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에서 인생의 귀인을 만났다.
돌고래 그녀들
H초등학교. 급하게 채용공고를 뒤져 집과 가장 가까운 학교라 지원한곳.
계약서 도장을 찍고 출근할 당시
나는 일신이 매우 고단 했었다.
아직 어린 둘째가 별다른 준비나 적응기간 없이
그 아이 입장에선 너무나 갑작스럽고 폭력적으로 어린이집에 맡겨져야 했다.
아침 일찍 어린이집에 던져지고 가장 늦게 까지 남아있어야 하는 그 일상이 아기는
너무 힘들어 아침마다 으앙으앙 울었다.
매일 누런 콧물을 흘렸고 피부염이 생겨 스테로이드를 달고 살았다.
그런 애를 두고 그 애를 돌봐줄 대안도 없이 나는 일을 해야 했다.
애뿐만이 아니라 마누라 몰래 사고 쳐서 상황을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고 회피하고 도망을 간 남편.
진창에 꼬꾸라져 처박힌 남편을 일단 빼내서 일으켜 세워야 했다. 자기 아들이 부인 몰래 사고 치고 꼬꾸라져 처박힌 것도 며느리 탓을 하며 공격하는 대단한 시모에게서도 나를 지켜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다잡고 다잡으며 밤에는 애들을 재우고 굳어지고 녹슨 머릿속에 각종 이론들을 억지로 집어넣어 가며 임용고시 준비를 해야 했다. 아침에는 또다시 전쟁 같은 하루가 시작돼서 이대로 눈이 안 떠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기어이 나를 일으키고 애들과 남편을 일으켜 각자의 전쟁에 참여하게 등을 떠밀었다.
그런데 일신이 고단 한 건 얼굴에도 티가 났나 보다. 그 당시 교장 선생님은 한 학기 계약으로 스칠 인연일 뿐인 나까지도 눈여겨보셨다. 어느 날은 교장실로 불러 직접 차를 타주시며 너는 웃을 때 참 보기 좋은데 왜 항상 어두운 표정인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셨다.
그 당시 내 판단에서, 관리자가 따로 불러 너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본다는 건 내가 뭔가 일을 잘못하고 있어서 다그치는 것이라 여기고 아주 황망해하며 아닙니다 교장선생님 혹시 제가 뭐 잘못했나요? 하고 되물었다.
그분은 호탕하게 웃으며 내가 사람을 잘 보는데 항상 너를 보면 진짜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가 힘이 될 수 있다면 힘이 돼 주고 싶다 하셨다. 들어줄 테니 니 이야기를 해봐라 하고 말씀하셨다.
처음이었다. 그런 관리자는. 아니 그런 어른은.
자기의 시간을 들여 남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겠다고 하는 어른이라니. 관리자, 특히 교장의 위치에 오르면 보통은 자기 말만 하며 남이 자기 말을 듣길 원하지 않는가?
남편이 큰 빚을 져서 어쩔 수 없이 둘째를 내던지고 급하게 재취업을 했던 그때 다시 일을 한다는 희망보다 상황에 떠밀려 일을 한다는 절망이 앞섰다.
경력단절에 유아기 아이들이 줄줄이 딸려있는데도 다시 채용이 될 수 있는 내 자격증과 내 가치에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절망의 순간에 그래도 일을 해서 빚도 값아 나갈 수 있고 집도 지킬 수 있는 내 힘과 용기를 돌아보지 못하고, 그저 이런 상황을 만든 남편과 시부모에 대한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혔었다.
그날 교장실에서 따뜻한 차 한잔을 대접받으면서 나는 교장선생님께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내 일신상의 문제들을 이야기했다.
(그분의 눈이 정확했다. 그당시 나에게 닥친 현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억울 해도 딱히 하소연 할곳 없이 외로웠었다. 고립무원에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서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데 막상 상황을 이렇게 만든 남편은 회피하며 손놓고 있었고 시모는 화를 내며 나를 공격했다. 업무 복귀전 복직 교사 연수를 받으러 가는 택시안에서 기사님이 지나가는말로" 오늘 연수원에 차가많네 무슨 교육있냐" 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그분에게 "기사님 아이고 ~ 제가 복직하게 되서 업무 연수를 들으러 가는데요 애낳고 쉬다가 갑자기 일을하게 되는데 잘 할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너무 갑자기 계획에도 없었거든요. 왜 그렇게 되었냐면요~ 하며 내 이야기를 줄줄 하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물론 속으로 ' 와 나 이거~ 내가 진짜 돌아이 되는거 시간문제겠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함부로 아무나 붙잡고 내 개인사 아웃팅하지 말아야지 듣는사람은 왠 날벼락이겠냐' 하고 꿀꺽 참았지만.)
내 시모는 지배적인 사람이고 내 남편은 유약한 사람이다. 내 시모는 아들부부의 삶을 계획하고 결정하고 한계도 선도 없이 침임 했었다. 시모가 지배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건 이해가 간다. 그녀는 맨바닥에서 시작해서 그 지역 소문난 대박 맛집을 일으켜 자식들을 유학보내고 남편 정치자금을 댄 대단한 사람이다.
하지만 시부모의 가장 나쁜 선택은 자식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하도록 놔두지 않고 자기의 힘과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한것이다.
자식을 부하직원으로 두고 아들 부부를 성인의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가사노동자 운전사 비서로 살게 한것.
남편의 가장 나쁜 선택은 자신과 자신의 부모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고 그냥 부모님이 대박 맛집을 일으키셨는데 그거 물려준다니까, 부모님 하라는데로 하면 돈 많이 쓸수 있다니까 부모님이 시키는데로 살자 하고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시부모가 그런 사람인걸 알자마자 내 살길을 찾기위해 시모의 강력한 반대를 무릎쓰고 시모 개인비서 혹은 시모의 개인 가사 노동자에서 탈출하기 위해 취업했다. 그래서 그 입김에서 어느정도 벗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마찰과 고통이 있었다. 남편은 여전히 시모의 부하 직원이였다.
시모는 여전히 일하는 며느리의 일 자체를 존중하지 않고 내집에서 귀한 내 손님들하고 계모임을 할껀데 며느리 너는 연차쓰고 와서 내 손님들 접대좀 해라 는 요구를 하곤 했다. 그런 걸로 내 귀한 연차를 쓸 수 없다. 내 연차는 내 자식이 아플때를 위해 남겨둬야 하기에 내가 아플때도 못쓰고 남겨둔 것이다. 하고 거절하면 남편을 해고 하겠다고 폭주했다. 조금만 수틀리면 해고를 들먹이는 시모에게서 남편이 먼저 지쳐갔다.
시모와 마누라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남편은 시모에게서 독립하려면 스스로 벌이를 하는 것 뿐이라는 걸 드디어 깨닳고 자기만의 사업을 도모했는데 그러기엔 그는 시모가 시키는데로만 살아와서 경험과 준비가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집 잡혀 말아먹는건 너무 당연한 수순이였다. 그래서 우리 사는 집을 지키기 위해 나는 둘째 출산하고 육아하며 좀 쉬려하다가 급하게 다시 이 채용에 응하게 되서 이곳에서 일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 중에 사실 제일 힘든 건 내 선택들이 너무 바보 같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있다는 것.
장성해 일가를 이룬 아들 부부에게 손주는 무조건 4살까지 그 어떤 기관에도 보내면 안되고 엄마가 끼고 돌봐야 한다, 모임은 그 지역 라이온스, 운동은 골프, 종교는 기독교, 그것도 내가 장로로 있는 교회만 다녀야 한다로 모든걸 정해놓고 그대로 살라고 강요하는 시부모나 시부모의 뜻데로 그저 굽히고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혼자 무언갈 도모할 만큼 단단하지도 못한 남편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참고 동조 하며 이런 진흙탕 속에 같이 빠져있던 나 자신에게 가장 화가 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지금도 엄마 대신 동생을 어린이집에서 찾아와 과자하나 뜯어서 먹여주고 있을, 자기도 아이인 큰애나
영문도 모르고 아침 일찍 어린이 집에 던져지는 작은애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슬프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일상을 유지하는데도 여전히 시모는 자기 아들이 진 큰 부채를 해결 하려 일을 해야하는 며느리의 사정이나 급작스럽게 기관에 보내지게 되서 일상이 괴로울 아직 어린 손주의 사정은 모른척한다.
오히려 내 육아나 가사에 조력해 줄 생각은 일절 없으면서 며느리가 시댁 명절노동이나 시댁 가사 노동에 참여 안 하는 것만 괘씸해한다."네가 아무리 나가서 일을 해서 돈을 번다 한들 몇 푼 안 되는 주제에, 그래 봤자 내 며느리일 뿐이니 내가 부르면 와서 일해. 그게 싫으면 이혼하고 꺼져" 하며 폭언한다.
며느리는 다른 자식들이나 다른 친척들과 다르게 내 돈을 미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자 시모는 그럼 나를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했느냐? 아니다. 그래 너는 니 인생 니힘으로 살아가는 존재구나 하고 내버려 두지 않고 오히려 나만 배척하려고 한다.
시조카 결혼식 같은 시댁 가족 모임에 싫은 마음을 억지로 누루고 시고모에 대한 의리와 의무감으로 참석해도 결혼식장에서 만난 시부모는 나에게 눈길한번 안주고 인사도 안받고 투명인간 취급한다. 다른 시댁 구성원들 앞에서 쟤는 나에게 대든 반역자이니 쟤랑은 말도 섞지 말라고 온몸으로 외치며 형벌을 주려한다. 여전히 시모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며 시모의 지시 대로만 사는 다른 시댁 자식들은 그래서 나에게 인사도 안한다.
나는 시집 식구들의 역동, 지배적인 시부모와 성인이 되서도 여전히 의존적인 자녀들, 그 관계성과 그 안에서의 심리적 역동이 병적이라고 여기지만 그래도 내가 배척 당하는 존재로 그 구성원에서 빠지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아무리 바보같고 똥멍충이 같은 남편이 라도 그와 이혼하는 건 내가 결정할 일이지 "너 내말 안듣고 니 맘데로 할꺼면 이혼하고 꺼져"라는 시모의 저주를 들어서 이혼을 현실화 시킬 마음이 없다.
내 소중한 가정 내 소중한 사람을 일단 지금은 지키고 싶다.
돌아보면 그때 나는 어쩌면 심신 미약 상태였나 보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던 개인사를 내 입으로 꺼내서 직접 아웃팅 하다니. 그것도 교장 선생님에게.
그런데 그분은 관리자 라기보다는 무엇이든 이야기해도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분이셨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했다. 막장 시집살이 스토리를 눈물 콧물 쏟아내며.
나는 어쩌면 그분의 남은 교직 생활중에 다시 스치지 않을지도 모르는 반 학기 계약교사였는데도.
교장선생님은 심신미약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담자처럼 내 이야기를 진지한 태도로 가만히 들어주셨다.
그날 교장선생님은 이야기를 다 듣더니 나에게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을 알려주셨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는 고난이다. 삶의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너에게 화살을 쏠 것이다. 남이 쏘는 화살에 맞아서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그게 인생이니까. 가족도 너에게 활을 쏘고 사회에서 만난 사람도 활을 쏜다.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활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절대로 스스로에 화살을 쏘지는 말아라. 스스로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지 말아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아하며 일하며 공부해야 하는 현실이 힘들어도 계속 공부하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교육자답게, 공부를 해나가야 결국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내 힘을 먼저 알려주셨던 분도 그분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혼으로 인한 단절을 선택하지 않고 내 나름으로 단절 없이 상황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내 남편과 똑같이 혼란 에서 도망치지 않고 노동해서 얻는 근로소득으로 긴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해결하려 결심한걸 일깨워주고 칭찬해 주셨다.
너는 아직 젊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이왕 교직에 다시 들어온거 임용고시를 다시 도전해 보라 격려하셨다. 하지만 꼭 학교가 아니더라도 좋으니 그게 무엇 이라도 꼭 스스로 선택하고 선택에 대해 믿음을가지고 열심히 해보라 하셨다.
유약한 남편이나 지배적인 시부모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자녀는 니 업이지만 네가 너에게 스스로 화살을 쏘지만 않는다면 그 업을 감당할 힘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고 격려해 주셨다. 그러니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를 괴롭히던 그 활을 뽑아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큰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물에 젖지 않는 연꽃과 같이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 가라"
그날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숫타니파타의 가르침은 큰 울림이 되어 이후에도 인생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포기 하지않고 계속 공부하고 도전해서 적당한 곳에 임용이 되었고 남편의 채무를 떠앉고 그걸 지워 나가기 위해 힘껏 노력 했다.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나의 갈등과 혼란은 티를 안내려 애썼다. 그런데 알고보니 큰 아이는 모든걸 이해하고 엄마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버님의 기일에 또 나 혼자 부엌에서 설거지 더미에 뭍혀 있자 큰아들이 제일 먼저 다가와 왜 엄마만 고생하고 있냐고 도와줄일 없냐고 물었다. 귀한 장손이 부엌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어머님은 내 눈치를 살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막상 뚜껑 열어 보니 그동안 어머님이 그렇게 떵떵거리며 자식을 쥐고 흔들 무기였던 '돈'이 안남아있고 어머님 본인 노후도 별로 탄탄하지 않은걸 알았을 때도, 그러자 그동안 뭐라도 하나 더 받아 내려고 노력하며 어머님이 나를 탄압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하던 시동서가 어머님을 버리고 떠났을 때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머님의 노후 대책을 세워드리자고 나선건 나다.
나는 그동안 괴로웠지만 어느덧 나를 힘들게 한 남편보다, 시모보다 큰 사람이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를 힘들게 했던 당신 덕분에 나는 단단하고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별일없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만한 자각보다 더 통쾌한 복수가 어딨을까? )
그 교장선생님은 그 당시 학교 인근에 건축 허가를 받아 고층 아파트를 지으려던 대기업과 싸워 학교 운동장의 일조권을 지켜내신 분이다. 몇 년이 걸리는 소송과정을 이겨내셨다. 구청과 교육청도 한발 물러섰던 대기업과 싸워 본인이 옳다고 믿는 것을 해내셨다. 그리고 그 힘들고 지난한 소송에서 마침내 이겨서 아파트의 인허가 층수가 변경되었을 때 건물에 방해받지 않고 햇빛이 들어오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뛸 수 있다는 사실로 모든 게 보상받는 느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도 그저 공무원일 뿐인데, 이미 구청에서 허가를 내준 아파트의 층수를 어찌 바꿀 수 있겠나. 아이들의 교육권을 일조권과 연결시켜 햇빛을 지켜주겠다는 그분의 의지와 소송을 진행할 역량은 그 고층 아파트가 지어졌을 때의 이익이 얽힌 건축회사 개발자 부동산 개발의 수혜를 누리고 싶은 원주민 같은 그 공사에 얽힌 수많은 이해 당사자들을 눌러버렸다. 세상에 돈보다 개발 보다 더 중요한걸 알리고 지켜주고 싶어하던 그분은 결국 이겼다. 그분의 모든 행적에서 통쾌함과 희망이 보였다. 선한 영향력이란 저런 것이구나 알게 되었다.
학교의 모든 구성원들을 그분을 존경했다. 조직 문화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건 관리자의 마인드다. 특히 학교 같이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조직은 그렇다.
그런데 일 가정 양립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돌봄 휴가를 장려하는 관리자, 합리적인 판단과 원칙에 맞는 의사 결정으로 조직 내 각자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구성원들이 결정권자의 결정에 의문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수장을 현실에서 만나니 희망이 생겼다.
무엇보다 구성원 하나하나를 조직의 부품이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밟고 올라가는 계단이 아닌 보듬어야 하는 사람으로 바라봐주셨던 분. 그런 상사이자 관리자를 만나니 일하는것과 조직에 속하는것에 대한 내 기존의 관점이 변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 귀인이었던 그녀를 만난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호원초 교사의 죽음을 알게 되고 가장 원망스러웠던 건 그 학교의 수장으로서 구성원을 지켜내야 함에도,
후배교사의 기댈 벽이 되주지 않고 오히려 사지로 떠밀어 버린 그 학교의 관리자였다. H초 교장선생님 이셨다면 절대 일을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인데. 그분이 관리자로 있는 한 그 조직 안에서는 교사가 학부모에게 삥뜯기다가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힘과 권력이 있는데 그 힘과 권력을 더 높이 올라가는데 쓰지 않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거나 조직의 구성원들을 위해 쓰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알 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 그분이 더욱 존경스럽다.
학생들에게 햇빛 드는 운동장을 지켜주신 교장선생님은 내 인생의 운동장에도 햇빛을 찾을 수 있게 나를 자각시켜주셨다.
H초등학교 전의 직장에서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은 다 나를 뜯어먹는 상어 같은 존재라고 여겨질 만큼 차갑고 무자비했다. 그래서 절대 아파도 피 흘리면 안 된다고 나를 다잡았다. 조금의 상처라도 보이면 나는 덤벼드는 상어 때에게 물어 뜯겨 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H초등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함께 어울려 무리짓고 싶어 하는 돌고래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전부 정말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H초등학교 학교 급지의 특성상 유년기 아이를 키우는 내 또래 엄마들이 많았는데 그녀들 모두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고 그 어려움을 알기에 서로 돕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 일의 가치를 알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기준이 변했다고 하지만 교직의 가치와 중요성은 무시 할 수없다. 평생 누군가의 가르침을 중요 하게 받아들이며 배워온 사람이 바로 교사다. 학교 다닐때 선생님 말씀 제일 잘들으며 커서 이제는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어 교직에 나온 사람들이다. 현장에서 매일 자신의 방식과 태도와 교수법을 고민하고 자기 반 아이 하나라도 더 변화시키고 싶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인정받고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모두 각자의 고민이 있고 그때나 지금이나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민원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도하기 어려운 금쪽이를 만나서 좌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힘든 아이나 힘든 학부모에게 얻는 괴로움은 서로 들어주고 보듬어 주었다. 일은 그냥 일로 풀어내고 일이 괴롭다는 사실로 인해 자신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스스로에게 화살을 쏘지 말자고 이야기해 주며.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나에게 화살을 쏘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뺏기지 말고 자기가 가진 에너지는 사랑스러운 나머지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돼주었다.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위기때 만난 H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과 H초등학교의 돌고래 그녀들 덕분에 개인적인 용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전에 형성되었던 일과 직장을 대하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런 시각을 바꿔줄 수 있는 건 개인의 역량보다는 조직의 힘이자 문화라 여긴다. H초등학교에서 그걸 경험한 건 합리적이고 포용적이고 수평적 소통을 중시하는, 정말 선생님들의 선생님인 교장선생님이 계셔서 조직 문화 자체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두가 굉장히 고맙고 귀하게 여기며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펼치려 노력했고 그런 노력들은 서로에게 귀감이 되어 또 함께 같이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만한 선순환이 어디있을까?
그때 만났던 사람들 모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서 이제는 H초등학교 모임이라고 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 년에 두 번 H 초등학교 앞 단골 술집에서 모인다. 오늘 오랜만에 H초 카톡방에 모임공지가 떴다.
돌고래 그녀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즐겁다. 그녀들을 만나고 나면 늘 나도 내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내 일과 내 자식과 내 일상을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하고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라는 바다속에서 만나 우리들이 공격적인 상어가 아닌 보완적인 돌고래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신 권영숙 교장선생님을 떠올린다. 어른이 없던 제 인생에서 어른이 되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장선생님 덕분에 저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