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원한 이방인 Jun 25. 2018

모든 시련의 순간은 기회

소망이라는 상비약

한 해가 숨 가쁘게 흐른다.

숨 조이는 긴장감 속에 허우적 대다 보니 어느새 중간 지점에 올라서 있다.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인생.

당면한 시간을 허투루 사용하기엔 남은 인생의 총길이를 가늠할 수 없고, 지금 이 순간까지 많은 것을 놓치고 걸어온 과거 속 인생이 훈계하며 바짝 다가선다. 더 이상의 미련을 남겨선 안 되겠지 않느냐고. 

인생 누구보다 멋지게 살았다고까지 자랑하진 못해도, 마지막 순간 나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는 뿌듯함을 누리고자 한다면 무엇이 옳으려나?
더 가차 없이 달려야 할까?
좀 더디게 가도, 숨 고를 여유를 즐기며 살아야 하나?

달리기엔 젊음이 꺾인 갱년기 체력이 한계를 실감케 하고, 보다 여유 있게 '즐기는 인생'을 추구하려니 아직 너무도 많은 것이 불투명한 마흔 끝자락.


학교나, 직장이나  시기 즈음 중간 평가를 한다. 한 해의 절반 동안 달성한 성과에 대한 평가.

내 인생의 중간지점은 이미 지났건만 왜 하필 지금 그런 평가대 위에 선 느낌을 받는 걸까?

내가 걸어온 사십 수년간의 삶을 평가받을 시기에 다다른 듯한 이 느낌, 왠지 낯설고, 불편하다.

곧 쉰이 된다는 현실에 당면해서일까?

요즘 들어 부쩍 심리상태가 불안하다.
머리 속이 몹시 어수선하다.

많은 것들에 깊은 의문이 든다.

이유 없이 기운이 빠지고 지친다.

가슴팍에 돌덩이 하나 턱 얹힌 갑갑함.

이는 무기력증, 의욕상실과 더불어 얼굴에선 웃음을, 마음에는 여유를 앗아간다.

젊은 혈기, 다이내믹한 열정들과 맞부딪히며 나는 과연 언제까지 내 입지를 지켜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짧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며 딱히 적금 부은 것도 없이 살아왔는데 이대로 괜찮은 걸까?

경제강국이라는 독일이지만 우리 세대가 퇴직금을 받을 차례가 될 무렵까지 우리의 기본적 노후를 보장해줄 만큼 경제적 정치적 기반이 무너지지 않고 그 명성을 이어줄까?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홀연히 배낭 하나 메고 기약 없이 떠나고 싶은 충동과 싸우는 자아.

하지만 다행히도(?!?) 이런 상황일수록 나는 매우 현실적인 자신과 마주 선다.

잃을 것이 많지 않아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용기와 결단력이 (아직은) 없다는 사실 수긍 그리고, 내가 당면한 현실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성적 판단. 딱 이만큼인가 보다, 내 자아의 키...

어쩌면 이 아픔과 마주설 수 있을 만큼 내게 아직은 용기가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사람의 마음에 더 큰 병이 되듯,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순간 침범해 나를 옭아매고 있는 마음의 병, 정신적 혼란 그리고 신체적 고의 원인을 전적으로 갱년기 탓으로 돌리려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속이 적잖아 상하고, 속 후련한 진단이 아님은 사실이다. 하지만 원인 없는 병 아닌 병을 안고, 골골대느니 썩 달갑지도, 속 시원한 진단이 아닐지라도 그저 오십 고개를 앞두고 지독히 앓는 갱년기려니 치자 싶다. 피할 수 없으면 친구 삼아 얼레 주고, 달래주며 함께 서로에게 적응하려 노력하자, 그것이 무엇이던. 그러노라면 내 안의 조바심과 두려움도 녹아들겠지. 아니 그들을 품고 흐르는 시간 속에 내가 녹아들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되던 '적응이 되면 조금 더 편해질 거야'라며 스스로 위로해보자.


깊이 숨 한 번 고르며 답답한 가슴 쓸어내리려 발코니로 나가 선다. 6월의 비교적 싸한 공기가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머릿속이 씻겨지는 개운함이 느껴진다. 내 마음의 동요와는 무관하게 변함없이 아름답고, 순수하게 나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건네는 하늘도 그 공간에 있었다. 연중 해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의 태양이 손에 닿을 듯 말 듯 서서히 저물어 간다. 오늘이 지고 나면 내일부터 다시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시기로 접어든다. 짧은 시간 등장하는 하루라고 태양이 본연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고, 그 아름다움이 출현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위로가 되어주는 따뜻한 노을 풍경

인생에도 정상에서 내려올 시기가 찾아오고, 내리막길 인생이 되려 더욱 가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소 무모했을지 모르는 야심 찬 출발보다 점차 아름다운 마무리에 더 마음이 기우는 시기로 접어드나 보다.

앞만 향해 달리기에 서서히 제동을 걸며 주변을 돌아볼 여유와 배짱을 가진 중년을 누릴 수 있길 소망해본다.
행동 없이 걱정만 앞세운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다시금 돌아보고, 필요하다면 좀 늦게 당도해도 과정이 성실한 노선으로 변경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또한 소망해본다.

자연의 섭리를 새삼 깨닫고 나니 마음에 작은 희망이 다시 움틀거린다. 더불어 저 노을을 품고 서서히 사라지는 태양처럼 비록 말로 표현치 않아도 나를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존재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음에 생각이 미치며 소소한 위로가 허했던 마음을 서서히 채워온다. 꼭꼭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살며시 온기가 스며든다.


불분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버거운 삶의 무게에 숨이 차올라도, 거친 숨조차도 내쉴 수 있는 그 순간은 분명 값진 것임을 마음 깊이 새기어 보자. 숨 쉬고 있는 바로 지금이 그 무게를 극복할 또 다른 기회이기에. 잠시 지나길 바라는 슬럼프의 요인이 갱년기이던 아니던 극복한 자만이 다시금 한껏 웃을 수 있는 주인공이 될 것임을 되새기며, 마주하는 하루하루 스스로에게 '오늘도 수고 많았어'라고 칭찬해주며 최선을 다해 임해보자. 오늘 이 하루, 지금 이 순간은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니...

어느 메까지 흘러가야 비로소 "내 인생 그다지 나쁘지 않고, 나로 살 수 있었기에 감사했어"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한 마디 의미 있게 내어 뱉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나에게 아직 허락된 시간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 그러하기에 나는 소망하기를 쉬지 않으며, 품은 소망을 이루고자 땀 흘리는 삶에 분명 고귀한 열매가 열릴 것이라는 믿음 꼭 쥐고, 충실히 내 인생의 달고 쓴 모든 순간들과 마주하리라 나지막이 다짐해본다.


커버 사진 설명: 지난 이른 봄 촬영한 얼음을 깨고 봄을 알리며 피어오른 "희망"과 "위안"이라는 꽃말을 가진 스노 드롭 (Snowdrop 또는 Schneeglöckchen(獨))

매거진의 이전글 갇힌 세상에서의 자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