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읽고-
쉰이 넘어 갑자기 부모님만 만나면 사진기를 들이대는 나를 발견한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아마도 나의 내면에선 언제고 찾아올 그날을 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아버지에게 이제껏 살아온 날을 기록해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드렸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안 계셨을 때, 아들딸에게 그리고 손자 손녀에게 아버지의 살아온 인생이 본보기가 되고,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선물이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뒤늦게 수업 핑계로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다시 읽고 제목부터 눈에 확 띄는 ‘달려라, 아비’를 고르게 된 것 같다. 물론 김애란의 간결하고 편안한 문제를 이미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맛보았기 때문에 선택하는데 주저하거나 하는 걸림돌은 없었다.
‘달려라, 아비’라는 제목에서부터 작가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아빠’라고 했다면 아빠와의 사이가 가까울 뿐만 아니라 아빠에 대한 거리낌 없는 사랑을 하고 있음을 예측할 수 있고, ‘아버지’라고 했다면 다소 마음의 거리는 느낄 수 있다 하더라도 존경심과 가볍지 않은 진중한 사랑의 관계를 느꼈을 것 같다. 그러나 작가가 ‘아비’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은 주인공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또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어쩐지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과 그런 아버지를 어쩌지 못하고 떼어낼 수 없는 굴레처럼 여지고 있을 것만 같은 자식들의 마음.
다른 사람에겐 ‘양반’이지만 어머니에겐 항상 ‘바보’ 같은 남자. 언제고 어머니와 어긋나기만 하는 아버지, 미안해서 못 오는 사람, 미안해서 자꾸 더 미안해해야 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 나중에는 정말 미안해진 나머지 못난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42쪽), 자신이 잘못하고도 다른 사람이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진짜 나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사람. 어정쩡하게 편지로 자신의 죽음을 알린 아버지(54쪽). 그러면서도 단 한 번 어머니를 사랑하기 위해 죽자 살자 뛴 아버지.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얼굴이 점점 하얘지다가(45쪽) 집을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향한 주인공의 본심이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적 상황의 주인공이 아버지를 '달리는 사람'으로 상상한다는 상황 설정도 흥미로웠지만 결국 자신을 태어나게 해 준 아버지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이 주인공에게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버지를 계속 달리게 만든 것은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미움과 원망이 있는 반면 달리는 동안 선글라스를 씌워드릴 생각을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에게 선글라스를 씌워드리는 상상으로 주인공은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를 더 자유롭게 보내드렸다. 미움의 반대는 사랑이라고. 주인공 역시 아버지를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두고 내내 사랑해왔던 것 같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론 매몰차 보이고 냉정해 보이지만 어머니 역시 아버지가 '예뻤다' 했다는 그 말 한마디가 쓰인 편지를 쓰다듬거나 ‘잘 썩고 있을까?’라며 그리워하는 장면에서 남편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엄마를 위해서 미국에서의 교통사고의 진짜 원인을 숨긴 채 거짓말로 아빠의 죽음을 알려야 했던 복잡한 주인공의 마음을 읽고 있자니 우리네 삶도 이렇게 가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해결을 가져올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떠올려 본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딸의 입장이 백 번 천 번 이해가 되는 장면이다.
많은 연예인들이 부모의 빚투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는 것을 본다. 연예인이 죽자 생전 쳐다보지 않던 엄마가 나타나 연금이니 재산을 가져갔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부모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낳아주기만 하고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사람들을 부모라고 인정하고 감사해야 할까? 내가 주인공이라면 그런 아버지를 용서하고 죄책감 느끼지 말고 잘 가시라 그렇게 보내드릴 수 있을까?
‘달려라 아비’에 실린 여러 단편에는 다양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전파상을 하며 몸이 망가져 가면서도 때론 엉뚱하게 가끔은 엄하게 아들들을 대하는 아버지가 나오고, 불꽃이 너를 나았다, 엄마와의 입맞춤에서 나왔다는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모를 추억을 이야기하는 아버지가 나오고, 공원에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의 가슴 아픈 재회 이야기, 인연을 끊었음에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딸을 찾아온 텔레비전 중독자 아버지가 등장한다. 단편마다 엄마의 부재가 이야기의 밑바탕을 채우고 가족을 등한시한 아버지들에 대한 무심하고 아픈 아들딸이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이런 아버지들의 모습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삶에 무릎 꿇고 힘겨운 시간을 보낸 아버지들의 모습일까, 가족의 무게를 견뎌내야 하는 외로운 아버지들의 모습일까?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된 그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의 아버지가 겨울이면 털신과 내의를 마련하고 눈길을 만들고, 자신의 일탈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보여준 것과 너무도 대비되는 ‘아버지’들이었지만 그런 ‘아비’에게도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그럴 만한 일이 있었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시간이 주는 이해심에 대한 넓은 아량 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단편들이 유독 많았다. 백사장, 수족관, 물고기들을 등장시키거나 기계적인 일상생활을 상징하는 현대 문명의 편의점이 등장하고 사회로부터 스스로 소외되는 인물들도 많이 등장했다. 그래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달려라’로 함축시켜 놓은 건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은 희망의 한 자락 인지도 모르겠다. 각기 다른 작품이었지만 이어질 듯 끊어지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편들의 집합체. '달려라 아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