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첫 기억은 엄마가 약수물을 떠 오는 모습이다. 물 두 통을 양손에 들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엄마. 엄마의 발소리를 들은 아빠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물통을 하나 받아 들었다. 아빠는 뚜껑을 따고 약수물을 엄마에게 부어버렸다. 엄마는 의식을 잃었다. 아빠는 나를 불러 차가운 물 한 그릇 떠오라고 했다. 덜덜 떨면서 냉장고를 열어, 보리차물이 들어있는 델몬트병을 꺼냈다. 큰 스뎅그릇에 부어 아빠에게 가져다주었다. 손이 떨려서 3분의 1 정도는 바닥에 쏟은 것 같았다. 아빠는 엄마 입 속으로 찬물을 천천히 부었다. 엄마는 물을 뱉어내며 정신을 차렸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외출을 한다던 엄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서른이 다 되어서야 이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형과 술을 마시다 이때 얘기를 나눴다. 형은 내 기억이 잘못됐다고 했다. 다섯 살 위인 형은 엄마가 집 나가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했다. 그날 얘기를 해줬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때 아홉 살, 열 살 쯤이었을 형 기억이 맞을 거 같은데. 그렇다면 내 기억은 진짜 있었던 일일까. 아니면 꿈이었을까? 망상이었을까? 꿈이나 망상이라면 나는 왜 그런 장면을 그렸을까.
나는 우리 엄마 아빠를 그런 관계로 생각하나 보다. 아빠가 엄마의 의식을 잃게 하고, 억지로 정신 차리게 하는. 그리고 엄마는 도망가는. 형과 술 한 잔 하며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눈 이후로 내 기억을 믿지 않는다. 형, 동생이랑 얘기해 보니 과거에 대한 내 기억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았다. 기억하기 싫었던 건지 잊어버린 것도 많고, 시간 순서도 뒤죽박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