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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Jun 05. 2024

5. 오로지 행동하는 나

당신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오래도록 사랑이 ‘고정된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제외하며 사랑을 찾으려 애썼다. 나한테 이런 말을 한다고? 사랑이 아니지. 나한테 이런 행동을 한다고? 사랑이 아니지. 사랑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이 아닌 것은 왠지 단숨에 골라낼 수 있었고, 그렇게 골라낼 때마다 정답을 맞힌 것처럼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점점 더 시니컬하게 변해갔다. 적어도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 사랑은 없었다.


그런데 사랑이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면? 사랑이 사실 끊임없이 약속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거라면?1) 사랑이 감정처럼 느끼거나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유발하는 욕구나 동기에 가깝다고 한다면?2) 그렇다면 나는 내 의지로 사랑하는 상태에 계속 놓여있을 수 있는 걸까. 내 의지로 이 세상에서 사랑을 발명3)할 수 있는 걸까.


머리로는 이제 어렴풋이 알겠는데. 사랑이란 물체는 없고, 오로지 사랑하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지와 노력만이 있다는 것을. 그런데 아직도 나는 혼란 속에 있고, 사랑의 발명은 요원하다. 사랑에 대한 열정도, 호기심도, 믿음도 없어졌다고 느낄 때 어느 날 나는 다시 돌연히 사랑하는 상태가 되고, 그 상태에 놓인 나는 단 하나의 재난으로 일평생 이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급박한 사람의 심정이 된다.


시를 대하는 내 마음은 이와 동일하다. 시를 배우고 쓰기 시작한 처음 몇 년간은, 시라는 어떤 이데아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는 이렇게 쓰는 거야, 라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 했지만, 시는 이렇게 쓰면 안 돼, 라는 말은 자주 들었다. 시라는 게 뭔지도 정확히 몰랐지만 왠지 시가 아닌 것들은 차근차근 제외해나갈 수 있었고, 나는 내가 들었던 말들을 토대로 내 시와 다른 사람들의 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지내보니 ‘시 수업을 많이 들은 사람의 숙련된 글’ 은 있어도 ‘시’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시 쓰는 재미가 조금씩 떨어졌고, 다른 사람들이 쓴 시도 멀리하게 됐다. 이렇게 쓰면 되고, 안 되고의 잣대가 내 안에서 견고해지자 모든 것들이 시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 시는 없었다.


산문처럼 쓰지 말 것, 감정을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말 것, 오브제들이 너무 가깝게 있거나 떨어져 있으면 안 될 것,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단어를 지양할 것, 제목이 시 전체를  포괄하고 있을 것, 자기 안의 파토스에만 갇혀 있지 말 것, 의미의 변주 없는 반복을 하지 말 것, 지금껏 써 왔던 시들과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시 세계를 완성할 수 있도록 하되 지금껏 써 왔던 시들과 아주 같은 양태로 쓰지 말 것, 시적 논리를 깨트리지 말되 낯설게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들이 온통 뒤섞여, 점점 시를 읽거나 쓰는 재미를 잃어버리게 됐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 골몰하다 보니 이제야 시라는 이데아는 없고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 언제나 시라는 상태에 가 닿으려는 나의 노력만이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라도 쓰자. 앉아서 무엇이라든 토하듯이 쓰자. 그것이 흉물스럽고 냄새나고 역하더라도 일단 뱉어내자. 의지 없이 쓰자. 희망 없이 쓰자. 열정 없이 쓰자. 나 없이 쓰자. 혼란 속에서 쓰자. 그렇게 쓰다 보면 어느샌가 돌연히 나는 시라는 상태값에 놓인 초점이 된다.


시가 나에게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시라는 상태에 가기 위한 노력과 행동을 멈췄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항상 내가 시라는 상태에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있다면 내가 쓴 것이 다름 아닌 시라는 것을 자연히 받아들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의 기준을 세우고 성공한 사랑 혹은 참된 사랑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당연하게도 사랑에 실패한 과거의 나와, 시의 기준을 세우고 잘 쓴 시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고 생각한 과거 혹은 현재의 내가 겹쳐진다. 하지만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 비록 지금은 넘어져 있는 상태일지라도 나는 언제든 행동할 수 있으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 무엇이든 그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에 위배 되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움직이자. 그것뿐이다.






1) How to know you LOVE them: (1) You know because you decide You don’t feel love. You DO it. It’s an act, not a feeling. It’s a moment by moment decision and re-commitment. You know because it’s deliberate and conscious, <How to *really* know you’re in love>, Kris Gage, Medium, Aug 3, 2017


2) 사랑은 반드시 ‘행동’을 동반한다는 점에서도 여느 감정과 구별된다. 우리는 슬프거나 기쁜 감정 상태가 표현되지 않고 그저 마음 상태로만 오래 간직된다고 해서 감정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사랑은 다르다. 사랑이라는 상태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모든 것을 집중시키며 그와 함께하고, 그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수행하며, 일련의 행동에는 뚜렷한 목적이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감정이라기보다는 ‘욕구나 동기’에 더 가깝다, <정재승의 사랑학 실험실 690호, ‘사랑’은 감정이 아니랍니다> , 한겨레21, Dec 20, 2007


3)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사랑의 발명>,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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