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도 무슨 쓸모가 있을까?
아이가 학교에 다닌 지 3주차 화요일 밤. 아이의 동생은 상습적으로 저녁 먹다 고꾸라져 잠이 들고 부엌에선 뒷설거지가 한창이고 거실에선 아이가 책장 넘기는 소리만 사락사락.
"글씨 읽는 거야? 그림 보는 거야?"
"나 엄마가 그려줄 공룡 고르는 중인데?"
- 아 니가 고르면 엄마는 그려주는 거구나.
- 엄마의 의사는 전혀 상관이 없구나.
- 엄마한테 그려줄 건지 말 건지 먼저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냐?
애가 한마디하면 난 항상 세마디 이상이 떠오르는데 하나같이 담백하다 못해 건조한 말들이라 가끔 어른도 상처받는데 아이는 오죽하랴 싶어 꿀꺽 삼킨다.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대신 손이나 부지런히 놀려야지. 아이의 동생이 마구잡이로 한 면만 쓰고 던져놓은 에이포용지의 나머지 한 면을 곱게 편다. 연필은 뾰족하게 깎는다. 여러번 고쳐 그려야 하기 때문에 끝이 뭉툭한 연필이 지우기도 좋은데, 아이는 선이 가는 공룡그림을 좋아한다. 선이 가는 공룡그림이라니. 여리면서 거친 그 자신만큼이나 모순적이다.
이왕 그리는 거 열심히 한 장을 그린다. 일전에 정말 심혈을 기울여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캐릭터를 그려준 적이 있다. 하도 애지중지하기에 예쁘게 색칠도 하고 코팅까지 해서 쥐어줬더니 미련없이 제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줘버리고 온 후로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자랑스러워할만큼, 다른 친구가 보면 가지고 싶어할만큼은 잘 그려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룡그림 한 장으로 아이에겐 늘 너무 짧은 저녁시간의 아쉬움을 달래주고 양치를 시킨다. 이제 정말 시킨다. 입으로 시키기만 하면 제가 알아서 닦는다. 그렇게 입으로 양치를 시키고 먼저 잠든 동생을 등지고 함께 눕는다. 모처럼 동생이 먼저 잠들었으니 아이를 두 팔로 안아줄 수 있다.
"엄마."
"응"
하나님은 쓸모없는 것도 만드셨을까?
이 아이의 의도를 몰라서 대답이 망설여진다. 정적이 길어진다. 이럴 땐 애를 마냥 기다리게 하지 말고 "잠깐만" 양해를 구하라고 아이아빠가 말했었는데. 머릿속으로 아이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하고 의도별로 최적의 답변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나머지 또 애를 마냥 기다리게 한다. 그렇다고 또 마냥 기다리지도 않는 것이 역시 내 아이다.
"엄마 하나님은 쓸모없는 것도 만드셨을까?"
"그래도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슬아슬. 괜찮았나. 나쁘지 않았나.
자 나는 막아냈다.
너의 대답은?
"엄마."
"응"
"그런데 나는 실수를 이렇게 많이 하는데."
"응"
나도 무슨 쓸모가 있을까?
쿵.
아이의 질문에 내가 상처를 받았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말했다.
"그런데 실수라며. 실수할 수도 있잖아."
"실수는 실순데, 다른 친구들은 어쩌다 한번씩 하는데 나는 너무 많이 하잖아."
"음...그래서 걱정이 돼?"
"어 왜냐면. 내가 계속계속 실수하면 그건 실수가 아니고 일부러야."
이건 내가 아이에게 했던 말이다.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그건 실수가 아니고 일부러 한 게 되는 거라고.
"그렇지만 너는 실수한 게 맞잖아. 일부러가 아니잖아."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
"그렇구나. 다른 친구들은 오해할 수도 있겠네."
"나는 하루종일 계속계속 실수만 하는데 나도 쓸모가 있어?"
있잖아.
쓸모라는 건 다른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야.
너의 쓸모는 네가 정하는 거야.
"그럼 다른 사람한테 나는 쓸모가 없어?"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한테 너는.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아빠, 엄마한테 너는 이미 큰 기쁨이고. 또 동생도 너를 정말 좋아하지. 벌써 일곱이지? 또 엄마친구들 슬아이모, 콩쑥이이모, 보람이이모, 승희이모가 너만 보면 늘 멋있다고 하잖아. 벌써 열하나. 그리고 네 친구들. 엄마가 네 친구들은 다 모르지만 친구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열다섯명에게 너는 쓸모있는 사람이지. 그치만 니가 너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얘기야."
"...."
"엄마의 쓸모는 네 덕분에 생기기도 하지. 너를 키우고 너한테 필요할 일을 하는 게 엄마의 쓸모이기도 해. 그치만 그게 다는 아니야. 엄마는 글을 써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래서 생각나는 걸 틈틈히 글로 써."
"엄마. 근데 나는 양보를 잘해."
"그래. 너는 양보를 잘하지. 그런데 양보하다 보면 속상할 때도 있는데 넌 괜찮아?"
"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난 그게 좋아"
"그건 네 마음이 넓어서 그래. 실수는 많이 해도 마음이 넓다는 걸 나도 알고 너도 알잖아. 그걸 아는 친구들이 점점 많아질거야. 오늘 실수 열번했으면 내일은 아홉번만 하고. 그 다음날은 여덟번만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은 실수 한번도 안 하고 오는 날도 생기고. 그러면 되는 거지. 그럼 친구들도 너의 새로운 모습을 볼 기회가 점점 더 많아지는 거지."
"엄마."
"응."
"사랑해"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한 말에 스스로 자극받아 나는 책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글을 쓰겠다며 매일같이 컴퓨터 앞에 앉아 타닥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