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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철 May 10. 2019

마루젠의 역사는 근대의 역사,
도쿄 마루젠 본점

도쿄, 2018년 11월

아홉번째 이야기

도쿄도 치요다구 마루노우치





마루젠의 역사는 일본 근대의 역사


 일본의 11월 23일은 서양의 추수감사절에 해당하는 ‘근로감사의 날’이다. 공휴일 아침의 마루노우치는 거대한 유리나무숲 같았다. ‘거리를 오가던 멋진 정장의 신사숙녀들 모두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거목의 유리기둥이 비추는 것은 홀로 남겨진 여행자의 얼굴뿐이었다. 여행자가 한 발을 내딛으면 저 대로의 끝까지 구둣발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런 도입부의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이었다.


 T씨와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T씨는 어학연수 때 알게 된 일본인 친구인데, 오카야마의 마루젠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도 마침 휴일이라 군마로 여행을 간다기에 도쿄에서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400엔 전후의 메뉴를 파는 후지소바에서 소바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도쿄역 역사를 어슬렁거리다가 약속장소인 마루젠 서점 마루노우치 본점으로 향했다.





서울역 구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도쿄역은 1914년에 완공되었다.(서울역-경성역은 1925년 완공) 1945년 5월 25일,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지붕과 내부가 불탔으나 벽돌 골조는 살아남았다. 1947년까지 복구공사를 진행했으나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하였다. 지금의 도쿄역은 2007년부터 2012년에 걸친 복원 공사를 거친 것으로, 3층을 지어올리고 동판으로 된 돔을 설치하는 등 많은 부분에서 1914년의 모습을 되찾았다.




도쿄역 내부의 돔 장식



 마루젠(丸善)은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이자 의사인 하야시 유우테키(早矢仕有的)가 1869년에 창립한 기업이다. 서양서 수입과 번역출판을 전문으로 했던 마루젠은 일본에 서양의 근대적 학문과 지식을 수입하는 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 문화적 토대 위에서 일본의 근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마루젠 스스로도 ‘마루젠의 역사는 (일본) 근대의 역사’라 자부하는데, 이는 그리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한편, 마루젠의 역할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서 주인공 형식이 도쿄의 마루젠에서 사온 서양서들을 ‘문명’의 상징처럼 여기는 장면을 보면 조선에서 마루젠의 역할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십일 세기의 여행자에게 마루젠이 이형식의 마루젠만큼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본에 갈 때면 꼭 찾아가곤 했다. 이날도 T씨를 만났을 때는 도서위치가 인쇄된 쪽지를 이미 한 움큼 쥐고 있었다. 술독에 빠진 술꾼처럼 마루젠이라는 활자의 바다에 빠진 활자 애호가인 셈이었다.


 T씨와는 팔월에 장충동에서 평양냉면을 먹은 이후로 삼 개월만이었다. 간만에 만난 T씨의 인상은 팔월의 여행자 T씨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서가와 평대를 둘러보는 T씨의 얼굴은 ‘일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도쿄의 마루젠은 ‘현장’이었던 것이다. 서로 학생이었을 때 알게 된 T씨였는데, 그녀도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 싶었다.




끝도 없이 늘어선 이와나미 출판사의 시리즈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만년필 매장에서 판매중인 마루젠 스트림라인 오노토 모델 브릴리언트 웹. 마루젠은 1884년, 일본에서 최초로 만년필을 수입 판매한 회사로 알려져 있다. 마루젠이 판매한 만년필 가운데 영국 ‘De la rue’사에서 제조한 오노토 만년필은 문호 나쓰메 소세키가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판매중인 이 스트림라인은 소세키가 사용한 오노토 만년필을 모델로 삼아 만든 것이다. 복각이 아니므로 원본과 그렇게 닮지는 않았지만, 닙과 중결링에는 소세키가 주문제작하여 사용했던 원고지에 들어갔던 용무늬가 각인되어 있다.





문구코너에서 발견, 지금은 짝의 집에 가있는 고양이 일력. 매해 현상응모로 모은 고양이 사진들로 달력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옆에 쓰여 있는 이름으로 사진 속 고양이들을 불러볼 수도 있다. 



뜻밖의 맛집, M&C 카페


 점심은 T씨와 마루젠 4층의 ‘M&C 카페’에서 하야시라이스(하이라이스)를 먹었다. 서점 카페에서 웬 하야시라이스인가 싶겠지만, 하야시라이스는 엄연히 마루젠을 대표하는 것들 중 하나다. 마루젠을 창립한 하야시 유우테키가 하야시라이스를 개발하였다는 것이 마루젠의 주장이다. 따라서 마루젠은 하야시라이스를 창립자의 이름자대로 ‘早矢仕ライス’라 표기하며, 하야시라이스 통조림까지 판매하고 있다. (하야시라이스의 어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는 영미권의 다진 쇠고기 요리인 Hashed beef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긴 하다.)


 T씨가 웃으며 ‘메이지 시대의 맛’이라 소개한 마루젠의 하야시라이스는 정말로 메이지 시대의 맛인지는 모르겠으나, 고등학교 급식의 끔찍한 기억을 단박에 깨트릴 정도로 일품이었다. 고기와 야채의 육수가 충분히 우러난 그 맛…… 일행에게 실례될까 싶어 그러지 못했지만, 혼자였다면 연신 셔터를 눌러댔겠지.


 간만의 재회였지만 T씨가 군마행 열차를 타야하는 관계로 그리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마루젠을 나서는데, T씨의 발걸음이 점두의 한 책 무더기 앞에서 멈춰 섰다.




종들의 위대한 역사


 햐쿠타 나오키(百田尚樹)라는 자의 『일본국기(日本国紀)』라는 책이 정문 안의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자리에 산을 이루고 있었다. 출판사에서 서점 측에 돈 깨나 뿌렸을 것이 분명했다.


 햐쿠타 나오키는 방송작가 겸 소설가이며, 또한 유명한 우익논객인 모양이었다. 그런 그가 표절과 망상을 버무려 완성한 “역사책”이 바로 『일본국기』였다. 일본은 아시아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구미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둥……. 인터넷 리뷰어들이 ‘라이트노벨’, ‘종교서’, ‘망상집’이라 야유하는 이러한 책도 ‘국민의 역사’니 ‘일본통사의 결정판’이니 하는 딱지를 붙인 뒤 홍보에 막대한 돈을 뿌리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T씨가 보여준 『일본국기』의 서문은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역사에 훌륭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그녀가 이 말을 하는 사이에도 몇 사람이나 흥미를 보이며 책을 펼쳐들었다. 평대 위치가 너무나 좋았다.





햐쿠타 나오키, 일본국기, 겐토샤, 2018. 햐쿠타 나오키는 한국에서 논란이 되었던 일본영화 ‘영원의 제로’의 원작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 Amazon.jp)



 소위 ‘훌륭한 역사’란 가난한 사람들의 피에 젖어, 그 수많은 민족들의 피에 완전히 젖어 단 한 글자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역사다. 그리고 그 피 가운데 몇 할쯤은 자민족의 피이기도 한 것이다. 이십 세기의 절반을 피의 욕조에 빠뜨려 익사시켜놓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한다면, 이십일 세기에도 인간은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국가’니 ‘위대한 민족’이니 하는 담론은 끊임없이 변주되며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어째서 이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위해 살다 죽는가?’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을 ‘위대한 국가와 민족의 일원’ 단 한마디가 너무나도 쉽게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인간이 주체로서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삶의 태도인가. 그것은 책임과 함께 모든 권리를 주인에게 넘긴 종의 삶이 아닐까. 주인의 이름으로 타인을 증오하고 파괴하지만, 종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종은 생각한다. 그러한 삶의 어디에 ‘나’라는 존재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군마로 떠나는 T씨를 배웅하고 도쿄역을 나서는 길. 사거리에서 우익의 선전차가 군가 풍의 노래를 틀어대고 있었고, 군복을 흉내 낸 옷을 입은 남자들이 그 주변을 서성거렸다. 여행자는 그들이 우리의 거울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마루젠에서 사온 책들과 아테나 잉크 렌가(벽돌). 앞에 놓인 책의 제목은 한국어로 직역하면 ‘마감책’이다. 나쓰메 소세키, 에도가와 란포,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유명 작가들의 마감에 대한 글을 모았다. 가장 기대되는 책.



마루노우치―아키하바라―그리고 숙소에서 하루의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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