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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Sep 29. 2020

어쩌다 대형견으로 태어나서

  함께 일했던 친구 최는 어렸을 때부터 키가 매우 커서, 늘 친구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역할에 익숙했다고 말했다. 함께 산에 가거나 운동을 할 때면, 그녀는 늘 앞장서서 친구들이 다칠까 잡아주고 챙겨주곤 했다. 반면,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체구가 작았던 나는, 내 몸이 누군가를 지켜주고 책임져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없었다. 잘 먹지 못하고 허약해 보이는 내게 친척 어른들은 늘 말씀하셨다. “사람 구실이나 하겠니”. 그래서 나는 내가 이래 봬도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의 역할도 가능한 체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이런 나의 강박으로 인해 나는 피곤해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쉬면 나약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스무 살 어느 날 밤, 귀가하던 길에 이런 일이 있었다. 역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데 고등학생 한 무리가 나를 부르며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낯선 친구들이 나를 필요로 할 줄은 전혀 몰랐기에 그 사실을 모른 채 몇 걸음을 갔나 보다. 결국 내 앞을 막아선 그들은 내게 물었다.

  “너 몇 살이냐?”

  “스무 살인데..... 요...”

  “웃기시네. 민증 까 봐.”

  으슥한 골목도 아니요, 지하철 역 앞 2차선 도로가 있고 유동인구도 꽤 되는 곳에서 그들은 왜 내 법적 나이를 확인하려 하는 것일까. 이미 첫마디부터 기선을 제압당한 나는 이들과 더 말을 섞을 자신이 없었고, 민증을 집에 두고 왔다고 둘러대며 집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내게 끝까지 거짓말하지 말라며 위협했다.  


  30대에 미국으로 몇 달 출장을 갔을 때에는, 마트에서 맥주를 살 때마다 신분증 확인을 요구받았다. 출장 가기 전 친구들이 이런 농담을 했다. “너 정도면 미국에서는 ‘thin(날씬한, 마른 체형)’도 아니고 ‘skinny(비쩍 여윈)’야. 아니다, 아예 kids다 kids.” 미국에 가보니, 실제로 그랬다. 서양인들 사이의 나는 어린이 사이즈였다.  


  가만히 있으면 만만한 존재가 되는 경험은 나를 민감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초면에 반말을 듣거나, 애 취급을 받으면 짖기 시작했다. 마치 낯선 존재에게 컹컹 짖으며 으르렁대는 소형견들처럼.


  동네 이웃 박의 강아지는 소형견이다. 인형 같은 외모를 보고 귀엽다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있는 힘껏 짖는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릴까 봐 무섭다며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그게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로 들린다. 박의 강아지가 경계를 풀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모든 소형견이 이와 같진 않지만, 나는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반면, 우리의 대형견 튼튼이에게는 귀엽다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튼튼이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귀엽다는 말보다 물면 어떻게 하려고 이런 큰 개를 키우냐는 듯한 동네 어르신들의 핀잔을 더 많이 듣는다. 특히 튼튼이는 사고를 당해서 구조된 유기견으로, 몸에 흉터가 많다. 큰 체구와 흉터의 콜라보는 처음 보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킨다. 마치 튼튼이가 성질이 사나워 싸우다가 다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튼튼이는 낯선 이를 향해 짖는 법이 없다. 으르렁대는 모습도 보여준 적이 없다. 나도 작은 개를 키워봤고 주변에도 개를 키우는 사람이 많아 여러 개를 봤지만, 튼튼이처럼 안 짖는 개는 처음이다. 작은 개들이 놀자고 달려들어 튼튼이 얼굴을 물어대도 공격하지 않는다. 귀찮아 하지만 놀아준다. 튼튼아 어쩌다 대형견으로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니. 그래서 우리는 행인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산책을 한다. 잘 모르는 큰 개에 대한 공포심도 이해가 가지만, 튼튼이가 외모 때문에 손가락질받으면 서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만남에 튼튼이의 순한 성격을 알아봐 주는 이들이 참 고맙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튼튼이는 활짝 웃으며 배를 깐다. 여전히 짖지는 않는다.

튼튼이는 왜 안 짖을까. 풀 길이 없는 나의 의문.


  새삼 나의 친구 대형인 최가 생각난다. 그녀도 몸이 크기 때문에 겪은 불쾌한 경험이 많았을 거다. 대형인 최도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여렸다. 여자 동료들은 거의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남자 동료들은 두 부류가 있었다. 그녀를 굉장히 무서워하는 남자 동료들과 그녀와 비밀까지 나누는 남자 동료들. 전자는 그녀의 겉모습만 보았고 후자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까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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