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 내숭을 떨었나
엄마는 늘 내게 말했다.
"저건 완전 뼛속까지 내숭쟁이다."
나는 억울했다. 집은 편했고 밖은 어려웠다. 단지 그뿐이었다. 안팎의 갭이 남들보다 좀 심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낯을 남들보다 더 많이 가렸기로소니, 내숭쟁이라니. 내가 내숭쟁이라니.
그런 식으로 나를 깎아내리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듣기 싫은 오명이었다, 고 그때는 생각했다.
그러다 얼마 전 떠오르고 만 거다.
초등학교 1학년 봄소풍 날의 기억이.
너무 좋은 기억력은 많은 순간 강력한 무기가 되지만 때때로 나에게도 덫이 된다.
40여명의 아이들이 수건돌리기를 하느라 동그랗게 둘러 앉았다. 수건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나는 내내 혹시 걸리면 어떻게 뛰어야 덜 우스워보일지를 고민하며 마음을 졸였다. 나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내 차례는 한번도 돌아오지 않았고 곧 닭싸움이 시작됐다. 어째선지 나는 남자아이와 붙게 됐다. 그때만 해도 상당히 체격이 좋았던 내게 그만한 남자아이 정도는 우스웠다. 그날은 복장도 예사롭지 않았다. 초록 상하의 위에 주름종이같은 재질의 빨강 자켓을 걸치고, 강렬한 보색만큼이나 거침없는 기세로 나는 링 위에 올랐다.
반전은 없었다. 그동안 세 살 위의 친오빠를 상대로 연마해 온 나에게 녀석은 너무 유약한 상대였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10초가 걸릴 것인가, 30초가 걸릴 것인가의 문제지. 그만 끝내자 마음먹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번뜩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남자애를 이겼다가 무지막지한 여자애로 보이면 어쩌지? 집에서는 오빠와 겨뤄 이기고 으스댈지언정 남들에게는 호전적인 이미지로 남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집에서 오빠와의 닭싸움이었다면 기를 쓰고 이기려 들었을 내가 그 허약한 남자아이와의 매치에서는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무너져 주었다. 일부러 다리를 잡은 손을 놓고 오버액션으로 미끄러짐으로써 말이다. 시합 내내 여자애에게 쫓겨다니기만 했던 그 남자아이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나 또한 우악스럽게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그야말로 윈윈. 완벽한 판단, 완벽한 연기였다고 생각하고 내심 흐뭇해했지만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저건 완전 뼛속까지 내숭쟁이다!'
6학년에 올라가던 해, 설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계신 부산의 큰아버지댁으로 향했다. 친가는 제사가 없는 집이라 엄마와 큰엄마는 매번 산 사람이 먹을 것을 궁리하느라 분주했다. 마침 마트에서 '시판 만두피'를 발견하고 만두빚기에 재미가 들려있던 엄마의 제안으로 우리는 모두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다.
행복에 형태가 있다면 쟁반을 가득 채운 만두를 닮지 않았을까. 쟁반에 만두가 하나 둘 늘어갈수록 마음에도 행복감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집에서 만든 만두 맛은 <고향만두>의 그것과는 정반대지점을 지향하고 있었다. 고향만두가 표준화된 공장의 맛으로 모두를 공략한다면, 집만두는 집집마다의 차별화된 맛으로 '진짜 고향의 맛'을 선사했다.
엄마와 큰엄마는 다 빚은 만두를 그날로 모조리 쪄냈다. 찜통에서 나온 만두는 포들한 속을 내비치며 구미를 당겼다. 마음같아선 지나다닐 때마다 하나씩 주워먹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긴 우리집이 아니라 큰집이었고 여기서 만들어진 만두 역시 우리집만두가 아닌 큰집만두였으니까. 어른들은 내가 그토록 만두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만두 옆을 지날 때마다 눈을 내리깔고 음전한 척 딴전을 피우면서도 나는 나름 속셈이 있었다.
설날 아침이면 큰집 식구들은 모두 큰엄마의 친정으로 간다. 그러고 나면 우리 가족만이 할머니와 남아 큰집을 지킬 것이었다. 머잖아 할머니와 우리 가족만 남은 큰집에서 옴싹옴싹 저 만두를 다 해치우리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속으로는 군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의연하게 만두를 대할 수 있었다. 기다려라 만두.
아침 일찍부터 큰집 식구들은 분주했다. 화장실 문 앞에 다다르면 요의를 참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처럼, 큰엄마가 신발을 신고 나설 즈음엔 만두를 향한 나의 욕망도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배웅을 하다 말고 별안간 엄마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했다.
"맞다 형님, 만두 좀 싸가씨요."
엄마! 만두가 엄마꺼야? 왜 엄마가 선심을 써? 터져나오려는 포효를 겨우 참았다.
큰엄마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여행가방을 잡아끌었다.
"뭐 얼마나 된다고 그걸 가져가노. 동서 먹어라."
나이스 큰엄마! 역시 덕 있는 맏며느리!
"아이고, 우린 또 만들어먹으면 되는데 뭐. 형님 친정식구들 맛도 보이고 하면 좋지요."
엄마는 어느샌가 커다란 통을 찾아와서 만두를 척척 담고 있었다. 어디서 또 그렇게 커다란 통을 찾았는지 담는 족족 다 들어갔다. 큰엄마는 못 이기는 척 엄마가 내미는 만두를 받아들었고 그렇게 내 가슴 한켠에 쌓아둔 행복감도 큰엄마를 따라 현관문을 나섰다.
큰집 식구들이 떠나고 큰집차까지 떠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엄마에게 패악을 부렸다.
"아 진짜 엄마는 그걸 다 줘버리면 어떡하는데!"
"뭐를?"
"만두!"
"니 잘 묵지도 않드만!"
"아 큰엄마 가고 나면 실컷 먹을라고 했다고오!"
그제야 엄마는 안타까운 표정이 되었다.
아마 그때 엄마의 표정을 문자화하면 "니도 차암 어지간-하다." 쯤 되지 않았을까.
"아이고~이것이 큰엄마 가고 나면 실컷 먹을라고 했다요~깔깔"
설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그 말까지 싹 다 전화로 큰엄마에게 고했다. 어른들은 이런 식이다. 자기 체면은 그렇게 챙기면서 아이들은 체면도, 지키고 싶은 이미지도 없는 줄 안다. 엄마를 믿고 털어놓은 내 찌질함을 다른 어른에게 홀랑 고해바치다니.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손맛만큼은 믿을 수 있는 엄마는 다시 만두 빚을 준비를 했다. 그 옆에 앉아서 나는 열심히 만두를 빚었다. 숙주와 돼지고기, 부추를 넣고 버무린 만두소를 동그란 만두피에 얹고 가장자리에 물을 발라 야무지게 입을 다물려가며. 이번에야말로 원 없이 만두를 먹어보리라는 희망에 부풀어서.
그렇게 만든 만두를 쪄먹고, 구워 먹고, 튀겨 먹었다. 나오는 족족 한판을 거뜬히 해치우는 나를 보며 엄마는 "이렇게 먹고 싶은 걸 거기선 어떻게 참았냐"고 혀를 찼다.
그러니까 엄마 말대로 나는, 뼛속까지 내숭쟁이가 맞았다. 잡다한 생각을 한데 뭉쳐 남들에게 안 보이게 숨겨보아도 찜통에 들어갔다 나오면 속이 훤히 비치는 만두처럼, 엄마 속에서 나온 내 속을, 엄마는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엄마 말은 그때도 맞았고 지금도 맞다.
서른을 넘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종종 내숭을 떨고 여전히 만두를 좋아한다.
한 겹 만두피로 감쪽같이 가려봐도 언젠간 그 속내를 내보이고 마는.
내숭쟁이, 만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