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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Oct 14. 2023

식욕이 돌아왔다

알싸~한 마라 맛! 알싸~한 대게 맛! 알싸~한 라면 맛!

옛 동구에서 새 동구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일어난 유의미한 사건들은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가령 첫 배변은 D+2, 첫 샤워는 D+4, 첫 요리는 D+7, 첫 대외활동은 D+13, 이런 식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역사적인 날을 고르라면 <첫 요리>가 가능해지고 <첫 일반식>을 먹었던 D+7일을 꼽겠다. 하루종일 면 생각이 간절했다. 저녁이 되자 사과와 키위, 바나나, 푸성귀 따위로는 누를 수 없는 허기가 침샘을 자극하며 밤샘을 예고했다.


냉장고와 냉동실을 뒤져 파스타 재료들을 꺼냈다. 내일 아침 힘내야 할 동구를 생각해 채소도 많이, 올리브오일도 듬뿍 넣었다. 마지막으로 얇게 저민 백명란을 넣고 뒤적거리자 잘 아는 익숙한 냄새가 퍼져나간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얼마만의 명란파스타인가.

내게 명란파스타는 김밥에 필적하는 소울푸드다

포크로 돌돌 말아 떨리는 마음으로 첫 입. <미스터 초밥왕>, <요리왕 비룡>, 유명한 요리만화 속 작자들이 왜 그리 호들갑을 떨어댔는지 알겠다. 미뢰 하나하나가 깨어나며, 재료 고유의 맛과 식감을 그대로 흡수한다. 올리브오일 특유의 향취를 머금은 파스타면이 혀에 감기면 뒤이어 명란의 감칠맛이 풍성한 조화를 이끌어내고 마지막으로 탱글한 새우살까지 씹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야말로 미미! 내가 살아있는 맛! 감격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생각했다. 나 정말 명란파스타가 많이 먹고 싶었구나. 


D+13일은 아이들 학교에서 학부모 의무봉사가 있는 날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으려는 그 노력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로 모든 활동을 마쳤다. 돌아오는 길, 홀린 듯 집 앞 마라탕 가게에 들렀다. 워낙 맛이 없어 평소엔 가지 않던 집이다. 피곤과 허기에 적당히 타협한 것이다. 몇 입 먹고 말 생각으로 젓가락을 들었는데 이게 웬걸. 천하일미의 마라탕이 우리집 앞에 있었다니! 국물만 남은 그릇을 바라보며 생각을 바꿨다. 내 몸이 진정으로 원한 건 마라탕이었구나. 포만감과 충만감을 느끼며 스마트폰을 켰는데 <마라탕 먹고 목의 통증을 호소하다 입원한 지 10분만에 사망한 20대 중국 여성> 기사가 떴다. 갑자기 목이 따끔따끔한 건 기분 탓이겠지. 치질 수술 2주만에 겨우 살만해졌는데 이제 와서 마라탕 때문에 죽을 순 없다.


다행히 무사히 다음날을 맞이했다. 이날은 대게를 먹었다. 대게를 좋아하는 첫째를 위해 이맘때면 연례행사처럼 대게를 주문한다. 원래 갑각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발라먹지도 못하는 데다가, 아이들이나 실컷 먹었으면 싶어 으레 뒤로 빠져있는 나에게 남편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계속 대게살을 들이밀었다. 성의를 봐서 하나 먹어볼까. 입에 넣는 순간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 대게 먹고 싶었네! 내가 너무 선전하는 바람에 대게가 모자라 대게라면을 끓였다. 한 젓가락 먹자마자 감탄사가 나왔다. 대게라면, 나 너 먹고 싶었냐?


세상의 모든 음식이 맛있다. 먹는 족족 내가 원했던 그 맛이다. 당연한 일이다. 배변에 좋은 음식은 대체로 무르고 슴슴하고 산뜻하다. '맛'이란 상당히 주관적인 요소지만 일반적으로 '맛있다'는 평을 받는 음식들은 이와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일주일을 자연인처럼 먹다가 쫄깃하고 짭짤하고 기름진 속세의 음식이 들어가면 을매나 맛있게요? 뒷구멍이 살만해지니 목구멍이 절로 열린다.


D+15일. 드디어 모든 약을 끊었다. 추가 진통제는 물론이고 하루에 세 번 챙겨먹던 복용약도 이제 없다. 약발없이 쌩짜로 큰일을 보려니 새삼 버겁다. 약도 약이지만, 식생활에서 고삐가 풀린 것도 한몫한다. 긴장을 늦추지 말고 하루 한 끼는 꼭 쌀러드를 먹어야겠다. 쌀러드를 먹은 날과 안 먹은 날, 물을 많이 마신 날과 적게 마신 날, 바깥음식을 자제한 날과 그렇지 않은 날, 이 세 가지 요소는 다음날 배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뭐 이렇든 저렇든 신호가 오면 '나는 시방 몹시 위험한 짐승이다'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어필하며 화장실까지 종종걸음을 쳐야 한다는 것은 똑같다. 통증 때문에 심리적 여유가 줄어든 건지, 짧아진 직장으로 인해 물리적 여유가 줄어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변의를 참기가 어렵다. 같은 이유로 의지와 상관없이 가스가 배출돼서 당황스러울 때도 많다. 뿡실금이라는 귀여운 말로 포장해봤자 그냥 아무데서나 방구 뀌는 아줌마일 뿐이다. 공공장소에서 뿡뿡거리는 아줌마아저씨들을 경멸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모습을 답습하고 싶지는 않다. 가끔 괄약근이 가스를 놓칠지언정 우아하게 살려는 의지만큼은 놓지 않겠다.


불안정한 시선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나를 보게 된다면, 제발 못 본 척 해달라.

함께 걷다 내 뒤에서 수상쩍은 소리가 나더라도, 부디 못 들은 척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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