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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젠가 Dec 24. 2023

박 씨 부인전

낭군 같은 남자는 하나도 부럽지 않소이다.

나는 내가 여성인 것이 좋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인 것도 좋다.

일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힘들 때가 있다. 아이를 키우는 것, 일을 하는 것, 여성인 것이

결혼해서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지옥불에 떨어진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유아기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한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매일매일 그 누구보다 나는 열심히 살아가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힘들지? 하는 질문을 하며 하루하루 허덕 허덕 살아냈다.

직장에서는 남자들은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는데 여자란 이유만으로 복장을 규제당하고 그에 반발했다가 권력자의 눈밖에 나서 던전에 던져졌다.


지금이 2023년. 다양성을 강조하는 시대. 핵 개인의 시대. 소녀들에게 무엇이든 돼라고 가르치는 시대.

에스파는 광야로 향하라고 노래하고 블랙핑크는 절망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라고 노래하며 세계를 제패했다. 이제는 걸그룹들이 흔한 사랑 노래를 안 해도 온 세상이 그들에게 열광하는 시대다. 그런데 왜 여전히 일상 속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은 곳곳이 힘들고 어디나 암초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지 모르겠다.


나는 올해 그 해답을 아이들과 찾으려고 했다.

왜냐면 나의 일상에도 중요하지만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일상과 미래가 걸려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애들이 나처럼 정말 그게 문제인지 몰라서 괴로움과 불합리함을 견뎌내는 삶을 사는 일이 생기면 안 된다.

착하고 순한 딸로 키워지고 시부모에게 순종하는 며느라기 시기를 지나 참고 견디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이거 이거 너무너무 불합리한데 하고 폭발해서 밥그릇을 차버리고 도망가버리거나

라테는  했는데 요즘 것들은 정말~ 하며 너네도 참아라 하고 다른 여성들을 더 괴롭히는 여적여가 되거나 하면 안 되니까.


교육청의 성인지 개선 동아리 공모전에 응모해서 지원금을 확보한 후 일 년 동안 아이들을 들들 볶아서 책을 읽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발표하게 하고 너희들 만의 생각과 이야기로 책을 쓰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담은  한 권의 책을 집필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책을 가지고 교육청 성과 발표회에서 우수상을 시상했다.


아이들에게 두 권의 고전을 읽혔다.

낭군 같은 남자는 하나도 부럽지 않소이다 하고 패기 있기 외친 조선시대 박 씨 부인의 이야기를 담은 박씨전


우리의 사랑은 하늘이 맺어주었으니 인간이 끊을 수 없다 하며 전쟁통에 헤어진 부인을 찾아 베트남까지 갔던 로맨티시스트의 표본 최척의 이야기를 담은 최척전.

성인식 개선 동아리 대회의 참가 주제와 목적을 고전소설집필로 잡은 것은

조선시대 같은 남존여비의 시대에 저렇게 기세 당당한 여성 저렇게 로맨틱하고 부인만을 사랑한 남성의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고전을 집필하도록 문해교육과 글쓰기 교육을 한다는 것도 좋았지만 결과물로 고전소설이란 방식을 차용할 수밖에 없는 학교 내부의 사정 때문이었다.


내가 교육청의 이 사업에 신청해서 목적사업비를 교부받았다는 사실 만으로 못마땅해하고 이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 교육청으로 워크숍을 가려 출장기안을 올린 나는 몇 번이나 불러 교무실 한가운데 세운 관리자들을 설득해야 했다.


내부의 보수적이고 폐쇄적 문화를 공고화하고 싶은 그들에겐 나는 자꾸  교육청  여성가족부 같은 상위 외부기관 시행 사업을 추진하고 싶어 하는 위험 인물이었다.


나는 애들을 꼬드겨 페미니즘을 주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나 사는 게 힘든 일개 범부 일 뿐입니다.


우리 애들이 나처럼 힘들게 살게 될까 봐 걱정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저

성인식 개선 양성평등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회를 전복하는 무서운 개념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오래된 고전소설을 보십시오. 우리 애들도 무려 고전소설을 쓰게 하려고 문해교육과 글쓰기 교육을 하는 거라니까요. 하며 누구나 인정하는 고전이 주는 힘 뒤로 숨어버렸다.


박씨전의 박 씨는 외모가 못났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았지만 자신의 대단한 능력으로 병자호란에서 나라를 구했다. 최척전의 최척은 임진왜란 시절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애틋한 부성애와 부인에 대한 사랑으로 먼 길을 떠나 온갖 고초 끝에 사랑하는 가족을 되찾는다.


왜란과 호란. 나라는 힘이 없고 권력자들은 아둔하여 왜군이 밀고 들어오자  임금도 버린 땅에 갈 곳 없이 남아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저항한 민초들. 쳐들어 오는 왜군들의 횡포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불쌍한 민초들.


권력자들은 여전히 정신못차리고 백성을 위하지 않고 자기의 그 비루한 권력만을 유지하려 당파가 갈라져 싸움질만 하는 통에 이번에 떼 놈들이 쳐들어와서 전쟁을 겪게 되자 힘도 백도 없는 여성들이 끌려갔다 모진 고초 끝에 목숨부지하고 돌아와도 그녀들에게 화냥년이라 돌을 던지는 세상. 그걸 겪은 민초들에게 영웅의 기개를 가진 여성이나 부인만을 사랑하는 남성은 어쩌면 새로운 꿈과 희망이 아니었을까? 이런 시대의 열망이 반영된 소설이 박씨전과 최척전이다.


고등학교 2학년 8명의 아이들은 이 고전 소설을 읽고 나에게 4차시의 교육을 받았다.

내 수업은 1. 건강한 성문화를 위한 사회적 대안 2. 성적 자기 결정권의 의미와 실천 3. 성희롱과 성폭력 그리고 연대의식 4. 미디어와 양성평등이라는 주제로 구성돼서 내 수업과 시각자료를 보고 직관적으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브레인스토밍과 에세이 제출 과제로 구성했다.


그리고 4차시에 걸쳐 고전소설의 구성과 작법 수업을 진행했다. 고전소설은 큰 특징이 사건의 우연성과 권성징악적 결말로 구성되어 있기에 고전소설을 쓰라고 했을 때 내가 제일 강조한 것은 쓰고 싶은데로 막써! 그렇지만 그 주인공은 본인이고 본인의 이야기를 쓰는 거야 악을 징벌하는 영웅이어야 하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으면 박 씨처럼 기세 좋은 여성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으면 최 씨처럼 배우자에 대한 의리와 사랑을 지키는 남성으로 설정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호방하거나 기세 좋았고 모두 행복했다. 수업을 진행하며 자기는 먹는 것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하는데 그동안 보이는 것에 급급해 조금 먹고 10킬로 뺐다가 또 먹고 12킬로 찌는 걸 반복했다는 걸 고백했다. 그 애에게 섭식장애의 위험성을 말하기전에 우리 사회의 몸매 집착을 돌아봐야 한다


그 아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자기의 몸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인물이었다.

엄마가 시켜서 바이올린을 배웠단 친구는 소설 속에서는 활쏘기와 승마에 능했다.이상형은 같이 활을쏘러 다닐 낭군님.



나는 책을 출간하는 게 소원이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직업군은 작가이다.

그런데 그 꿈을 이 애들과 함께 이뤄냈다.

애들이 쓴 고전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해피앤딩을 맞았다. 옛날 옛적에 어느 소녀가 살았는데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잘 교육받고 그와 똑같이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낭군님을 만나 백년해로했답니다로 끝났다.

외부의 성과발표 대회에 나가서 내부의 무관심과 압박을 보상 받을 만큼 성과도 인정받았다.




아마도 내가 누울 자리는 이곳인가 보다.

나는 이제 내가 여성이고 아이를 키우고 애들을 가르친 다는 사실이 너무나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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