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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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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Feb 04. 2022

무지 쓴 단무지

너라는 아이는 도무지

가끔 투박하고 별다를 것 없는 음식이 입맛을 당길 때가 있다. 기름진 특식도 얼큰한 별식도 달갑지 않을 때, 

풋고추를 무심하게 썰어 된장에 버무리거나 곱창김을 살짝 구워 국간장에 곁들이면 쌀밥만으로도 진수성찬이 된다. 이리도 투박한 것들 가운데 고춧가루와 참기름에 무쳐낸 단무지는 유난히 하찮다. 한껏 호사를 부려 매실청과 다진 파까지 넣고 손끝으로 조물거려봐도 고작 단무지. 그러나 한 점 집어 맛을 보면 별 것도 아닌 단무지 한 조각에 새콤 달콤 짭짤, 일미의 모든 요소가 담겨 있어 기특하기 이를 데 없다.


단무지를 씹으며 순이를 생각한다. 처음으로 내게 단무지무침을 맛보여준 친구, 순이.


내가 단무지를 앞에 놓고 자신을 떠올리는 걸 알면 순이는 펄쩍뛸 것이다. 단무지는 순이가 지향하는 본인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순이는 자신이 매우 세련되고, 예쁘고, 산뜻한 여성으로 보여지길 바라며 또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믿는다. 내가 아는 바 20대 초반까지 순이의 최대관심사는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정확하게는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자기를 예쁘다고 생각하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이었다.


촌스럽고 수수하고 투박한 것들이라면 덮어놓고 멀리하던 순이로부터 평생 가장 괄시받은 건, 바로 그녀의 비범한 이름 석 자였다. 너무 촌스러워서 자칫 웃음거리가 되기 쉽다는 이유였다.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혼자 유난이라고, 처음엔 순이의 자의식 과잉과 피해의식을 비웃었다. 그러나 버스 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 일제히 순이에게로 향하던 또래 무리의 눈초리와 키득거림을 목격한 후로, 나는 순이의 이름이 감수성 여린 10대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조금 가혹한 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동시에 나도 처음 순이의 이름을 듣고 웃음을 참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눈꼬리가 올라가고 볼이 유난히 빨간 아이가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 순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풋 터져나오는 웃음을 큽 눌러넣었다. 이름을 제외하고 순이는 내게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순이도 내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내내 데면데면하던 우리는 강렬한 사건으로 인해 서로에게 완전히 밉보이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식에서 람이에게 주려고 준비한 선물을 순이가 가로챈 탓이었다(사실 가로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고, 순이의 입장은 달랐을 것이다). 그날 이후 안 그래도 올라간 순이의 눈매가 더 사납게 느껴졌고, 발그레한 볼까지 욕심주머니처럼 밉살맞아 보였다.


중학생이 되어 순이와의 불화가 희미해졌을 즈음, 나는 순이가 생각보다 재미있는 녀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이는 일상의 이야기도 희대의 에피소드로 맛깔나게 풀어내 듣는 귀를 사로잡는 재주가 있었다. 이야기 사이사이 곁들여지는 성대모사도 일품이었다. 특히 자기 엄마 흉내를 기가 막히게 잘 냈다. 자신을 희화화하는 딸의 재간에 민망해하던 그녀의 엄마마저도 종래엔 너털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시다니 방구리 같은 것이 참말로 연설하고 있네. 아 저것이 저렇게 숭(흉내)을 잘 낸당께."

웃기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나는 순이와 개그콤비가 되어 뻔질나게 순이의 집을 들락거렸다.


순이의 집엔 주로 순이와 순이의 언니 둘만 있을 때가 많았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둔 덕분에 순이와 순이의 언니는 일찍부터 살림을 익혔다. 하루는 순이네에서 놀다가 점심때가 되었는데, 순이가 당연하다는 듯 저와 내가 먹을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내심 나의 정신연령이 순이의 그것보다 위라고 자만해왔는데, 능숙하게 조기를 굽는 순이를 보면서 처음으로 순이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조기까지 구워 내놓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순이는 밥을 먹다말고 일어나서 단무지를 꺼내 이것저것 넣고 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 된 단무지무침을 자신만만하게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게 뭐야? 단무지에 뭐 넣은거야?"

"맛있어. 먹어봐. 우리 엄마가 가르쳐준 거야."

조심스럽게 하나를 집어올려 입에 넣었다. 씹는 순간 꼬득한 단무지의 식감과 빈틈없는 감칠맛이 입 안 구석구석을 채웠다. 밥도둑이었다.


그날 맛본 단무지무침의 새콤 달콤 짭짤한 여운은 꽤 오래갔다.

그놈의 단무지무침만 좀 덜 맛있었어도, 나는 좀 더 일찍 순이를 끊어낼 수 있었을텐데.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순이의 남성편력이 시작됐다. 원래부터 이성에 관심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그 즈음부터는 정말 끊임없이 남자 얘기만 해대는 통에 순이와 전화통화를 마치고 나면 머리가 멍했다. 순이의 머릿속엔 그녀 주변의 잘생긴 남자와 그 남자와의 상상 연애로 가득한 모양이었다. 순이가 남자를 좋아하든 여자를 좋아하든 상관할 바 아니다. 문제는, 순이가 자신의 연애사업에 자꾸만 나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순이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늘 사랑받아 마땅한 여주인공이었고, 세상은 자신에게만 가혹한 무대이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가족 포함)들은 이유없이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이었다. 이런 세상과 악당들로부터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남자, 남자, 남자 뿐이었다. 순이의 세계, suniverse에서 '친구'는 왕자님과의 만남을 위해 잠시 등장하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그나마 나는 그중에서도 비중이 있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향단이'나 '시녀장'정도는 되었으려나. 순이는 손가락 하나로 간편하게 나를 소환해 아래와 같은 만행들을 저질렀다.


두 시간 동안 썸남 얘기만 하는 순이.

썸남에게 생일케이크를 주고 싶다며 함께 가자고 조르는 순이.

기껏 함께 가줬더니 혹시 너도 내 썸남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개떡같은 소리를 하는 순이.

왜 우리나라는 근친혼을 금지하느냐며, 사촌과 사랑의 도피라도 떠날 기세로 비탄에 빠진 순이.

남자친구와의 외박을 위해, 나와 함께 찜질방에 가는 것으로 자기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해달라는 순이.


순이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순이가 무쳐준 단무지무침을 떠올렸다.

새콤 달콤 짭짤한 단무지무침을 떠올리면 바보같이 마음이 누그러졌다.


순이와 친구로 지낸 여러 해 중에 단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던 유일한 해는 내가 노량진에서 재수를 하던 때였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람이가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찾아와 밥을 사주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순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아주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사람마다 응원하는 방식은 다르니까. 이것이 순이 나름의 응원일 것이라고 나는 순이를 두둔했다.


재수를 마치고 돌아오자 순이는 하루가 멀다하고 내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만나서도 순이는 여전히 자기 얘기, 아니 남자 얘기만 했다. 남자친구를 어떻게 만났는지, 남자친구가 어떻게 고백했는지, 남자친구가 얼마나 자기를 좋아하는지 등등. 그러고 보면 순이는 내게 궁금한 게 없었다. 재수생활은 어땠는지, 수능시험은 잘 봤는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순이는 대뜸 내게 수니버스 배역을 제안했다.


순이가 대학에 들어가서 사귄 첫 남자친구, 순이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며 절절하게 고백하고, 순이가 치마를 입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순이 주변의 모든 남자를 경계한다는 그 남자친구가 조만간 입대할 예정이었다. 그 남자친구를 배웅하러 가는 길, 심지어 남자친구 가족들과 함께 가는 길에 동행해달라고 했다. 정말 거지같은 배역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자리에 나를 대동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끈질기게 부탁하던 순이는 자기 분에 못 이겨 실언을 했다.

"난 네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친구고 뭐고 다 소용없네."


순이의 실언 앞에서 나는 늘 해왔던 것처럼 단무지무침을 떠올렸다.

입이 깔깔했다. 입맛이 썼다. 새콤 달콤 짭짤한 단무지무침의 여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비상식적인 부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밀고, 그 부탁을 거절하면 한순간에 친구도 뭣도 아니게 되는 사이. 그런 사이라면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내가 절교를 선언하자 다급해진 순이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고, 나는 매몰찬 답장으로 순이를 끊어냈다.

"홧김에 한 말 아니고 진심이야. 우리 이제 서로 모르고 살자."

후련했다. 순이의 실언이 외려 고마웠다. 


감흥없는 첫인상, 사소한 기싸움, 극적인 화합, 여러 고비를 겪으며 아슬아슬하게 이어져오던 우리의 사귐은 마침내 완전히 끊어졌지만, 연결된 끈이 많은 고로 종종 순이의 소식을 듣곤 했다.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근황을 전해들을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카톡 프로필에서 순이의 이름을 보는 순간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그녀의 이름을 지그시 눌러 차단 버튼을 눌렀다. 카톡창에선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종종 순이 생각이 났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순이가 궁금했다. 수신거부 목록을 열어 순이를 차단해제할까,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궁금해하지 않는 게, 이어붙이지 않는 게 우리 사이에 훨씬 좋을 것이라고, 그나마 아련함이라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단무지를 무칠 때마다, 이십여년 전 순이가 차려준 밥상 앞에 끌려가 앉게 된다. 그때마다 순이를 떠올리고, 어디선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다지 절절한 바람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한때 알고 지냈던 이에게 내어줄 수 있는 만큼, 딱 그만큼의 마음이다. 부디 연락은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 이렇게, 단무지 한 조각만큼, 아니 그 반의 반만큼만 너를 추억할 수 있게 나를 잊고 잘 살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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