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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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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un 15. 2022

단장의 분홍소시지전

모두 진심이었다

엄마는 김혜자 씨를 닮았다. 처연하게 깊은 눈과 처진 입매, 아래로 내려가며 각이 지는 얼굴형까지. 그렇잖아도 닮은 얼굴이, 나이들수록 더 닮아간다. 그 때문인지 나는 김혜자 씨의 연기를 예사로 보아넘기지 못한다. 존재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엄마의 어린 시절이나,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내밀한 속사정 같은 게, 분명 엄마에게도 있었겠거니 생각하면 저 깊은 데서부터 서글픔이 올라온다. 그러다 그만 목놓아 울고 만다.

출처 :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면서도 그랬다.

동석 : 살면서 언제가 제일 좋았어?

옥동 : 지금. 너랑 한라산 가는 지금.

옥동의 대답을 듣는 순간, 11년 전 엄마의 문자가 퍼뜩 떠올랐다.


내가 살면서 젤로 잘한 일이 너를 낳은 거다.

처음이었다. 첫애를 임신해 부른 배를 안고, 서울에 올라온 엄마의 법원 일처리를 종일 도운 날, 엄마는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내게 문자를 했다. 엄마의 문자를 보고 또 봤다. 진심일 리 없었다. 엄마는 오빠를 제일 사랑했으니까.




첨부터 아들만 둘을 낳고 싶었댔다. 아니, 사실은 딱 하나만, 그것도 아들로만 바랐다고 했다. 바라던 아들을 낳고 정관수술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순간의 실수로 내가 태어났다. 안 해도 될 소리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나는 '완벽한 피임'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미처 피하지 못한 임신이었지만 이왕 생긴 거, 둘째도 아들이기를 내심 기대했단다. 시골 의사가 산달이 다 되도록 아기의 성별을 알려주지 않아도, 배모양으로 보나 거침없는 발차기로 보나 아들이 분명하다고 엄마는 철석같이 믿었다.


계획에 없이 얻은 딸은 어찌나 순하던지, 놀러왔던 동네사람이 아기 있는 집이었냐고 화들짝 놀랄 정도로 좀체 우는 일이 없었다. 신통하게도 아기는 어르면 웃고 먹이면 먹고 눕히면 잤다. 모유건 분유건 가리지 않고 받아먹어 포동포동 살이 오르던 아기가 6개월이 되자, 엄마는 안심하고 젖 끊는 약을 먹었다. 웬걸. 그때부터 아기는 분유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젖병을 물려도 빨지 않고, 빈 젖을 빨아도 나오는 게 없으니 아기는 종일 굶었다. 토실토실 복스럽던 살이 다 내리고, 온종일 기저귀가 보송보송한 채로 기진하듯 잠든 아기를 보며 엄마는 애를 태웠다.


일주일만에 고집을 꺾고 분유를 받아먹은 덕에 여태 살아남았지만, 자라는 내내 나는 그때 덜 먹은 젖이 고팠다. 돌이 되도록 엄마젖을 먹은 오빠에게는 없는 기갈이 내게는 있었다. 늘 엄마를 더 많이 갖고 싶어 허덕였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엄마에게는, 나보다 오빠가 더 애틋했다.


오빠는 맏이고, 나는 둘째라서. 아님 오빠는 남자고, 나는 여자라서. 혹은 오빠는 덜렁대고, 나는 야무져서. 어떤 이유였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엄마가 나보다 오빠를 더 귀애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엄마가 내게 소홀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대놓고 서운해할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서운한 걸 티내지 않을 재주도 없어서, 나는 자주 엄마에게 불퉁거리곤 했다. 입으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실은 늘 엄마가 고팠다.


그런 엄마로부터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 너를 낳은 거"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감격스러웠다. 엄마의 진심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빈말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엄마가 내게 그만큼의 마음을 썼다는 게 나를 기쁘게 했다.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배실배실 웃음이 나왔다.




그로부터 또 6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엔 엄마가 재수생인 나를 데리고 서울에 올라와 학원을 등록하고, 방을 구하고, 살림살이를 마련해주었다. 서울이 낯설기는 엄마나 나나 마찬가지였는데, 엄마라는 이유로 앞장서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던 엄마는 얼마나 막막하고 겁이 났을까.


창문도 화장실도 없는 방은 27만원, 창문이 있는 방은 33만원, 화장실까지 딸린 방은 41만원이라는 고시원 총무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는 41만원짜리 방을 결제했다. 역까지 배웅하겠다고 따라나서는 나를 한사코 떠밀며 돌아선 엄마는 단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안아주고 가지. 엄마의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끄러미 보다가, 방에 들어와 울었다.


사시사철 입시생들과 고시생들로 붐비는 노량진 한복판, 그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학원에서 돌아오니 택배가 와 있었다. 하얀 스티로폼 상자 안에 파란색 밀폐용기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꺼내 뚜껑을 열어보았다. 멸치볶음, 오징어채무침, 콩자반, 순 엄마가 좋아하는 거, 아니 사실은 내가 안 먹어서 엄마가 먹어 없애던 밑반찬들이 와락 반가운 냄새를 풍겼다. 마지막으로 유난히 넓적하고 큰 통을 열었을 때,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분홍소시지. 조르고 조르면 엄마가 마지못해 한번씩 사주던, 그 분홍소시지였다. 노란 옷을 입고 켜켜이 담겨 있는 분홍소시지는 그때까지 봤던 어떤 소시지보다도 컸다. 순 싸구려맛이라며, 몸에도 안 좋고 쓸데없이 크기만 크다며 질색할 땐 언제고, 커다란 반찬통 하나 가득 엄마는 분홍소시지전을 부쳐 보냈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큰 그 소시지전을 나는 아끼고 아껴가며 먹었다.

노량진에서도 시계는 간다. 대학에 진학하고, 감질나게 아껴먹던 분홍소시지 맛이 잊혀질 즈음 문득 재수 시절에 배운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엄마, 단장이라는 말 알아?"

"글쎄다."

"옛날에 어떤 병사가 원숭이 새끼를 잡아서 배에 탔는데, 어미 원숭이가 계속 배를 쫓아오는 거야. 그러다 잠깐 배가 서니까 어미 원숭이가 배에 펄쩍 뛰어올라서는 그대로 죽어버렸어. 그 어미 원숭이 배를 갈랐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나 있었대. 그래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과 같다는 뜻으로 단장지애, 단장이라는 말이 생겼대."

한참만에 엄마가 꽉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게 뭔지 안다. 노량진 고시원 앞에 너 놓고 돌아설 때, 내 마음이 그랬거든."


아. 엄마는 울고 있었구나. 행여 내 앞에서 눈물이 터질까 봐, 부랴부랴 나를 떼어놓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엄마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 울며 역까지 걸어갔을 엄마의 모습이 뒤늦게 눈에 선했다. 나를 키우며 엄마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몇번이나 홀로 삼켰을까. 17년 전 그날도 엄마는 끊어질 듯 아픈 창자를 부여잡고, 창자 대신 분홍소시지를 썰었겠지.




아주 어릴 적,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걱정이 태산이던 10대 시절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만약에 만약에 있잖아."

"만약에는 또 뭔놈의 만약에. 쓰잘데기 없이."

"만약에 내가 뇌사판정 받으면, 딱 1년만 기다려주면 안 돼?"

"그게 뭔 소리여?"

뜨악하게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에 몹시 머쓱해졌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라도 하려던 말은 기어이 다 해버려야 하는 게 또 나다.

"아니...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혹시 깨어날 수도 있으니까..."

평소 같으면 따순 밥 먹고 흰소리 한다고 눈을 흘겼을 엄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1년만 기다린다냐. 내 죽는 날까지 기다릴끼다."

내가 들이미는 모든 '만약에'를 경멸하는 엄마가 그때만큼은 왜 그리 격하게 응해주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하게 아는 건, 아주 잠깐이나마 내보였던 엄마의 마음들이 모두 진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채워야 할 그릇이 큰 탓에 늘 엄마의 사랑이 성에 차지 않았지만, 엄마는 내게 자신이 가진 가장 진하고 좋은 것을 부어주었다. 그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오빠보다 더 사랑했는지, 덜 사랑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태어나서 받아본 사랑 중 엄마만큼 큰 사랑을 내게 준 이는 없다. 그것만이, 우리에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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