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필 Oct 14. 2023

특기는 나태, 취미는 등산입니다

산, 너 내 '비빌 언덕'이 되라

"아직 부기는 있지만 잘 아물었네요. 지내다가 불편하면 오세요."

수술 후 2주 경과, 일상적 걷기와 장시간 승차가 가능해졌다. 오랜만에 근교 나들이를 다녀온 주말을 끝으로 남편은 재택근무를 마치고 회사로 복귀했다. 고맙소, 남편.


동구만 아물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던,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 살림과 육아에 매진하겠다던, 정돈된 집에서 청결한 옷을 입고 정갈한 밥을 먹으며 살게 해주겠다던 나의 다짐은 어떻게 됐을까? 글쎄.

* 타성 : 오래되어 굳어진 좋지 않은 버릇. 또는 오랫동안 변화나 새로움을 꾀하지 않아 나태하게 굳어진 습성.

이만큼 나를 잘 설명하는 단어가 있을까.




남편은 회사로 아이들은 학교로 떠난 평일 오전, 늘 하던대로 스마트폰을 들고 누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킬링타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워만 있었는데도 배가 고픈 걸 보면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다. 욕설과 자극이 난무하는 유투브 동영상도, 남녀갈등과 세대분열을 조장하는 SNS 게시물도, 신물이 난다. 제일 지긋지긋한 건 그러면서도 이 굴레를 끊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아니, 사람으로 뭉뚱그리지 말자. 나라는 인간은 참 얄팍하다. 극심한 고통 앞에서 그저 아프지 않기만을 소망했던 때가 언제였는가 싶다. 동구만 나으면 이전의 나를 버리고 열심히 살겠다던 그 다짐은 어디로 갔나. 동구는 새 동구인데, 사람은 새 사람이 아니다. 어느 새 나는, 너무 쉽게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있었다.


반전의 기회는 갑자기 찾아왔다.

'산에 가고 싶다.'

어김없이 스마트폰을 들고 누워 있던 오전, 불현듯 떠오른 여섯 글자에 홀린 듯 일어섰다. 작은 힙색에 물과 폰을 챙겨 그대로 집을 나섰다. 집 앞 놀이터에서 시작되는 계단은 곧바로 산 입구까지 이어졌다. 망설임없이 계단을 올랐다. 방금까지 누워있던 몸뚱이가 의식을 따라오지 못하고 삐걱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가겠다는데 제가 어쩔 것인가. 끌려가다 보면 결국 의식과 함께 정상에 서 있을 것이다. 치질 수술 후 3주가 지난 시점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완치까지는 통상 6주가 걸린다), 정 안되면 도중에 내려오면 된다.


늘 이런 식이다. 생각이 떠오르면 앞뒤 재지 않고 행동에 옮긴다. 설거지를 하다가 빨래를 개고 빨래를 개다 말고 청소기를 돌린다. 아무것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하루가 흘러간다. 그러나 이런 충동적인 기질이 내 삶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 난데없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별안간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기로 마음 먹은 것도, 갑자기 산으로 달려간 것도, 모두 충동성 덕분이다. 그러니 마냥 나쁘기만 한 게 세상에 있으랴. 


제대로 된 신발도 없이 산을 오르려니 쉽지 않다. 진입로가 특히 험했지만 가쁜 숨이 몸 안에 쌓인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해 오히려 좋았다. 내 기분을 내가 바꿨다는 것, 몸을 움직여 나태의 굴레를 끊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가 좋아하는 말


숨이 터질 것 같은 오르막도, 언제 다 오르나 싶던 계단도 한 발 한 발 아무 생각없이 딛다 보면 지나온 길이 되어있는 게 짜릿했다. 중간중간 동구가 제동을 건다 싶을 땐 보폭을 좁히고 천천히 걸으면 곧 괜찮아졌다.


잠시 내리막을 만나 한숨 돌리던 중에 짐승의 똥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고라니가 많이 출몰하는 동네 특성을 고려하면 고라니 똥일 가능성이 높다. 몇 번 마주쳤던 기억 속의 고라니는 생각보다 덩치가 큰 동물이었다. 그만한 덩치로 겨우 콩만한 똥을 누다니, 고라니는 좋겠다. 치질 수술해도 걱정 없겠네. 아니 아니, 애초에 치질에 걸릴 일이 없구나. 가만, 그러고보니 네발로 걷는 짐승은 치질에 안 걸린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인류는 직립보행과 동구건강을 맞바꿨구나. 치질이야말로 인간다움의 결정체구나. 그러니 난 퍽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사고회로가 정말 좋다. 나는 언제나 내 편이다.

고라니 똥(으로 추정되는 것)


어떻게 시작해도 결국 그쪽으로 빠지는 개'똥'철학을 주워섬기며 걷다보니 어느 새 정상이 보인다. 정상까지 딱 50분 걸렸다. 50분 내내 한 가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치질투병기를 기록으로 남기기로. 제목은 찌질치질. 한 문장이라도 날아갈새라 하산길에 부랴부랴 녹음한 <찌질치질>의 도입부 녹취본을 공개한다. 

나는 참을성이 좋다. 참을성이 좋다는 건 때때로 장점이 되기도, 단점이 되기도 한다. 가래로 막을 걸 대충 호미로만 막아도 별 탈 없이 버텨준다는 점에서는 큰 장점이며, 그렇게 호미로 막은 결과가 야금야금 쌓여 결국은 포크레인을 불러와야 할 정도로 일을 키우고 마는 건 치명적인 단점이다.
그동안 민간요법과 임시방편으로 잘 조여왔던 내 괄약근은 어느 날부턴가 나의 통제를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더니 급기야는 찢어지기에 이르렀다. 평생 내 눈으로 동구를 들여다 볼 일은 없겠지만, 보지 않아도 않다. 그는 필시 반만 깐 망고스틴을 닮았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쏴아아아- 바람에 나뭇잎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아파트와 상가가 즐비한 사람들의 동네에서는 고요가 기본값이라, 바람이 유발하는 소리는 자칫 비상상황으로 인식되기 쉽다. 심지어는 바람더러 광풍이란다. 미친 바람이라니, 바람에 무슨 의도가 있겠는가. 사람이 헤아리는 대로 불리워질 뿐이다.


산은 다르다. 바람이 불면 수많은 나뭇잎이 일시에 흔들린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소리가 묘하게 위안이 된다. 좀 흔들려도 된다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게 당연하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산이 좋아졌다.

내일도 산에 가고 싶다.

이전 11화 식욕이 돌아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