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에서 시작된 호텔리어의 선택적 미니멀 라이프
강릉에 있는 호텔에서 근무하기 위해 호텔방에서 지낸 지 벌써 2년째다.
처음엔 하루에 10만 원이 넘는 호텔방에서 매일 거의 공짜로(기숙사 객실은 한 달 사용료가 하루 객실비도 되지 않는다) 살 수 있다니 뭔가 특권을 누리는 기분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러워하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매일 침대 시트는 갈아주는지, 하우스키핑을 해주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래에서 확인 가능하다.)
내 방은 8.3평이다. 2인 1실을 쓰는 직원도 있지만 나는 혼자서 방을 쓴다. 사실 며칠밤 머물기엔 좁지 않지만 이 곳에서 매일 산다고 생각하면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1. 조리가 불가능하다.
레지던스형 호텔이 아니기 때문에 주방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요리를 할 수 없다. 냄비 포트에 라면이라도 끓여먹으려면 세면대에서 설거지를 해결해야하기 때문에 포기. 결국 용기까지 버릴 수 있는 편의점 즉석조리식품 정도만 해 먹는다. 호텔 내 직원식당이 따로 있어 끼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요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우 아쉬운 점이다.
2. 방에서 빨래를 할 수 없다.
호텔 지하에 위치한 직원용 세탁실을 이용하거나 외부 빨래방에서 해결해야 한다. 빨래와 건조를 위해 몇 번이고 왔다 갔다를 반복해야 하는 점이 불편하고 귀찮아 수건은 말려서 한 번 더 쓰고 빨래는 한 번에 모아서 세탁한다.
3. 옷장이 작다.
접객 부서는 아니지만 호텔에 입사하기 전에 호텔리어답게 입고 싶어서 출근복을 여러 벌 샀다. 처음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캐리어에 옷을 담아 나르다 보니 어느 순간 옷장이 꽉 차서 더 이상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결국 잘 입지 않는 옷과 계절이 지난 옷들은 다시 서울로 돌려보냈다.
4. 이 밖에도...
화장대도 없고, 신발장도 없고, 책장도 없고, 이외 수납공간들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렇게 부족한 수납공간 덕분에(?) 나의 반강제적 미니멀 라이프가 시작됐다. 아무리 기숙사지만 호텔스러움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살 때도 딱히 맥시멀리스트라고 할 만큼 물욕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산책을 하다가 또는 친구를 기다리다가 들어간 상점에서 예쁘니까, 나중에 필요할 것 같아서 등의 핑계 삼아 충동구매가 잦은 편이었다.
아마 나 같은 사람 많을 것 같다. 분명 물건에 집착하는 사람도 아니고 둘러보면 산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카드 내역을 보면 필요 이상으로 항목이 길고 금액이 많이 나와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의심의 여지없이 나다. 내가 모두 산 게 분명하다. 계획 없는 나의 또 다른 자아가 저지른 것이 확실하다.
그런 내가 호텔방에서 살면서 충동구매가 자연스럽게 조금씩 줄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지. 놓을 데가 없으니까. 미리 쟁여두는 습관도 자연스럽게 줄었다. 대신 이 작은 호텔방에 과연 내가 진짜 두고 싶은 물건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내가 이 방에서 주로 무엇을 하는지'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난 이 방에서 주로 차를 마시고 휴식을 취하고 책을 읽고 명상과 요가를 한다. 당연히 그 일을 하는데 많은 물건은 필요없다. 몇 가지의 차와 작은 다기, 책, 요가매트와 블록, 인센스 정도다. 책장 넘기는 맛을 포기할 수 없어 책을 꾸준히 사다 나르다 보니 책상에 쌓여있는 책들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물건이 많지 않은 편이다. 쓰지 않는 물건은 거의 없다. 완벽한 미니멀리스트라고 할 수 없지만 내가 만지지 않는 물건은 거의 없다.
그렇게 꼭 필요한 생필품과 함께 휴식을 위한 몇몇의 아이템들이 있는 나의 방을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인지 보인다.
살다보니 한 사람이 사는데 그렇게 큰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가지 불편한 점에 익숙해지니 8.3평은 지금 필요한 물건을 다 놓고도 남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호텔방에 살면서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인 침대 시트 교체와 하우스키핑.... 내가 한다. 처음 객실에 왔을 때 침대 매트리스만 덜렁 있어서 시트와 이불, 베개까지 모두 내가 장만했다. 물론 내가 호텔방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최대한 호텔스러운 걸로.
이상 호텔방 살이가 궁금한 분들에게 털어놓는 작은 넋두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