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고모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는 고모를 닮았다. "뱃속에 있을 때 씨누(시누이) 미워하면 애기가 씨누 닮는다던데." 누군가 건넨 짓궂은 농담에 도통 시누를 미워해본 일이 없노라고 엄마가 손사레를 치게 만들 정도로, 고모와 나는 닮았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 희미한 이목구비, 선명하게 대비되는 흑과 백(그냥 털이 많다는 소리다), 얼핏 뚱해보이지만 웃을 때 잔뜩 장난끼를 머금은 눈매 등이 그렇다.
내겐 고모가 넷이나 되지만 '고모'라는 단어 앞에서 나는 언제나 '금이고모'를 떠올린다. 아버지와는 열살 차이인 그는 겨우 다섯살 때부터 오빠들의 밥상을 차렸고, 여섯살 무렵엔 늘 허기진 오빠의 밥그릇에 본인의 밥을 덜어주곤 했다. 그리고 일곱살에 아버지의 주검을 홀로 목도했다. 모두가 말 못할 아픔으로 고모를 귀애했다. 금이고모는 온 식구를 '아픔의 연대'로 이어주는 짠하디 짠한 막내딸이었다.
고모에게 나는 첫 조카딸이었다. 줄줄이 여섯 명의 남자조카들 이후 처음으로 안아본 여자아기였다. 우리 사이는 각별했다. 훗날 고모가 딸을 둘이나 낳으면서 한참 후순위로 밀려나긴 했지만 적어도 10년동안 고모와 나는 서로 죽고 못 살았다. 어느 정도로 죽고 못 살았는고 하면 "엄마가 좋아, 고모가 좋아"라는 (세상 가치없는)질문 앞에서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고모의 결혼식날엔 나도 덩달아 드레스를 입었다. 고모가 얼마나 예뻤는지, 얼마나 환하게 웃었는지, 그런 건 기억나지 않는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새하얀 드레스가 그날 내 마음을 한껏 부풀려 놓았기 때문이다. 네 고모가 시집가지 네가 시집가느냐며, 나를 보는 어른들마다 가벼운 핀잔을 섞은 농담을 건넸지만 나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나는 고모의 분신이니까. 고모가 드레스를 입는 날, 내가 드레스를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모는 결혼을 하고도 해마다 나와 오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겼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있지도 않은 산타할아버지 대신 실존하는 고모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 고모가 우리에게 올 수 있었다는 건 그때까지 고모에게 아기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혼을 하고 한동안 고모에게는 아기가 없었다.
사실 결혼을 하던 이듬해에 고모의 배는 꽤 불러왔었다. 뱃속 아기가 멀미를 할까봐 그랬는지 한동안 고모는 우리집에도 안 왔다. 아기가 미웠다가 기다려졌다가 했다. 고모가 빨리 아기를 낳았으면 좋겠다. 얼른 아기를 낳고 나를 보러 왔으면. 아기를 낳으면 고모는 엄마가 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철없는 조카는 제 고모를 다시 볼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고모가 왔다. 드디어 고모가 왔다. 산모가 몸을 보해야 한다며 엄마는 닭을 삶았다. 닭이 삶기는 동안 고모는 아랫목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안 그래도 하얀 고모의 얼굴이 한껏 창백해보였다. 저렇게 계속 하얘지다간 고모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가만히 다가가 고모 소매를 붙잡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고모의 배가 푹 꺼져있었다. 사라진 건 고모가 아니라 아기였다.
"고모, 아기는?"
"쉬쉬쉬쉬! 쉿! 쉿!"
세 살 차이 오빠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보던 고모가 힘없이 소리내어 웃었다.
토종닭 한마리는 온전히 고모 차지였다. 감히 닭을 넘볼 생각같은 건 나도 안 했다. 고소하고 되직한 닭죽 한그릇이면 되었다. 한참만의 기다림 끝에 받아든 닭죽에는 닭껍질이 하나도 없었다. 산모에게 주는 백숙에 기름이 뜨지 않게 하려고, 엄마가 닭껍질을 모두 벗겨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 따위 알 리 없는 나는 고모 혼자 닭껍질을 다 먹었다며, 애꿎은 고모에게 투정을 부렸다. 엄마는 철없는 딸을 줘패버릴까, 가여운 시누이를 다독일까 고민했고 고모는 한켠에서 다시 한번 난감하게 웃어보였다.
고모의 아기는 머리가 없었다고 했다. 당시엔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어른들의 말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고모가 처녀 적에 반도체공장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이 고모의 유산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도록 고모는 아기를 갖지 않았다.
그렇게 5년만에 조심스럽게 품은 아기가 바로 고모의 첫 딸 '서이'다. 그 서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 나는 고모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집에 가기가 싫었다. 세 살 아기를 키우면서도 고모는 내가 머무는 내내 조금씩 다른 하루를 만들어주려고 애를 썼다. 고모네 집에서 보낸 보름동안 나는 두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고, TV광고 속에서나 보던 테크노마트에도 가보았고, 고모집 근처에서 열린 도자기축제에도 갔다.
어느 날은 오일장에 가자며 광역버스를 타고 나섰다. 버스 안에서 서이가 제 엄마의 앞섶을 만지작거렸다. 두돌이 한참 지나서도 서이는 종종 젖을 찾았다. 모르는 할머니가 '영양가도 없는 젖을 준다'며 퉁을 주었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고모는 서이가 달라는대로 앞섶을 열어주었다. "날필아, 온전히 나만 보는 아기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너무 신비롭지 않아? 나는 아직도 안 믿겨져." 라고 고모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어느 장터에서 내린 우리는 크지 않은 삼계닭을 식구수만큼 사왔다. 잘 익었는지 먹어보라며 고모가 건넨 닭다리를 건성으로 뜯으며 TV를 봤다. 다 먹은 다리뼈를 내려놓고 다시 TV에 골몰하는데 아래쪽에서 덜그럭 쪽쪽 소리가 들렸다. 서이가 내가 먹던 닭다리뼈를 쪽쪽 빨고 있었다. 세상에. TV에 정신이 팔려 물끄러미 내 입과 손을 바라보는 어린 것을 두고 내 입에만 고기를 처넣었던 것이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나는 다시 닭다리를 받아다가 정신없이 서이의 입에 집어넣어주었다. 서이야 먹어 먹어. 많이 먹어.
"그때, 너 2학년 때, 닭죽에 닭껍질이 없다고 니가 울어서 내가 어찌 미안하든지.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났는데 그걸 우리 딸이 갚아주네." 사람좋게 너털웃음을 웃는 고모와 마주보고 쑥쓰럽게 웃는 나에게로 불쑥 가시같은 말이 날아들었다. "닭껍질이 얼마나 살찌는데. 꼭 살찌는 애들이 그런 거 좋아하드라." 고모네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고모의 손위 언니, 미이고모였다.
미혼의 미이고모는 어째선지 결혼한 금이고모네서 함께 살았다. 미이고모는 특유의 답정너 화법과 괴팍한 성질머리로 그 자신이 분란의 중심으로 기어들어감은 물론이고 공연히 남들까지 심란하게 하는, 명실상부 트러블메이커였다. 최대피해자는 손아래동생이며, 싫은 소리 못하고, 마음이 약하고, 온갖 만만한 조건이란 조건은 다 가진 금이고모였다. 금이고모는 자기 딸에게 옷도 마음대로 못입혔다. 미이고모 마음에 안 드는 옷을 입혔다간 온종일 잔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미이고모는 심기를 거스르는 것들이라면 제부(금이고모의 남편)라도 욕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금이고모는 고모부와 미이고모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내가 머무는 그 보름동안에도 미이고모가 개새끼며 소새끼며 온갖 세상의 어린 것들을 찾아대는 바람에 내가 서이를 데리고 밖으로 피신하기도 했을 정도니까 말 다했다. 그 난리통에 미이고모가 금이고모의 귀를 후려치는 바람에 금이고모의 한쪽 귀가 잘 안들리는 사단이 났다.
그후로 다시는 금이고모네에서 방학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왜 같이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금이고모는 미이고모에게 시달렸다. 나야 가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자기 집에서 언니에 치여사는 금이고모가 생각할수록 가여웠다.
결정적으로 금이고모와 나를 갈라놓은 건 아버지와 고모의 불화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생부터 금이고모와 나를 묶어주었던 '가족'이라는 관계성이 우리를 서먹하게 했다. 형제간의 싸움에 나까지 덩달아 금이고모를 잊고 사는 동안, 나는 대학엘 가고 결혼을 했다. 고모가 내 결혼식에 오지 않는다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고모와 아버지의 관계가 어찌됐든 고모의 조카인 나는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모, 나 결혼해."
스물다섯의 나는 마냥 좋기만 했는데. 이 좋은 소식을 나와 닮은 고모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인데. 고모가 울었다.
"왜 벌써 결혼을 해. 결혼하면 힘든데."
내 결혼소식을 들은 고모가 아기처럼 엉엉 울었다. 당황스러웠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고모가 왜 이러나, 갱년기인가, 고모가 안타까웠다. 고모는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섭섭했다. 고모와 나의 유대는 결국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아버지와 고모의 관계가 흔들리면 내겐 고모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못내 서운했다. 더는 고모에게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키우면서 고모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래도 연락은 내키지 않았다. 아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 세 살의 서이를 키우던 고모에게 내가 보름이나 머물렀던 일이 떠올랐다. 그제야 고모에게 미안해졌다. 고마웠다는 말 정도는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고모는 이혼을 했다고 했다. 언제쯤이었을까. 내 결혼소식에 흐느끼던 그때 이미 고모는 이혼을 준비중이었을까. 아직은 고모를 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보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어디서 무얼 하든, 살아있으면 된다.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웃으며 만나게 될 것이다. 결혼도 이혼도 인생의 과정일 뿐, 어떤 사건도 우리의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으니까. 이혼한 고모가 불행하지 않은 것처럼 결혼한 나도 아깝지 않다.
"나는 지금도 우리 조카 아까운데...야무져서 똑소리나게 일도 잘 했을건데..."
고모가 더 이상 나를 아까워하지 않을만큼, 멋진 모습이 되어 고모를 다시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부디 고모도 그래주길 바랐다. 그런 날이 오면 우리는 분신같이 닮은 서로를 기쁘게 마주볼 수 있겠지. 그땐 내가 닭죽을 끓여놓고 고모를 대접하련다.
애처로운 어린 시절, 아프게 남은 유산 경험, 결혼생활에 드리워진 친언니의 그늘, 한때는 죽고 못살았던 남자와의 이혼까지. 누군가는 고모의 삶을 두고 박복하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말에 힘껏 반박할 것이다. 삶이란 늘 진행중이며 지나간 삶에 대한 평가는 오늘 아무 의미가 없다고. 아직 고모의 이야기는 반절도 더 남았고, 그렇기에 충분히 희망적이라고.
나를 닮은 고모가 오늘, 지금 이 시간,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