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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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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Sep 08. 2020

싱겁고 씁쓸한 유자청물

학창시절이 마냥 새콤달콤했던 것만은 아니다

1. 달군 팬에 참기름을 두르고 절편을 올린다.
2. 앞뒤로 노릇하게 구운 절편을 반으로 자른다.
3. 접시에 가지런히 놓고 유자청을 듬뿍 끼얹는다.


이름하여 유자청을 곁들인 구운 절편. 남편도 아이들도 좋아하는 홈메이드 간식이다. 유자청도 절편도 다 사온 거지만 집에서 한 차례 칼질과 불질이 있었으니 홈메이드라고 우겨본다.(우리집에서 홈메이드의 기준은 '칼과 불을 모두 썼는가'이다) 세 남자의 먹는 모습이 구미를 당겨 한 점 먹어볼까 젓가락을 들었다가도, 진한 유자향이 콧속으로 스며들면 이내 진저리를 치며 물러서게 된다.


나는 유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유자 특유의 생소한 향이 매년 접해도 익숙해지지 않아서다. 어딘지 붕 뜬 유자 특유의 향을 맡고 있으면 어지럽기까지 하다. 유자 앞에서 현기증을 느낄 때마다 '휘'가 떠오른다. 어쩐지 속까지 부대껴오기 시작하는 건 번번이 낯선 유자향 때문인지, 지난 날 기억 속에 함께 떠오르는 자기혐오 때문인지.




인근의 Y시에서 전학 온 휘는 예쁜 아이였다.

전학생에게 예쁘다는 것은 대단한 강점이다. 모두가 미지의 예쁜 소녀 휘와 친해지고 싶어했다. 우리 중 가장 행동력이 남다르고 공부를 잘했던 은이가 나서서 휘를 우리 그룹으로 영입해왔다. 공부욕심만큼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욕심이 많았던 은이는 모두가 선망하는 휘와 친해졌다는 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휘가 들어옴으로써 우리 그룹의 위상도 한 단계 높아진 듯 했다. 


한 반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룹'과 '서열'이 생겨난다. 이 때 서열은 그룹 안에도 그룹 밖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모두가 '그룹 간 서열'과 '그룹 내 서열'을 인지하고 있기에 이 소녀들의 세계란 얼핏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 그룹은 다른 그룹과 두루두루 친했고 그룹 내에서 나의 입지도 나쁘지 않았다. 입담이 좋은 미이와 천진난만한 진이, 공부를 잘 하는 은이, 인기가 많은 휘까지. 있는 듯 없는 듯 몸 담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구성이었다.


문제는 인기 많은 휘가 공부까지 잘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 그룹에 두 캐릭터가 겹치면 분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의사부모를 둔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은이는 공부를 잘했고, 자기와 비등비등하게 공부를 잘하는 모든 친구들을 경계했다. 그때까지 나나 미이, 진이가 은이의 경계대상이 되지 않았던 건 우리 셋 다 은이와 반 석차가 10등 이상 차이났기 때문이었다.


휘가 전학온 지 석달쯤 지나 우리는 정기고사를 치렀고 휘는 시험을 무척 잘 쳤다. 은이보다 휘의 석차가 약간 앞섰다. 은이와 휘 사이의 기류가 묘해졌다. 누구보다도 사람들 사이의 기류에 민감한 나는 진작부터 그것을 눈치챘지만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으면 그저 지나간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바 있기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휘가 없는 틈을 타 먼저 입을 연 것은 은이였다.

"휘가 나보고 수학 몇 점 맞았냐고 물어보더라? 몇 점인지 얘기해주니까 자기가 더 잘 봤다고 엄청 좋아하는 거 있지? 막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하는데, 완전 기분나빴어. 솔직히 휘한테 좀 정 떨어졌어."


할 말이 없었다. 말했다시피 반에서 은이와 나의 석차는 10등 이상 차이가 났다. 반에서 10등 차이면 전교에서는 100등 넘게 벌어지는 등수 차이다. 한마디로 은이와 나는 노는 물이 달랐다. 아랫물 송사리가 윗물 버들치들 싸움에 무슨 말을 섞는단 말인가. 거 애가 좋아서 박수 좀 칠 수도 있지,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나 한번 시작된 바람은 쉬이 지나가지 않았다. 은이의 행동력은 생각보다 더 남달랐다. 나와 미이, 진이의 무반응이 본인에 대한 동조라고 생각했는지 은이는 다음 행동에 박차를 가했다. 반에서 늘상 거들먹거리며 일진행세를 하던 정이에게 휘에 대한 험담을 하며 은근히 휘를 괴롭힐 것을 종용했다. 


반 아이들에게 위세를 떨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정이는 그때부터 작정하고 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른 반 일진들에게도 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퍼뜨려 휘는 때때로 복도에서, 화장실에서, 운동장에서, 이유없는 조롱과 빈축에 시달렸다. 한동안 휘 주변에서 요란하게 깡통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 소음 속에서 은이를 제외한 우리 셋, 나와 미이와 진이는 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휘에게 말을 건네고 함께 밥을 먹었지만 휘는 전과 같이 우리를 대하지 못했다. 점점 마른 풀처럼 시들어갔다.


반면 깡통들의 요란한 지원사격에 날이 갈수록 기세등등해진 정이는 급기야 휘의 뺨을 후려치기에 이르렀다. 체육시간에 생리대를 가지러 혼자 교실에 들렀다가 이 상황을 목격한 순간, 내가 맞은 것처럼 뺨이 달아올랐다. 뭔가 잘못됐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휘가 항변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네가 뭔데 날 때리는데!" 휘의 말이 맞았다. 휘가 뭘 잘못했는데? 네가 뭔데 휘를 때리는데? 제자리에서 입술만 달싹거렸다. 발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얼굴 전체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분노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막 교실로 들어온 반장 연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래? 같은 반 친구끼리 뭐하는 거야?" 연이는 우리 반 1등, 더불어 전교 1등이었다.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전교생이 연이를 알았다. 움찔한 정이는 조용히 손을 내리고 자리를 피했다. 휘는 그 자리에 앉아 울었다. 그제야 휘에게 다가가 휘의 등을 쓸었다. "휘야, 괜찮아?" 휘가 맞는 걸 보고도 아무 말도 못했던 나. 괜찮지가 않았다. 휘와 같이 울고 싶었다. 비겁한 내 모습에 내가 상처받았다.


단지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중립을 지킨다는 건 그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미이와 진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지 일련의 사건들 앞에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이건 명백히 휘에게 기우는 싸움이었다. 쌍방의 싸움이 아닌 일방적 괴롭힘이었다. 우리가 중립을 지킨답시고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은이의 행동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됐다. 입을 다묾으로써 휘를 괴롭히는 일에 가담했던 것이다. 은이와 정이가 휘를 괴롭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휘를 괴롭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휘는 전학을 가기로 했다. 전학을 가기 전날 휘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너까지 괜한 오해를 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이 나와 미이, 진이, 은이, 휘를 불러다 너네가 휘를 괴롭혔느냐고 추궁한 일을 두고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내 것이 아닌 사과를 받을 수는 없었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휘였다. 그 길로 문방구에 가서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샀다. 엽서도 하나 샀다. 휘의 집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었다. 내일이면 더 이상 휘의 집이 아닐테니까.


휘의 집은 어수선했다. 여기저기 박스와 잡화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 난리통 속에서도 휘와 휘의 엄마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몇 시간 뒤면 휘의 방이 아니게 될 휘의 방에서 나는 가지고 간 것들을 건넸다. 휘는 그 자리에서 편지를 다 읽고는 말했다.

"근데 이 말은 좀 별로야. 여기서 좋았던 기억, 안 좋았던 기억 다 잊어버리라는 말. 좋았던 기억을 왜 잊어?" 휘의 말이 맞았다. 내가 뭐라고, 좋았던 기억까지 잊으라고 한단 말인가. 휘는 나와 다른 사람인데. 어이없게 뺨을 맞고 울면서도 네가 뭔데 날 때리냐며 끝까지 항변하던 휘. 휘는 당당했다. 비겁한 건 나 하나뿐이었다.


알고보니 휘는 이전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을 당해서 이곳으로 전학을 오게 된 거라고 했다. 그래서 여기서 보낸 첫 삼 개월이 정말 행복했다고, 꿈 같았다고. 꿈에서 깨어나 반년만에 다시 이삿짐을 싸는 휘와 휘의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목이 메어 말이 없어진 나에게 휘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연노랑의 액체가 유리잔에서 찰랑거렸다. 휘의 집에선 여름마다 맹물에 유자를 갈아마신다고 했다. 찬물과 유자의 조합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찰나의 단맛이 스치고 지나가면 이내 싱겁고 씁쓸한 뒷맛만이 입 안에서 감돌았다. 마치 휘가 우리 반에 와서 느꼈던 행복감처럼.


"어때?"

"어...휘야...이거...맛이 원래 이런거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휘는 까르르 웃었다.


집에 돌아와서 휘에게 대접받은 유자청물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는 나를 타박했다. 이사갈 집에 놀러갔으면 뭐가 됐든 맛있다고 하고 고맙게 먹을 일이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면서. 생각해보면 번잡스러운 이삿짐 속에서 휘는 나를 대접하겠다고 엄마에게 물어가며 믹서기를 찾았을 것이다. 짐을 다 싸는 바람에 내놓을 게 없어 미안하다던 휘의 엄마는 그 별것 아닌 유자청물을 차마 자기 손으로 주지 못해 휘에게 들려 내게 내밀었을 것이고.


뒤늦게 많이 미안하다. 휘에게.


그 날 휘가 갈아준 유자청물을 맛있게 들이키지 못해서.

내 멋대로 좋았던 기억까지 잊어버리라고 말해서.

휘의 뺨을 때리던 정이를 바로 말리지 못해서.

내내 혼자 싸우던 휘를 그냥 내버려둬서.


지난 날 휘의 괴로움과 내가 무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자향에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휘를 생각한다. 정체모를 연노랑 액체를 내밀며 나의 반응을 기대하던 휘.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끌어안고 지금쯤 분명 괜찮은 어른이 되었을 휘. 휘는 꼭 잘 지내야만 한다, 라고. 부대끼는 속을 진정시키며 유자청을 단단히 봉해 냉장고에 넣었다.


앞으로도 나는 유자청을 꺼낼 때마다 비겁했던 그날의 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게 내가 받아야 할 벌이라면 미약하나마 쓰게 받겠다.

그러나 휘만은 매 여름마다 유자청물을 달고 시원하게 들이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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