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꿈 중의 하나가 내 명의의 부동산을 갖는 것이었다.
내 이름으로 된 어떤 것... 어릴 적 신해철 님의 노래 '나에게 쓰는 편지'을 들으며 난 그런 어른, 중년이 되지 말아야지 했지만 나 역시 중년이 되며 돈, 큰 집, 빠른 차,(여자는 빼고), 명성, 사회적 지위 등을 부러워한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지인들의 아파트 분양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도 내 명의의 부동산을 갖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기회가 왔다. 나보다 훨씬 부동산을 잘 아는 지인이 마침 부동산을 분양받는다고 했다.
초기 계약금이 얼마 되지 않았고, 다행히 그 정도 돈은 내가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정도였다. 게다가 2년간 중도금도 무이자라 했다. 2년 후, 건물이 완공된 후 갚아야 할 잔금과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은 제대로 생각지도 못한 채 들뜬 마음으로 생애 첫 부동산 분양 계약을 했다. 이른바 지식산업센터. 나중에 내가 들어가 상담실을 운영하면 된다는 마음도 있었다. 1시간 가까이 되는 거리도 왠지 가깝게 느껴졌었다.
20대, 대학원을 다니며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공인중개사 공부를 잠깐 했다. 지도교수님 몰래 학원을 다니고, 책을 숨겨두고 실험실에서 공부를 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공부는 훨씬 어려웠고, 세법, 공법은 정말 무슨 말인지 듣고도 보고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당시 학원 클래스에 내가 가장 젊은 사람이었고, 다들 지금의 내 나이 40 이상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 아줌마, 아저씨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 낮에 학교를 갔다가 저녁에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는 것도 나는 버거웠다. 알아들지도 못하는 용어들을 대충 외우는 척 모의고사를 봐도 간신히 50점대를 넘기곤 하여 과락을 면할 정도의 점수만 되었다. 민법이나 부동산학 개론 등의 과목에서 충분한 점수를 받으면 아주 간신히 합격점수를 받을 수 있을 정도는 될 거 같았다.
하지만, 그 해, 유난히 어려웠던 시험 덕분에 평소보다 합격율이 1/10의 정도로 아주아주 낮았다. 당연히 나도 불합격이었다. 뉴스에서도 난리가 났고, 많은 항의가 있었는지 그 해 5월 재시험의 기회가 주어졌다. 시험이 너무 어려워 사실 난 재시험도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남편이 된 남자친구는 전공과도 한참 먼 그 공부를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했다. 시험 날짜가 남자친구 여동생의 결혼식날이었다.
시험을 보러 가야 할지, 남자친구 여동생의 결혼식에 함께 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남자친구 여동생의 결혼식에 간다는 것은 그쪽 집안에 인사를 다 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남자친구는 어차피 시험합격해도 나 같은 성향의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그러니 그냥 결혼식에 함께 가자고 한다.
고민했다. 사실 내가 그 남자와 결혼을 할지 말지도 모르는 마당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막상 재시험을 보고, 시험이 쉽게 출제가 된다고 해도 합격의 보장은 없었다. 알게 모르게 지인들은 내가 몰래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당시만 해도 공인중개사는 거의 중년어른들의 자격증이었고, 웬만한 분들은 자격증을 다 따는 쉬운 분야로 생각을 했다. 나 또한 공부를 좀 하면 자격증 정도는 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공부를 하니 만만한 공부가 아니었고, 새삼 그 공부를 하시는 어른들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또 시험에서 떨어지면 자존심도 상하고 창피할 거 같았다. 다행히 시험을 못 보는 핑계가 생겼으니 시험을 포기하고 남자친구 여동생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그리고 지금은 동갑내기 시누이가 되었다.
그렇게 부동산에 대한 공부를 좀 했던 경험이 있으나 사실 하나도 기억도 안 나고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까막눈 수준이다. 그런 내가 부동산 계약을 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나의 오래된 바람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고, 수중에 돈도 없으면서 욕심을 부린 셈이다.
계약 당시엔 대출 이율이 2% 정도 대였다. 분양 후 임대를 하면 대출 이자를 갚고도 몇십만 원은 내가 수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친한 두 선생님과 난 함께 계약서를 쓰고 나오며 뿌듯했다. 내 이름으로 된 부동산을 갖게 되었고,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를 이룬 셈이었다. 그리고 중도금 무이자가 실행되는 2년간 그저 행복한 마음이었다. 저 멀리 내 방이 있다는 것이.
2년이 지났다. 건물은 완공되어 가고, 시공사에서는 잔금을 준비하라 한다. 중도금을 대출받았던 은행에서는 무이자 기한이 끝나가니 중도금을 갚아야 한다는 우편물과 문자가 왔다. 분양계약서를 보니 내가 착각한 부분이 있었다. 잔금이 내가 생각한 금액의 거의 3배 가까이나 되었다. 그리고 중도금 가구, 가전 인테리어, 취등록세 등등 잡비까지 포함하니 억대 이상의 돈이 필요한 것이었다.
생각지 못한 금액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 수준에서 해결가능한 자잘한 돈은 일단 정리를 해 나갔다. 그러나 몇십만 원, 몇백만 원은 무리해서 해결이 가능하지만 억대의 돈은 해결불가였다. 몇 군데 은행에 문의하니 DSR인지 뭔지 때문에 아파트를 담보로 추가 대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그 건물에서 연계한 은행에서 대출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도 몇천의 추가금액을 더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 달 이상 머리가 아프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2년간 꿈을 이룬 기분에 행복했던 나는 사라지고 한숨과 불면증이 생겼다. 머리만 대면 잠을 자던 내가 밤을 꼴딱 새우는 일이 생겼다. 물론 걱정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찾아보고 나름대로 해결책을 계산하느라 머릿속은 바쁘고 가슴은 갑갑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은 나고, 늙어가는 기분이었다.
조만간 다시 은행에 가야 한다. 이것저것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서 남편과 함께 방문해야 한다고 한다. 나의 욕심으로 비롯된 일이기에 난 남편에게도 한동안 아주 조곤조곤, 친절해졌다. 함께 계약한 다른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그 선생님도 요즘 남편에게 아주 친절한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우린 한동안 수다를 떨며 어이없는 웃음으로 깔깔거렸다.
오랜 바람과 욕심으로 계약한 부동산. 너무나 갖고 싶었던 내 명의의 부동산.
나는 나의 집 가까이 작은 사무실을 운영하게 되었고, 한 시간(출퇴근 시간에는 두 배)이나 걸리는 그곳에 출퇴근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마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 누군가에게 임대가 가능해지길 바랄 뿐이다. 아마 임대료를 받아도 한참 높아진 이율 덕분에 내 수중에 남은 건 없을 것이고, 임대가 되지 않는다면 높은 이자와 관리비까지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뉴스에서 영끌해서 아파트를 샀다는 사람들이 높아진 이자를 감당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례들을 많이 보았다.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열심히 일해서 저쪽 구멍을 메워야 하는 현실. 계약자 이름으로 설레던 2년에 대한 가혹한 대가가 참 버겁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작은 부동산조차 사치였던 것일까?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작은 부동산이 가치 있는 투자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랄 뿐... 창 햇살이 잘 들고, 앞에 하늘정원이 보이는 그 공간이 너무 마음에 들지만, 아주 빨리 좋은 주인이 나타나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