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졸업을 앞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졸업'과 '크리스마스'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만나자 나와 내 친구들은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들떴다. 축제, 일탈, 이런 단어들을 더듬다보면 자연스럽게 머릿 속에 떠오르는 그것. 옳다거니! 술을 마셔보자. 술이 마셔보고 싶지 않은 열여섯살이 있을까? 누가 누구를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 여섯은 쉽게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모인 친구들 중에는 서울에서 전학 온 새침데기도, 전교 석차 9등에 빛나는 우등생도, 매 주일 교회에서 반주를 도맡아 하던 목사님 딸도 있었다.
학생 때 마시는 술이 특히 달게 느껴지는 건 죄책감이 감미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손끝 발끝으로 퍼져나가는 짜르르한 일탈의 맛. 그러나 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은 말 그대로 술이 마셔보고 싶었던 것이지, 어른들 몰래 금기를 깨면서 느끼는 아슬아슬함까지 탐할 정도로 간이 큰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여섯 명의 계집애들이 죄책감 없이, 누구도 속이지 않고, 대관절 어떻게 술맛을 보겠다는 걸까? 나는 계획이 다 있었다.
날필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이미지출처 : 영화 기생충)
크리스마스 전전날,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날 저녁이었다.
"나 내일 집에 친구들 데려와서 술 마셔도 돼?"
분주하게 오가던 젓가락이 일순간 멈췄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언가를 집기 위해 일제히 상 위를 가로질렀다. 살짝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엄마가 물었다.
"몇 명이나 오간디?"
"다섯. 나까지 여섯."
"누구 누구? 내가 아는 애들이여?"
"신이랑 단이랑 운이랑 수랑 현이."
"그믄 걔들도 즈그 부모님한테 허락맡고 오라 그래."
아부지도 국에 밥을 말며 한 마디를 보탰다.
"어 근디 술은 엄마아부지가 좀 사다주믄 안돼?"
"뭘로 사다주믄 되냐?"
"맥주 아무거나 다섯병? 여섯병?"
"야야 집에 컵이 없다, 캔으로 사다주꾸마."
집에 있는 맥주컵이 여섯 개가 안 된다는 이유로 병맥이 캔맥으로 조정됐을 뿐, '흔쾌히'나 '기꺼이'라는 단어를 붙이기가 머쓱할 정도로 엄마아부지는 대수롭지도 않게 딸의 비상식적인 요구를 받아들였다.
결전의 크리스마스 이브, 잔뜩 들뜬 여섯 명의 얼굴들이 한 평 남짓한 내 방에 둘러앉았다. 미리 부모님들 간에 어떤 합의가 오간 것인지, 또는 다른 부모님들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았다. 하나같이 우리집 전화번호를 남겨놓고 왔다고 했다. 그러나 내 기억으로 그날 밤 딸 가진 어떤 집에서도 우리집으로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당최 전화를 걸어서 뭐라고 당부할 것인가?
"제 딸이 (댁에서 술 마시고 노느라) 폐가 많습니다. 아무쪼록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놀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학생들의 술파티를 주최(?)한 부모와 그 파티에 참석을 허락한 부모 간에 무슨 대화가 오갈 수 있겠는가? 모두가 자기 몫의 민망함을 끌어안고서, 민망함의 연대에서 오는 쾌감을 공유하는 기묘한 밤이었다.
그렇게 특별한 밤이었건만. 그날 밤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희미하게 기억나는 거라곤 행여 남의 집 딸들 춥게 재웠다 소리 들을까 봐 엄마가 방에 불을 엄청 넣는 바람에 밤새 소금세례 맞은 미꾸라지처럼 파닥거리느라 잠을 설쳤다는 것 정도? 그날의 술이 달았는지, 썼는지, 시원했는지, 미지근했는지,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역시 술이란 '몰래 먹는 맛' 내지는 '쪼는 맛'에 먹는 것인가 보다. 어른들에게 허락맡고 느긋하게 마신 술이 우리에게 아무런 인상도, 기억도 남기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다.
내게 오래도록 진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엉뚱하게도 다음날 아침밥상에 오른 북엇국이었다. 그날의 식탁은 왜 그리도 비좁던지. 그날 아침 우리가 느낀 불편함은 4인용 식탁에 여섯이 낑겨앉은 데서 오는 물리적인 부대낌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허락을 받고 마셨다지만 학생이 친구집에서 술을 마시고 그 다음날 아침밥상에 나와 앉는다는 게 느긋하고 마음 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친구집에서 친구엄마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송구스러운데 그게 해장을 위한 아침일 경우엔 어떻겠는가. 그 자리가 불편한 건 그 집 딸이었던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의 밥상엔 여섯 명 분의 민망함까지 빼곡히 들어차 우리가 편히 앉을 자리가 없었다. 불편하게 붙어앉아 마음의 불편함을 덜어보려는 시도 중에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할 그날의 국이 상에 올랐다.
북엇국.
엇. 이런 세상에. 안 그래도 숙취 아닌 수치로 고개를 못 드는 우리들 앞에. 떡 하니 놓여진 북엇국이라니. 생애 첫 술이었다지만 기껏해야 1인 1캔이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우리는 비록 작을지언정 싱싱한 간을 가진 십대들이었다. 숙취를 느껴봐야 얼마나 느꼈겠는가? 설령 숙취가 있었다해도 그게 숙취인지 전날밤 잠을 설친 탓인지 분간할 줄도 모르는 초보 드렁큰타이거들(공교롭게도 다들 호랑이띠다) 앞에 얼굴이 빤히 비취리만치 맑은 북엇국이 1인 1그릇씩 놓였다.
이것은 사랑인가, 증오인가? 배려인가, 고문인가?
대체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북엇국을 준비했으며 북엇국을 끓이면서는 또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오로지 저 속 없는 어린 것들의 놀란 속을 달래주겠다는 자애로움과 측은지심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엄마로 쉰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태생적 짓궂음의 발동이었을까? 엄마라고 해서 자애롭고 현숙하고 숭고한 모성만이 그이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최소한 우리 엄마는 그렇다. 엄마는 은근히 얄궂고 능글맞은 데가 있었다. 가령 본인 집에서 술을 마시고 일어난 딸과 딸 친구들 앞에 북엇국을 끓여 내놓은 뒤 빙글빙글 웃으며 반응을 살피는 그런 장난기 같은 거 말이다.
과연 우리 여섯은 여섯 개의 국그릇을 앞에 두고 민망함의 연대감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국그릇에서 올라오는 참기름 냄새는 또 왜 그리 고소하고 향긋한지. 그 집 딸인 내가 숟가락을 들자 비로소 다른 친구들도 숟갈을 뜨기 시작했다. 그날의 밥상에는 그릇 부딪치는 소리와 물 따르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만이 숨죽여 오갔다.
우리는 왜 그렇게 술이 마셔보고 싶었을까? 술은 판단력을 흐린다. 판단력이 흐려지면 기준이 흐려지고 기준이 흐려지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살다보면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고단한 날이 있으니까, 그래서 어른들은 술을 마신다. 당시 우리는 세상을 흐릿하게 바라봐야만 할만큼 고단해보지 못한 애송이들이었다. 고단함 없이 얻은 술이 무슨 감흥이 있을까. 맹물보다 싱거운 첫 음주. 그 후에 받아든 진한 북엇국이 민망할 수밖에.
설익은 채로 어른의 권위에 기대어 허락되지 않은 자유를 기어이 맛보았을 때 뒤이어 따라오는 민망함의 씁쓸한 맛. 자애로움인지 짓궂음인지 모를 엄마의 의도에 아리송해하면서도 잠자코 퍼먹게 되는 순응의 찝찌름한 맛. 북엇국은 내게 씁쓸하면서도 찝찌름한 부끄러움의 맛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북엇국은 북엇국이어야만 한다. 맞춤법 상으로도 북엇국이 맞고, 느낌 상으로도 북엇국이 옳다.
말간 국물에 얼굴을 비춰보며 지난 밤의 방탕함을 떠올리고, 그 방탕함을 끌어안는 상대의 자애로움 혹은 짓궂음에 멈칫하게 되는, 그 순간의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을 표현하기에는 <북엇국>만한 글자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