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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두둑 Oct 22. 2021

어느 날 해가 서쪽에서 떴다

서울 깍쟁이의 만만치 않은 강릉살이 기록

나의 강릉 사랑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당연한듯 했다. KTX 타고 한 시간 반이면 서울에 닿을 수 있어 주말에는 가족과 남자친구, 친구들을 만나러 종종 서울에 나들이를 갔다. 강릉과 서울을 오가는 여정은 언제나 설레고 기차 밖 풍경은 언제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서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놀러 간다고 생각하니 서울의 모든 것이 세련되고 멋져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주말을 보내고 일요일 밤 강릉 호텔 방에 들어왔는데 느닷없는 쓸쓸함이 어퍼컷을 날렸다. 강릉엔 내가 그토록 원했던 자연환경과 공기, 그리고 바다가 있었지만, 밥벌이의 고단함은 여전했다. 365일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호텔에서 근무하다 보니 퇴근 후는 물론 주말에도 끊이지 않고 업무 카톡이 울려댔다. 그렇게 일터가 주는 스트레스는 내가 어디에 있어도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어느 날은 심한 감기 몸살로 출근도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누워 있는데 병간호는커녕 죽 한 사발 챙겨줄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외로움이 치밀어 올라왔다. 가족, 친구, 애인 다 두고 혼자 여기 와서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시간이 지나고 몸은 회복되었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우울한 미열이 남았다. 우울함은 정말 감기 같아서 한 번 찾아오면 앓지 않고서는 넘길 수 없다. 그 어둡고 무거운 마음을 낫게 해주는 완벽한 치료제도 없다. 


게다가 관계에 피로감을 느껴서 서울을 떠났는데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관계에 목마름을 느끼는 모순적인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서울깍쟁이에 대한 반감이 있으면서도 서울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왠지 나는 변방으로 좌천된 사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서울살이의 치열함에서 벗어나려고 도망쳐왔는데 내가 너무 느슨하게 지내고 있는 건 아닌가, 뒤쳐지고 있는건 아닌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난 서울에 미련도 버리지 못하고 강릉에 완벽하게 정착하지도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오랜만에 퇴근 후 바다를 보러 갔다. 파도가 섭섭하다는 듯이 철썩거리고 있었다. 내가 서울을 떠나던 날 섭섭하게 일렁이는 한강이 생각났다.


나에게 힐링의 도시였던 강릉. 나는 그 곳에서 다시 상처받고 있었다. 마음의 병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병이 몸으로 전이되기에 이르렀다. 스트레스를 많은 받은 날 귀가 너무 아파서 잠을 설쳤다. 이빈후과에 가보니 중이염이라고 했다. 얼마 후 잠을 자다가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을 벌벌 떨며 식은땀을 잔뜩 흘려 꼬박 이틀을 고생했다. 어느 날엔 아침에 일어나니 입술이 잔뜩 부어있었다. 모기에 물린줄 알았는데 며칠이 가도 붓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지나 혀가 너무 아팠다. 마치 뾰족하고 떫은 감을 먹은 듯한 느낌이 하루종일 지속되어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자극적인 음식을 입에 댔다가는 바늘로 혀를 찌르는듯한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병원에 가보니 구강작열증후군이 의심된다고 했을 뿐 원인을 알 수 없다며 항생제만 처방해줬다. 난생 처음 위염도 생겼다. 살면서 속이 쓰리다는 감각을 모르고 살았는데 위염은 위가 아스팔트 바닥에 쓸린 느낌이었다. 어느 날은 목에 뭔가 계속 걸려있는 느낌이 들어 음식을 삼키기 불편했다. 혹시 갑상선에 문제가 있는건가 싶어 병원에 갔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견만 받았다. 지방의 작은 병원이라 의사가 오진을 한 것은 아닌가 믿을 수 없어 서울에 가서 검사를 받았지만 역시 멀쩡했다. 그럼에도 목에서 느껴지는 이물질이 더 커져 혹시 자는 동안 숨을 쉬지 못하면 어쩌나 며칠동안 불안감에 사로잡혀있었다.  


나중에 심리치료에 대해 공부하며 어쩌면 당시 나는 정신적 요인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신체화 증상' 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신체화 증상은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신체적 불편감을 질병으로 해석하고 의학적 도움을 청하는 경향으로 정서가 지나치게 억압되거나 극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될 수 있다. 


당시 온전히 내 선택으로 결혼도 미룬 채 강릉으로 왔고, 서울에서 직장생활 할 때 비하면 야근도 안하고 그렇게 좋아하는 바다 실컷 보면서 편하게 지내고 있는데 힘들다고 불평할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데 힘들다고 느끼는건 내가 마음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라고. 


사실 내 마음은 해이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서진 것이 분명했다.

부서진 마음은 장소를 옮긴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부서진 마음 조각 조각을 다시 들여다보고 맞추는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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