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관하여
어릴 때 우리 집은 전주 영화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집 앞 골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극장들이 늘어선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회전목마와 바이킹 정도만 있는 조그만 놀이동산도 있었고, 내 단짝의 엄마가 하는 미용실도 있었다. 그 단짝은 송 씨였고, 남자애였고,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친구였는데, 내가 절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를 단숨에 쓱싹 그리기도 했다. 나는 그 애의 그림 실력이 부럽고 멋져 보였다. 나도 그림 그리는 걸 원래 좋아했었는지 아니면 그 애가 멋져 보여 따라 하고 싶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 무렵 아빠에게 미술학원을 보내 달라고 했다.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며칠 만에 나가지 않았지만.
그때는 CGV 대신 피카디리 극장이 있었고 거대한 전광판 대신 화가가 직접 붓으로 그린 대형 영화 그림이 영화관 전면에 걸려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그 영화 그림을 교체하는 인부 아저씨들이 높은 사다리를 타는 풍경을 보며 자랐다(라고 적고 보니 기억 왜곡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 아날로그적이고 비효율적인데 20년 전만 해도 정말 그랬다). 그 거리를 떠나고 나서도 나는 전주의 다른 동네에서 계속 살았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면 언제나 영화의 거리가 중심지였으므로 나는 고향 안의 또 다른 고향에 들르는 기분으로 매번 영화제에 행인으로 참가했다.
내가 고3이었을 때에는 유학생이던 아현이가 한국에 한 달 들어와 있던 기간과 겹쳐, 나는 아현이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해 아현이 다니는 교회에 매주 따라갔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아현이네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예배가 끝나면 아현이네 집에서 TV를 보며 아현이가 해준 김치찌개와 밥을 먹었다. 마침 또 그때는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이어서 우리는 공부도 미루고 일요일에 축제를 보러 나갔다. 열기와 타지인이 가득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색만 보아도 저 사람이 전주 사람인지 타지인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전주에서는 평소에 거의 볼 수 없는 외국인들도 영화제 기간 때만 되면 거리에서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다는 것도 왠지 들떴다. 내 고향에서 이렇게 신나고 세계적인 축제가 열린다는 것에, 그것이 또 예술 분야라는 것에 나름의 자부심이 들었다. 아현과 나는 축제가 열린 그 거리를 마구 돌아다니다가 클래지콰이의 라이브 공연을 보고, 야외 극장에서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까지 본 뒤에 헤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학교를 졸업한 나는 그해 바로 전주국제영화제 자원봉사자인 지프지기에 지원했다. 취업하기 전에 꼭 지프지기를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축제가 열리는 거리를 거닐 때마다 보이던 노란 잠바를 입은 그들. 삼삼오오 무리 지어 다니며, 늘 미소를 잃지 않고, 분명 돈도 안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즐거워 보이는. 축제를 사람으로 형상화한다면 딱 저들일 것 같은. 행인이 팜플렛을 들고 뭔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면 먼저 와서 뭘 찾느냐고 친절하게 물어봐 주는. 그 활기와 발랄함을 몇 년간 거리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나는 지프지기에 대한 로망을 무럭무럭 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무용축제의 인턴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 내가 언제나 즐기고 로망했던 축제의 일부가 됨으로써 고향에서의 피날레를 완성했다. 그때 나는 홍보팀 소속이었으므로 영화 감독들의 인터뷰와 개막식의 프레스센터, 각종 기자회견 등의 장소에 있었다(이때의 경험들은 이후 축제 인턴, 언론홍보대행사 등의 업을 거치며 확장되었다). 같이 홍보팀 지프지기를 했던 친구들과는 아직도 주기적으로 만난다. 마침 그중 과반수가 다들 서울에 자리를 잡았고, 또 그중 일부는 방송계 및 영화계에서 일을 하고 있다(이들은 그때의 경험을 무한대로 확장 시키면서 부수는 중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고향은 맛으로, 정으로, 가족으로만 감각되기에는 너무 넓다. 내게 고향은, 어릴 적 나의 삶을 예술과 예술적인 사람들로 채워준 세계적인 터전이면서, 내가 어떤 업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안겨준 무의식의 성(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