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아는 맛 08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필 Aug 22. 2019

내려놓음의 미학, 미니멀 떡볶이

엄마가 만든 떡볶이는 왜 맛이 없을까?

중 3때 우리반으로 전학 온 수는 떡볶이를 유별나게 좋아했다. 수네 집에 놀러가면 행여나 전학생인 딸래미가 반친구들과 못 어울리면 어쩌나 걱정이 많으셨던 수의 엄마는 마치 딸이 신랑감이라도 데려온 듯 환대해주셨다. 그리고 순식간에 집에 있는 재료로 요깃거리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김치볶음밥, 김밥, 떡꼬치...들인 재료나 시간에 비해 수엄마의 요리는 항상 기대 이상의 맛을 냈다.


우리 엄마도 손맛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우리 아파트단지 아주머니들의 워너비였는데 수엄마 역시 만만치 않은 신흥강자였다. 잠시 딸로서의 감정을 내려놓고 얘기하자면 수엄마의 솜씨는 우리 엄마의 자리를 위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아파트단지에 살았기에 나는 박쥐처럼 수엄마와 우리 엄마 사이를 오가며 두 엄마의 손맛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었다.


꼭 수엄마의 손맛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수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학원도 같이 다니게 되었는데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늘 분식집 앞을 지났다. 수는 분식집 떡볶이를 무심하게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매번 사먹지는 못하더라도 떡볶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궁금증.


"야 근데 너네엄마는 왜 떡볶이는 안 해주시냐? 니 떡볶이 엄청 좋아하잖애."

"우리 엄마, 웬만한 건 다 잘하는데 떡볶이는 진짜 아니야."

단호하고 확고한 수의 대답에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야 너네 엄마도? 우리 엄마도!"




스무살 때는 친구들과 모여 살았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에 도취되어 우리는 방종이 특권이나 되는 양 누리려 들었다. 방탕하고 싶지만 하나같이 간이 작아서 제대로 된 일탈은 꿈도 못 꿨다. 우리가 죄책감없이 누릴 수 있는 방종이란 늦은 밤 다같이 먹는 야식 정도였다. 치킨, 피자, 족발, 라면, 늘 거기서 거기인 메뉴를 두고 오늘은 색다른 걸 먹어보자는 토론이 늦은 밤 진지하게 이어지곤 했는데 그 때 꼭 등장하는 것이 떡볶이었다.


지금이야 떡볶이 전문점들이 즐비하지만 그땐 야식전문점에서 얼토당토 않은 가격의 떡볶이를 시켜먹어야만 했는데 그게 영 내키지가 않았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우리는 야식을 즐길 뿐이지 야식전문가들은 아니기에 야식전문점까지 발을 뻗고 싶지 않다는, 암묵적인 공감이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식전문점에 전화를 거는 순간 우리의 야식은 너무 본격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모두 떡볶이를 원하면서도 아무도 선뜻 전화기를 집어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불현듯 누군가 말했다.


"근데 왜 떡볶이는 집에서 만들면 맛이 없을까?"

"헐~너네집도 그래?"

"대박! 난 우리 엄마만 떡볶이 못하는 줄 알았어."

"나는 엄마한테 말했잖아. 떡볶이는 그냥 사먹자고. 그랬더니 엄마가 그때부터 계속 떡볶이에 도전하는데 헐~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어. 진짜 대박이지."

"헐~대박! 너네 엄마 요리 잘하시잖아."


우리는 야식은 까맣게 잊고 <왜 엄마가 한 떡볶이는 맛이 없는가?>라는 주제로 한참동안 열띤 토론을 나눴다. 시대의 지성이라는 대학생들 십여 명이 함께한 그날의 토론에는 "헐~"과 "대박!"이 난무했다.




서른 셋. 나도 엄마다.

집집마다 하나같이 떡볶이를 못 만든다는 <엄마>로 살아온 지 어언 8년차.

뭇 엄마들에게 내려진 떡볶이의 저주는 나에게도 임했을까?


우리집 냉동실엔 항상 떡볶이떡과 어묵이 구비되어 있다. 밥하기 힘든 날, 만만한 게 떡볶이다. 손질한 멸치를 비린내가 날아가도록 살짝 볶는다. 물을 붓고 다시마를 넣고, 파뿌리가 있으면 그것도 넣고 육수를 낸다. 육수를 내는 동안 꽝꽝 얼어붙은 떡볶이떡을 물에 담궈둔다. 십분이면 금방 서로를 놓고 똑똑 떨어진다. 어쩌면 도마를 아예 안 쓰고 요리를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묵을 썰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칼과 도마를 꺼내게 된다. 반은 세모나게, 반은 네모나게 썬다. 도마를 꺼낸 김에 대파도 칼이 가는대로 투벅투벅 썬다. 이걸로 떡볶이에 들어갈 재료준비는 끝.


멸치육수에 고추장 한두큰술, 고춧가루 반큰술 풀고 설탕도 한두큰술 넣는다. 맛술은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좋다. 빨개진 국물에 떡을 넣고, 썰어놓은 파를 반만 넣고 끓이다가 떡에 국물이 배어들면 어묵을 마저 넣는다. 어묵도 빨갛게 물들면 남은 파를 모두 넣고 진간장으로 간을 맞춰 불에서 내린다. 김말이튀김이나 주먹밥을 곁들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한끼 식사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이 먼저 달려와 식탁에 앉는다. 한 놈은 떡을 많이, 다른 놈은 어묵을 많이, 또 누구는 세모난 어묵, 누구는 네모난 어묵을 달라고 제각기 요구사항이 많다.

"엄마가 한 떡볶이가 최고! 최고최고!"
애교 많고 약삭빠른 둘째가 칭찬으로 엄마의 관심을 끌면 첫째도 지지 않고 달콤한 말로 엄마의 환심을 산다.


"나는 엄마가 해 준 것 중에 떡볶이가 제일 맛있어! 밖에서 파는 것만큼 맛있어!"

빈말로라도 거짓말은 못하는 것이 저 첫째다. 엄마의 환심도 중하지만 본인의 양심도 중하다. 차마 밖에서 파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거짓 하나 없는 그 칭찬을 나는 최고의 찬사로 받아들인다.


떡볶이는 밖에서 파는 게 제일 맛있다. 그런데 엄마가 해준 떡볶이가 그만큼이나 맛있다니. 이보다 더한 찬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요근래 <엄마>가 되어서도 이 떡볶이의 저주를 피해간 게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애들 친구집을 오가며 다른집 엄마가 만든 떡볶이를 먹을 기회가 두어번 있었는데 하나같이 파는 것만큼이나 맛있는 게 아닌가.


<우리 엄마>가 만든 떡볶이와 <엄마가 된 우리>가 만든 떡볶이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리 엄마>에게는 있고 <엄마가 된 우리>에게는 없는 것, 내공이다. 내공이 없기에 욕심도 없다. 적당한 재료와 적당한 시간을 들여 적당한 맛을 내는 것이 최선의 목표다. 바로 이 적당함이 어우러졌을 때 최적의 맛을 내는 것이 떡볶이다.


<우리 엄마>가 어디 적당히를 알던가. 그들은 멸치육수에 떡, 어묵, 파, 고추장, 설탕만 넣은 떡볶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육수는 갖가지 채소를 넣어 영양성분을 우려내고, 마늘이라도 콩콩 다져넣고, 양파라도 슷슷 썰어넣고 그러고 나서도 못내 아쉬워 뭔가 넣을 게 없나 찿는 것이 우리네 엄마다. 그렇게 넣을 수 있는 걸 다 넣고 만든 떡볶이는 더 이상 떡볶이가 아닌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떡볶이는 만드는 사람이 많은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떡볶이로 완성된다. 채소도, 마늘도, 양파도, 영양 부족에 대한 걱정도, 부디 내려놓으시라. 아무리 이렇게 말한들, 우리 엄마는 이 중 하나도 내려놓지 못 할 거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러니 내려놓을 것 없는 우리가, 애초에 가진 것 없는 우리가, 떡볶이만큼은 앞으로 쭉 만들어드리는 것도 좋겠다.


가진 게 없어 받기만 했는데 가진 게 없어 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있다니. 미니멀하게 살고 볼 일이다.

이전 07화 싱겁고 씁쓸한 유자청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