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계여행을 가고 싶긴 한데 튼튼이 가고 나면, 그때 가려고.”
여행은 가고 싶지만 튼튼이를 두고 떠나면 튼튼이가 감당해야 할 힘듦이 있으니, 튼튼이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로 본인의 계획을 미룬다는 것이다. 떠나고 싶을 때면 당장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는 삶을 바라 왔던 내 입장에서 흔쾌히 동의하기는 어려운 말이었다. 튼튼이가 귀엽긴 하지만, 나의 인생계획을 바꾸고 자유를 포기할 만큼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내가 아는 J는 나만큼이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여행에 대한 갈망도 튼튼이에 대한 사랑 앞에서 잠시 접어두는 모습을 보면서 궁금했다. 접어야만 하는 갈망 때문에 생기는 아쉬움을 달래줄 만큼, 튼튼이와 함께하는 삶과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개를 귀여워하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내가 원할 때 애정을 나누는 것과 나의 생활공간, 일상, 인생 계획 모두를 수정하는 것은 간극이 컸다. 튼튼이가 귀엽긴 하지만, 나는 개의 털과 냄새가 불편했다. 나는 자유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을 챙기느라 다른 존재의 생명 유지를 위해 할애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저렴한 방을 얻는 대가로 J의 출장 기간 동안 튼튼이에 대한 ‘케어’를 지불했다. 지극히 거래에 의한 행동이었다. 튼튼이와 나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었다. 우리는 마당에 울타리를 치고 튼튼이 집을 만들어주었다. 튼튼이가 내 공간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개와 처음 보는 순간부터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나는 사랑에 빠지는데 시간이 걸리는 타입이었다.
갓 태어난 동생을 만났을 때, 이 아기가 나의 ‘동생’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낯설어하는 첫째 아이들이 있다. 동생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저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함께 나누는 기쁨과 추억이 쌓여야 비로소 동생을 사랑하게 된다. 나도 그런 아이였다. 이제 언니가 되었으니 동생을 보살피고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동생이 뭔데 내가 불편을 감수해야하느냔 말이다. 어른들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동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동생이라는 게 그렇게 갖기 어려운 귀한 존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동생이 정말 소중한 존재이며, 기꺼이 내 것을 나누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동생이 태어나고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동생과 나만이 공유하는 추억이 생기고, 동생과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기면서 서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동생이라는 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부모를 가지고, 같은 환경에서 자란 둘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 우릴 묶어주었다. 같은 걸 먹고, 같은 곳을 다녔지만 내가 갖지 못한 생각과 성향을 가지고 있는 동생이 나와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 지금은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튼튼이가 내 인생에서 떼어낼 수 없는 존재가 되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튼튼이를 산책시키는 것이 숙제였다. 30kg에 육박하는 튼튼이는 나보다 힘이 세고 나는 튼튼이를 다루는 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우리의 산책은 매끄럽지 못했다. 집 문을 벗어나자마자 튼튼이는 돌진하기 바빴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튼튼이를 데리고 나가는 게 부담스러웠다. 튼튼이는 입장에서는, 하루 종일 혼자 있다가 겨우 한 번 가는 산책이니 흥분이 주체가 안 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기다려온 시간이겠는가. 그걸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튼튼이가 만족할 때까지 무언가를 해줄 여력이 내겐 없었고, 어떻게 해야 튼튼이가 좋아할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튼튼이는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고 내가 하는 말을 듣지도 않았다. 우리는 교감을 하지 못하고 각자 원하는 것만 찾았다.
J가 육지로 일을 하러 가는 횟수가 반복되면서 튼튼이와 나 둘만의 시간이 쌓여갔다. 우리는 아주 조금씩 가까워졌다. 산책은 여전히 고역이었지만, 나는 조금씩 튼튼이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기뻐하는 표정이 유난히 예뻐 보여 간식도 자주 챙겨주게 되었다. 그날은 J가 아침 비행기로 육지에 올라가는 날이었다. J는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새벽같이 일어나 튼튼이를 산책시켰다. 나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부지런을 떤 것이다. 점심 즈음 나는 외출하는 길에 튼튼이에게 간식을 주려고 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울타리 문이 열려있고 튼튼이가 사라져 있었다. 눈을 의심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싶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사람은 가장 먼저 그 현실을 부정하나 보다.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이내 정말 큰일 났음을 알았다.
“튼튼이가 없어졌어!!!!” J에게 전화했다.
“헐!! 내가 아침에 산책하고 문을 잘 안 잠갔나 보다!! 일단 목줄이랑 간식 하나 들고 다니던 산책길로 가봐!!!” J의 실수였다.
난생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키우던 개가 집을 나가다니. 나는 하라는 대로 목줄과 간식을 들고 자주 가던 산책길로 뛰었다. 늘 똥 누던 공터, 고양이를 관찰하던 곳을 뒤졌는데 없었다. 이대로 못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신이 없었다. 어디로 갔을지 도무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집에 돌아와 줄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집을 나간 개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도 아는 게 없었고, 튼튼이는 어떤 성향의 개인지도 잘 몰랐다. 사고가 난 건 아닐지, 개장수에게 잡혀간 건 아닐지, 튼튼이를 잃게 되면 상실감에 빠질 J를 옆에서 어떻게 지켜봐야 할지도 걱정이 됐다.
온갖 생각이 교차하던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말 달리는 소리가 나면서 내 눈앞에 튼튼이가 나타났다. 샅샅이 살피며 지나온 길엔 정말 아무도 없었는데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걸까. 아마도 내 눈길이 닿지 않는 깊은 곳까지 가서 놀고 있다가 뛰어나온 것 같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왔다는 것을 알고 나타나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튼튼이에게 나는 특별한 존재구나. 놀다가도 나를 찾아와 주는구나. 내가 반가웠구나.
목줄을 하고 산책하던 때보다 훨씬 생기 있고 힘차 보였던 튼튼이. 목줄 없이 마음대로 놀 수 있게 해 주면 좋아한다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행할 마음까지는 갖지 못한 나였다. 자유롭게 뛰어다니면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직접 보고 나니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줄이 풀려도 영원히 떠나버리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튼튼이와 나 사이에 목줄이 있기 때문에 튼튼이가 여기 있는 게 아니라, 튼튼이도 나와 함께 지내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목줄로 억지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어지는 관계가 되고 있었다. 튼튼이가 먼저 마음을 보여준 덕분이었다.
튼튼이의 행복이 내 행복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J와의 약속 때문에 하는 산책이 아니라 튼튼이의 행복을 위해서 산책을 하게 됐다. 어디를 데려가면 좋아할까,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뛰어놀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 찾게 되었다. 튼튼이가 하루의 에너지를 다 쓰지 못하고 심심해하는 날에는, 나 혼자만 좋은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튼튼이가 표정과 꼬리로 하려는 말을 들으려고 노력했고, 튼튼이는 내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쉬는 날에는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시간을 썼던 내가, 이제는 튼튼이를 위해 시간을 쓴다. 아, 튼튼이만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튼튼이와 내가 함께 행복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건 일방통행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은 사랑을 불러왔다. 사랑은 안된다고 생각했던 걸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는 어느새 내 공간을, 일상을, 인생 계획에 튼튼이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아마 튼튼이만 혼자 두고 세계여행을 훌쩍 떠나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