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스틱과 등산화, 그리고 무서움에 대한 고찰
올여름은 유난히 비가 자주 왔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순간 산에 가고 싶은 나로서는 잦은 비가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나는 답을 찾아냈다. 늘 그랬듯이.
생애 첫 우중 산행을 마치고 등산 스틱을 주문했다. 비 오는 날엔 내리막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받쳐주는 용도로, 평상시엔 팔다리를 고루 움직이게 해주는 용도로, 제 3의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구매후기와 평점을 보고 선택한 3만 5천원짜리 등산 스틱은 생각보다 견고했고, 생각보다 짐스러웠다. 처음으로 등산 스틱을 짚고 산에 오른 날, 괜히 돈만 날렸나 후회가 됐다. 무게감이야 그렇다 쳐도 그 길이감이 참으로 성가시다. 짧으면 짧은대로 길면 긴대로 거추장스럽다.
다음날 현관을 나서기 전, 우산통에 꽂힌 스틱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두고 갈까. 에이, 속는 셈 치고 열 번만 써 보자. 기왕 샀으니 3만 5천원어치는 써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산에 들어서자마자 아까의 결정을 후회했다. 역시 스틱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막 속도가 붙으려고 하면 돌부리나 나무뿌리, 여기저기 걸리는 통에 흐름을 깨놓질 않나, 제가 나를 밀어주지는 못할 망정 내 손에 매달려 끌려오질 않나, 애물 단지가 따로 없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스틱을 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투덜거린 게 무색할 정도로 스틱은 시시각각 팔다리와 합을 맞춰갔고 걸음걸음에 추진력을 더해주었다. 신세계다! 여태 등산 스틱 없이 걸은 걸음은 죄 헛걸음이었구나!(매사에 극단적인 편이다) 나중엔 등산 스틱이 팔의 일부인 듯 손에 착 붙었다.
등산 스틱 덕분에 우중 산행의 부담이 반으로 줄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걸음걸이로 한시간 반을 오르내리고 나면 무릎과 발바닥이 시큰거렸다. 더군다나 원래 신던 운동화는 접지력이 부족해 비오는 날 내리막길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빗길에 미끄러져 하마터면 크게 접질릴 뻔했던 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7만원짜리 등산화를 주문했다. 접질리는 것도 문제지만, 접질리면 산에 못 가는 게 더 문제다.
등산화를 신고 첫 발을 떼는 순간 제동이 걸렸다.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답답하고 무거웠다. 벌써 이렇게 무거운데 정상까지 어느 세월에 오른담. 천근 같은 한 걸음을 천 번쯤 옮겨놓았을까? 시시각각 신발의 무게감은 줄어들고 안정감이 배가되었다. 내리막길에서 등산화는 더 확실하게 위력을 발휘했다. 발을 내려놓을 때마다 땅에 밀착되는 느낌이 과감한 딛기를 가능하게 했고, 발바닥부터 발목까지 느껴지는 단단한 쿠션감이 무릎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등산을 시작하고 구매한 장비는 등산 스틱과 등산화, 두 개가 전부다. 두 아이템은 지금까지 50여회의 등산에 함께하며 제몫을 다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발을 옮기기 전엔 짐스럽게 여겨졌던 물건들이 결국 정상을 향한 걸음걸음에 추진력을 더해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인생은 반전투성이다. 사실은, 살면서 짐이라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그랬다.
실체를 알았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육아가 그랬고, 해봤자 별 거 없는 주제에 안 하면 대번에 티가 나는 살림이 그랬다. 허황되다 생각했던 출간의 꿈이 그랬고, 늘 나를 초조하게 만드는 수상의 꿈이 그렇다. 무겁다. 짐스럽다. 지금이라도 내려놓으면, 벗어버리면, 편해질 거 같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아이를 키우며 시야를 넓혔고, 살림을 돌보며 정신을 다잡았다. 출간을 꿈꾸며 글쓰기를 시작했고, 수상을 꿈꾸며 박차를 가한다. 스스로 짊어진 짐들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한 발 한 발 옮겨 뜻하는 곳에 이르려는 지금의 내 모습이 나는 퍽 마음에 든다. 그러니 별 수 없다. 앞으로도 등산 스틱과 등산화로 무장한 채 정상을 향해 걸을 수밖에.
비 오는 날 등산을 방해하는 요소는 빗길 말고도 또 있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음산한 안개가 끼던 날, 오전에만 잠깐 비가 그쳐 유난히 시야가 흐릿하던 어느 날은 등반을 포기하고 내려오던 아주머니를 만나 정상까지 동행했다. 3년째 매일 산에 다닌다는 아주머니도 안개가 자욱한 날은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확실히 안개가 내려앉은 산길은 묘한 위압감을 준다.
누군가는 묻는다. 혼자 산에 가면 무섭지 않으냐고. 세상이 험하니 비 오는 날은 하루쯤 쉬는 게 좋지 않겠냐고. 글쎄. 조금도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산에 가고 싶은 열망을 막아설 정도는 아니다. 고개를 쳐들고 가슴을 펴고 걸으면 많은 위험이 나를 비껴갈 거라 믿는다. 물론 근거 없는 믿음이다. 사실 사람보다 무서운 건, 실체가 없는 존재들이다. 소신발언하자면 나는 사람보다 귀신이 무섭다. 쫄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데다가 간접경험으로 몸집만 잔뜩 부풀려놓은, 예측 불가능의 공포가 싫다.
신기하게도 땀이 나기 시작하면 공포에 무감각해진다. 역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순간엔 많은 감정들이 대수롭지 않아진다. 미움도 슬픔도 무서움도. 움직임이 격하면 격할수록 더 그렇다. 한참 오르막을 오르는 중에 갑자기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불쑥 튀어나온다면 무서움보다는 울컥 분노가 치밀어오를 것 같다. 안 그래도 힘든데 공연히 사람을 놀래키냐며 등산 스틱으로 한 대 후려칠 수도 있을 터다.
귀신보다 무서운 건 나태와 무기력에 절여진 나다. 지면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은 호시탐탐 방바닥에 누울 기회를 노리는 나를 떨쳐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매일 산에 오르고 싶다. 그리하여 나를 지배하던 타성을 벗어던지고 의욕과 열정으로 충만한 일상을 살고 싶다.
이쯤에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건 등산일기가 아니라 투병일기라는 사실을.
자, 그래서 동구는 어떻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