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라도 많이 찍어뒀다면, 기억의 조각을 맞추는데 도움이 될 텐데. 우리 가족은 언제부턴가 사진을 잘 찍지 않았다. 사진이란, 사진을 찍은 그 시간이 행복했다는 증거물인 경우가 많다. 냉정하게 우리 가족은 웃으며 사진 하나 찍을 수 있을 정도의 행복한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사진 찍는 게 어색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참 행복했나 보다. 인화된 사진이 아주 많았고, 보고 또 봐도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재밌었지만, 지금 그 사진 속 우리 가족을 떠올리면 참 낯설다. 불행하게도, 우리 가족은 앞으로 없을지도 모르는 행복의 증거물을 모두 잃어버렸다. 우리 가족은 떠돌이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사를 정말 많이 다녔다. 그런 처지에 사진 따위는 우리를 무겁게 하는 짐일 뿐이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우리 집은 경남 마산의 5층짜리 아파트였다. 거기 살 때, 엄마가 집을 나갔다. 그러다 아파트 단지 근처 주택으로 이사했다. 온 집에 빨간딱지가 붙었던, 아빠가 다락방에 숨어 살아야만 했던 집이었다. 월세까지 밀려 쫓겨난 후에는, 아빠가 일하던, 마산에서도 촌구석이었던, 하수처리장 옆 관사에 살았던 적도 있다. 재수가 옴 붙었는지 아빠의 발령으로 거기서도 금방 나가야 했다.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지내다가, 나중에는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찜질방, 모텔 옥탑방까지 내몰렸다.
찜질방은 오히려 낫지. 모텔에서 등하교를 하는 것은 학생이었던 우리 삼 남매에게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 친구들도 많이 놀러 다니는 댓거리 한복판에 있는 달빛모텔. 나는 그곳에 들어가는 걸 친구들이 볼까 봐 오락실에 한참을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들이 모르고 있다고 믿으며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언제부턴가 어느 일진 무리가 나를 보며 낄낄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언젠가 나를 불렀다. "어이! 달빛모텔!" 너무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가, 힘겹게 걸음을 내디뎠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얼마나 빨개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 가족 모두 각자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그래서 2025년 서울, 내가 살고 있는 이 좁은 원룸은 '달빛'이 들어오지 않는 집이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