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가끔은 두서없이 요리하지
보통 집에 콩 박혀서 지낸다.
이유는 많다. 우선 집 안팎으로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물론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이 먼저다.) 유행병이 만연하니 가능한 밖에 나갈 이유를 만들지 않기도 하고.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 장 보러 나가는 게 가장 익사이팅한 스케줄이다. (물론 친구가 없는 것도 한몫한다.) 여름보다 겨울에 외출은 더 줄어든다. 이유야 당연하다. 굴 파고 들어가고 싶은 그런 계절 아닌가. 그런데 오늘 날씨가 좀 따스했던가, 겨우내 잠잠하던 이웃집들에 활기가 돋았다.
가장 먼저 테이프를 끊은 건 크리스. 근방에서 가장 덩치가 큰 개 브루스를 데리고 김치 사러 들렀다. 크리스가 6개월 된 둘째 딸이 주사 맞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의 작은 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반달 모양이 꽤 예뻤다. 이 우연치 않은 발견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 이웃집 여기저기를 오가는 방문이 이어졌다. 오늘 하루 인간 넷과 골든 리트리버 셋을 만났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한 날은 보통 잠을 잘 못 잔다. 했던 말과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이 떠올라 족히 이틀쯤은 이불 킥을 하며 보낸다.
그렇게 죽어가던 사회성에 불을 지피는 사이 저녁이 되었다.
뭘 만들어 먹지? 두서없이 요리가 시작되었다.
꼭 해야 할 요리는 템페. 남편이 하루 동안 발효한 템페가 준비되었다. 직접 만든 템페의 부드럽고 구수한 맛을 일단 보면, 슈퍼마켓 템페는 사고 싶지 않다. 템페 스타터(발효제)와 식초를 조금 덜 익힌 콩과 섞어서 따뜻하고 습한 데서 하루 정도 발효하면 템페가 된다. 부족한 글 솜씨로 설명하기 어려운 템페 특유의 발효 맛이 있고, 그 맛에 템페를 먹는다.
(인도네시아 음식 템페Tempeh 활용법 참고 글_단백질 듬뿍 채식 요리)
남편은 템페를 기름에 튀겼다. 나는 고구마를 찌기 시작했다. 그리고 갖은 채소를 썰어서 간장으로 간 하고 끓였다. 생강과 대추가 눈에 띄어 채소 삶는데 넣었더니 맛이 야릇해졌다. 조청과 고춧가루로 얼버무리고, 국수를 비벼서 그릇에 담았다. 그 사이 남편은 일타쌍피, 템페를 튀기고 남은 기름에 옥수수를 튀겼다. 간식으로 팝콘까지 준비 완료. 족보 없는 요리지만, 맛있게 먹었고 배부르니 우린 그저 좋다.
우리 채식은 미완성이다. 가끔 외식하거나 누가 만들어 준 음식을 먹을 땐 육식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에서 만큼은 완전 채식을 한 지 7년 차에 접어들었다. 동물성 식품 없이 요리하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다. 부족한 것 없고 후회할 일도 없다.
우리 식사 습관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잦으면 한 달에 한두 번, 어떨 땐 칠팔 개월 만에 하는 육식으로 우리의 식생활은 무리 없이 돌아간다. 가능한 환경 영향을 줄이는 소비생활을 유지하면서 육식하는 다른 가족이나 사회적 관계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찾은 방법이고 우리는 만족한다.
신기하게도 지난 오 년 동안 채식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다. 언제든 원하면 고기를 먹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못 먹어서 괴롭거나 간절함이 덜 했던 것 같다. 혹시 밖에서 외도가 있어도 집에 돌아오면 흔쾌히 채식 식단을 고수했다. 육식하면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우유나 고기의 냄새, 또는 그 맛이 좋지 않은 이유도 있다.
앞일이야 알 수 없지만, 가능하면 지금처럼 피보다 흙에 기대어 살고 싶다. 이제 우리는 흙에서 기른 재료로 만든 음식의 신선하고 알찬 맛을 알아버렸고, 그것만으로도 충만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출처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26쪽.
“칠십팔억 지구인 속에서 내 존재는 너무도 작지만, 나는 하루 세끼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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