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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Oct 18. 2023

치질수술이 안팎으로 미치는 영향

수술하길 잘한 거 같냐고?

치질 수술 후 5개월이 지났다.

후기 인증. 좌욕기 준다고 해서 정성껏 썼다.

사람들은 물어온다.

"수술하길 잘한 거 같아요?"

아직 모르겠다,고 답하면 재차 묻는다.

"그래도 하기 전보단 나을 거 아니에요?"

물론이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 새 삶을 살게 되었다고 봐야 옳다.


"하는 게 나아요, 안 하는 게 나아요?"

이전 글에서도 밝혔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는 아직 많은 <보기>와 <여유>가 남아 있다. 찌질치질 1화부터 정독한 후 스스로 선택하길 바란다. 5개월 전으로 돌아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아침마다 후두부를 강타하는 아픔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고, 이 아픔에서 벗어날 길은 수술뿐이라는 걸 직감했으니까. 그러나 타인에게 치질수술을 권하는 건 또 다른 얘기다. 고작 5개월 쾌적하자고 이 고통을 겪을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적어도 3년은 지나봐야 치질수술의 실효성과 가성비에 대해 논할 수 있지 않을까.




말이 나온 김에 수술 5개월따리가 조심스럽게 밝히는 치질수술의 효용은 다음과 같다. 


1) 외출 시 배변이 두렵지 않다.

수술 전의 나는 밖에서 큰일을 볼 수 없는 몸이었다. 함부로 동구를 풀어놓았다간 온종일 동구와 함께 세상구경을 해야 했으므로. 결혼 이후 외부활동이 거의 없는 칩거형 인간이 된 데에는 치질의 발병도 한몫했다. 바깥에서 신호가 올 때마다 온수 샤워시설을 갖춘 화장실을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제는 문제 없다. 배변 타이밍에 맞춰 외출 시간을 조정할 필요도, 밖에서 음식 섭취를 자제할 필요도 없다. 외출 배변이 가능해지고부터 삶의 질은 비약적 ·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이토록 쾌적한 뒷맛이라니!


2) 소재가 생기고, 기록이 남는다.

<찌질치질>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성립해야 한다.

- 글쓰기를 좋아한다

- 치질수술 경험이 있다

- 타인의 관심을 갈구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한 몸에 지닌 사람. 나다. 국내 최초의 치질 에세이같은 거, 내가 아니면 누가 쓰겠나. "남들은 숨기려고 야단인데 넌 왜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냐"고 엄마는 나를 염려했지만, 그건 정말 날 모르는 소리다. 바로 그래서 쓰는 거다. 인생은 짧고 인내는 더 짧은데, 뭣하러 남들이 다 쓰는 얘기를 쓰면서 시간을 허비하겠는가. 자고로 블루오션이라야 구미가 당기는 법이다.


3) 겸손해진다.

원체 남의 염병이 제 고뿔보다 못한 법이라지만 나는 정도가 심하다. 아이를 낳고선 출산의 아픔을 뛰어넘는 고통은 흔치 않을 거라 속단했다. 그 대단하다는 출산을 두 번이나 겪으면서도 진통제 한 알 삼키지 않은 나 자신이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같잖게스리. 어디 그뿐인가. ADHD아이를 기르면서는 세상에서 제일 힘든 육아를 하는 양, 한없는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했다.

아직도 세상엔 내가 모르는 아픔이 존재한다. 많은 이들이 각각의 이유로 감히 헤아리기도 힘든 강도의 아픔을 감내하고 있다. 출산의 아픔을 뛰어넘는 치질 수술의 고통을 겪고 나서도, 나의 아픔에 골몰한 나머지 잠시 그 사실을 잊었다.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워준 한 독자님의 댓글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너무 생생하게 써 놓으셔서 괜히 잘 있는 동구 쪽을 '툭툭' 두드려 줬네요. 그나마 아프지 않은 동구가 기특해서요. 그리고 위로가 되실진 모르겠지만 너무 큰 통증은 비명소리가 나오질 않는 답니다.


4) 뒤끝이 짧아진다.

물리적 뒤끝을 제거했는데, 심리적 뒤끝도 덩달아 짧아졌다. 몸이 주는 고통이 줄어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일까. 최근 두 달 사이에 오래 묵은 감정 몇 개를 정리했다. 그렇게 미워했는데,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고 소소한 농담을 건넬만큼 마음이 풀렸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미움을 틀어쥐고 놓지 않았는지 우스웠다. 관계가 틀어진 계기가 누구였든, 틀어진 방향을 고집한 건 나였다. 발단은 상대였을지 모르나, 전개-위기-절정은 나도 같이 썼다. 문득 결말만은 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먹었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관계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당시에는 그 뜻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남는 영화대사가 있다.

넌 꼭 낚시바늘같아. 하나만 집으려 해도 다 끌려올라와. 그래서 난 그냥 포기해.

마치 낚시바늘처럼 하나만 건드려도 심연에서부터 올라오는, 미움의 덩어리를 다스리는 법을 이제는 안다. 그건 바로, 하나만 집으려는 시도를 멈추는 거였다.


5) 뒷심이 강해진다.

뒷심
1. 남이 뒤에서 도와주는 힘.
2. 어떤 일을 끝까지 견디어 내거나 끌고 나가는 힘.

사람들은 몸의 한계를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고 스스로 다그치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내가 정신력은 안 되지만 체력은 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런 착각에 빠진다. 그들에게 부족한 건 '의지'가 아니라 '건강'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꾸준하게 등산을 가는 의지력도 동구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다. 

어쨌든 등산을 가기로 마음먹은 것도 다 정신력 아니냐고? 내가 치질 수술로 2주를 누워 지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당시 나는 기운이 남아도는 상태였다. 기운이 뻗치니 비로소 움직일 마음이 생긴 것이다. 치질수술은 내게 충분한 휴식과 더불어 무언가를 꾸준히 지속할 뒷심을 주었다.




적어도 3년은 지나봐야 치질수술의 실효성과 가성비에 대해 논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한 주제에 혓바닥이 길다. 생각보다 치질 수술로 얻은 게 많아 머쓱할 지경이다. 수술, 하길 잘한 거 같다. 거 좌욕기 받으려고 쓴 글은 아니니 오해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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