표정과 태도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찬바람을 직접 받아내야 하는 그의 사정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말투가 무례해 순간 심기가 뒤틀렸다. 정중하게 요청했다면 흔쾌히 에어컨을 꺼도 좋다고 대답했을 텐데 오히려 명령하는 듯한 어투였다. 얕잡아 보는 표정 역시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럽을 여행하다가 만난 어느 인종차별주의자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반박할 구실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아서 작업을 하는 동안 불쾌감이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분노로 변해 내 안에서 그악스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지만 이미 상황 종료. 다시 따지기도 뭣한 데다가 설령 따진다고 한들 마땅한 꼬투리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분노는 더욱 거친 기세로 날뛰었다.
평소 같았다면 너그럽게 이해하려고 했을 것이다. 에어컨을 꺼 주고 시원한 자리로 옮겨 작업을 하면 될 터였다. 설령 상대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액면 그대로의 대응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에게서 강제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항의의 형태였던 감정은 후에 들이받고 싶은 감정으로 변했다. 아주 오랜만에 겪는 분노의 격랑이었다.
감정의 격동은 저녁에도 또 한 차례 이어졌다. 오후에 협업 공간의 타 지점으로 이동해 작업을 했다. 저녁이 되어 밖에서 식사를 한 후 다시 스쿠터를 타고 들어오는데 마침 내부에 있던 서양인이 일을 마치고 나가면서 주차장 출구에 자신의 스쿠터를 세워 놓고 출입문을 열고 있었다. 관리 스탭이 퇴근하는 저녁 6시 이후에는 출입자가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출입문을 직접 여닫아야 했다. 그가 출입문을 여는 바람에 스쿠터에서 내릴 필요 없이 주차장 내부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스쿠터의 속도를 줄이면서 마당으로 진입하는데 그가 나를 향해 말했다. “출입문을 닫아라.” 그가 없었다면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어서 알겠다고 그에게 대답했다. 그런데 대답을 하는 기분이 찝찝했다. 그의 말투가 명령조였기 때문이다. 위압적인 그 모습이 낮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자신의 결정을 명령하듯 말한 두 서양인의 태도가 서로 닮아 있었다. 자리로 돌아와 작업을 하는 동안 다시금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 상대의 태도도 거슬렸지만 좀 더 빠르고 명쾌하게 대처하지 못한 나 자신이 더욱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낮에 생긴 분노가 아직 빠져나가지 못했는지 분노의 기세는 상황에 비해 꽤 거셌다. 폭발할 기회를 노리면서 조용히 도사리고 있던 내 안의 무언가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느낌도 받았다.
밤에 숙소로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두 상황 모두 컴플렉스가 작용한 듯했다. 계급 체계가 확고한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나였다. 지금보다 계급의식이 사회적으로 더욱 분명하게 작동했던 시절에 제도권 교육을 받다 보니 상층 계급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이 내 안에 깊이 자리 잡았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면서 내 안의 상식들을 전복시켜 나갔지만 아직도 내 안에는 어린 시절 외부에서 주입된 수많은 인습들이 남아 있을 터였다. 그중 어떤 것들은 뼛속까지 깊숙이 각인돼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만히 따져 보니 권력에 대한 동경은 서양을 향한 열등감으로도 확장된 듯했다. 선진국의 문화와 산물은 우리 것보다 좋을 거라는 편견이 무의식 중에 작동할 때가 많았다. 그러한 심리가 두 서양인의 거만한 행동에 의해 건드려진 듯했다.
이후에도 신경을 자극하는 상황은 계속 발생했다. 짜증을 유발하는 일들이 유난스럽게 이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인생이 다 그렇지 하며 넘겼을 텐데 그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마음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과거의 여행들에서는 무던하게 넘겼던 모기마저 짜증을 유발했다. 짜증이 나도 보통 짜증이 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싶을 정도였다.
일련의 상황들에 경향성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건 그 후의 일이었다. 매 상황에서 치솟았던 짜증은 저항의 다른 얼굴이었다. 내가 자율성을 가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저항의 심리가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짜증을 유발한 대부분 상황들은 다른 때 같았으면 그러려니 했을 일들이었다. 짜증을 부려 봐야 기분만 나빠질 뿐 달라지는 건 없다는 생각에 불쾌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마음을 비우는 데 주력해 오던 나였다. 그동안 여행을 해 오면서 얻은 생활의 지혜이자 갈등을 정돈하는 해법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같은 태도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유난스럽게도 짜증이 올라왔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된 바지만 그 무렵 내 안에서는 자유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형태가 짜증이었을 뿐 나를 억압하는 것들, 나를 위협하는 것들을 향해 강력하게 저항 의지를 발동했던 게다. 자기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흔히 겪는 현상인데 당시에는 내 감정에 몰입하느라 그런 줄 몰랐다. 사실 생활의 지혜라고 여겼던 관용의 태도 속에는 타협의 심리도 들어 있었다. 나를 훼손하려는 외부의 압력에 완강히 저항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정당한 욕망을 스스로 굴절시키며 관용의 가면 뒤로 숨을 때가 많았다. 자유 의지가 충분히 활성화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에 대해 강경한 저항이 시작된 치앙마이에서의 생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모기한테까지 짜증을 낼 필요는 없었지만 저항의 움직임이 이는 현상 자체는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억압적인 상황 앞에서 저항심이 발동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주체적인 삶을 원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행로를 부당하게 가로막는 대상에게 저항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행 당시의 나는 상황 논리에 여전히 휘말리고 있었다. 주체성, 자존감 등의 문제를 전부터 고민해 왔지만 머리와 몸이 종종 따로 놀았기에 상대의 부당한 태도에서 비롯된 불쾌감조차 속으로 삼킬 때가 꽤 있었다. 불량한 태도를 보이는 상대에게 명령하는 듯한 어조가 불편하다는 얘기를 해도 됐는데 윤리의식이 먼저 발동해 점잖은 척을 하기에 바빴다. 분명한 의사 표현은 결례가 아니라는 사실을 쿠알라룸푸르에게 선명하게 깨닫기도 했지만 그 같은 자각을 몸이 충분히 받아들이는 데는 더 많은 경험과 시간이 필요했다. 태도의 확립에는 무수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 경험들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태도가 점차 확립된다. 특히 실존적인 화두와 맞닿는 태도의 확립에는 더욱 격렬한 저항이 동반된다. 두 서양인들을 향해 감정을 그르렁거리긴 했지만 이 시기까지도 주체성을 향한 내 갈망은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다. 순응하는 인간을 부단히 육성시키고 있는 현대 사회라지만 부당한 요구, 나를 훼손하는 외부의 작용들에 단단히 저항할 일이다. 그래야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