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이어서 다행이야
산에 오른지 4개월째. 산에 오른 날수로만 치면 50일이 채 안 되지만 그마저도 뿌듯해서 다녀온 날은 꼭 달력에 동그라미를 친다. 이렇게 오래 지속한 운동은 등산이 처음이다. 헬스는 이틀, 요가는 한 달, 달리기는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등산의 가장 큰 매력은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르막과 내리막, 평지가 번갈아 나타나며 걷는 재미를 주고 철마다 바뀌는 꽃과 나무열매, 날짐승들이 보는 재미를 준다. 초입부터 정상까지 재미 요소가 가득한, 산이 좋다.
주로 혼자 산을 탄다. 내 속도에 맞춰 나의 감각과 사유에 집중하며 걷는 '혼산'의 장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 허리통증이 사라졌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은 탓에 간간이 허리가 나간다. 정작 몸의 주인인 나는 격동의 사춘기 때도 가출이라는 행위를 꿈꿔본 적이 없는데, 왜 내 몸의 문제 부위들은 하나같이 몸밖을 탈출하려는 방식으로 자신의 고충을 어필하는지. 까딱하면 "어어, 자꾸 이러면 나 나가? 확 나가버린다?" 협박을 시전한다.
그렇게나 막 나가던 우리 허리가 달라졌다. 산에 다니고부터다. 이번주 내내 마감을 달리느라 산에 가지 못했다. 게다가 하루에 다여섯 시간은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 했다. 다행히 등산으로 단련된 허리는 아직까지 잘 버텨주고 있다. 덕분에 글도 술술 풀린다. 글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와 허리로 쓴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2) 체력이 늘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3일이고 5일이고 짐가방을 방치한다는 내 말에 지인 S는 "미쳤다"고 했고, 또 다른 지인 J는 말을 잃었다. 동감이다. 나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다. 나라는 인간은 왜 이다지도 게으른가. 가방이 일주일째 같은 자리에서 발에 치여도, 가방 속 빨래에서 쉰내가 진동할 것이 뻔히 예상되어도, 좀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적어도 여행한 날수만큼은 쉬어야 비로소 가방을 열어볼 마음이 든다.
치질수술 후 지금까지 두 번의 여행(2박)과 명절(4박)을 치렀다. 그때마다 집에 돌아온 즉시 짐정리를 하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거실 구석에 서 있는 여행가방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당장 가방을 풀어 입은 옷과 안 입은 옷, 버릴 것과 챙길 것을 구분한 다음, 빈 가방을 창고에 넣어버려야 두 발 뻗고 편히 누울 수 있다. 정신이 바뀐 게 아니다. 체력이 늘어난 덕분이다. 활동량이 평소보다 많았던 날이라도 쉬이 퍼지지 않고 취침시간까지 버틸 수 있을만큼 하루치 에너지가 늘었다. 전보다 한 칸 많은 배터리바로 사는 희열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3) 시작이 빨라졌다.
살림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원체 손이 느린 데다 12년째 살림이 손에 붙지 않아 그렇다. 내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던 지인은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언제까지 싱크대 앞에 서 있을 참이냐고, 짚으로 놋그릇이라도 닦는 거냐고. 그러니 살림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진이 빠진다. 방이라도 닦을라치면 30평 집이 대연회장처럼 느껴진다. 산 입구에 서면 정상이 까마득하게 멀어보이는 것처럼.
매일 산에 간다고 정상이 1cm씩 가까워지는 건 아니다. 정상은 언제나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정상까지 어느 세월에 가겠냐며 산 입구에서 미적거리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정상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 생각을 그치고 한발한발 걸을 때 목표는 가까워지고, 결국 정상에 서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모든 일이 그렇다. 안 하는 것보다는 느리게라도 하는 게 빠르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를 일상에서 매일같이 실현하다 보니, 첫걸음의 힘을 믿게 됐다. 덕분에 오늘도 느릿느릿 손을 놀려 접시를 닦고 방을 닦는다. 안 하는 거보단 빠르니까.
4) 글이 깊어졌다(고 한다).
쑥쓰럽지만 이건 자평이 아니라 타인의 평이다. 그것도 가장 신랄한 독자인 남편의 평가다.
산을 타더니 글이 깊어졌다는 그의 칭찬에 계면쩍어 '산을 타서일까, 동구가 타서일까' 실없는 농담으로 응수했지만, 인과를 따질 수 없다는 걸 안다. 따질 이유도 없다. 어차피 지금의 나는, 대과거의 나와 과거의 내가 빚어낸 최선의 결과물이니까.
산길을 걷다보면 수많은 생각이 지나간다.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강의 준비가 버거울 때, 앉아서 초조해하기보다 산으로 쫓아가면 뜻밖의 답이 떠오르곤 했다. 할 일을 내버려두고 '즐거움'으로 도피하는 것을 경계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산만은 다르다. 산은 언제나 기꺼이 나를 받아준다. 산의 품에서 거닐며 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실마리가 보인다. 설령 실마리가 보이지 않더라도, 산에서 얻은 영감과 에너지는 다시 일에 매진할 힘을 준다.
역시 등산이 최고다. 등산찬가라도 부르고 싶다.
등산을 만나고 바람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등산을 만나고 나무와 마주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스틱을 짚고서 힘이 들면 땀을 훔칠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산이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원곡 : 다행이다-이적)
그런데 말이다. 노래 말미엔 어쩐지 자꾸 다른 결의 가사가 떠오른다.
등산을 만나도 여전히 게으름을 피울 수가 있어서...
사람 참 쉽게 안 변한다. 오죽하면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