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면 진짜로 죽을까?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은 어쩌면, "사람이여, 죽을 때까지 변하라"는 현자의 은밀한 메시지가 아닐까.
그저 생긴대로 살다 죽으라는 독설이 아니라,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라는 독려가 아닐까.
등산만 다녀오면 그대로 건실하고 보람찬 하루가 펼쳐질 줄 알았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설거지를 마친 뒤, 방을 치우고 도서관으로 직행. 글 쓰다가 막히면 책 읽고, 책 읽다가 풀리면 다시 글 쓰는 그런 일상이 쭉 이어질 거라 믿었다.
이런 건 예상에 없었다. 그러니까 등산을 다녀와서도 얼마든지, 누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오히려 등산을 다녀왔다는 보상심리 때문에 한층 더 당당하게 게을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자칫 스마트폰이라도 켰다간 오전을 날리는 건 예사다. 일도 없이 스마트폰을 찾고, 한번 쥐면 놓지 못한다. 아무래도 도파민 중독 같다.
등산은 등산이고 일상은 일상이다. 등산이 아니라 등산 할애비를 다녀와도, 등산복을 여기저기 늘어놓고 누워서 유투브나 본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등산으로 얻은 에너지를 일상에 접목시키는 것 또한 내 몫이다. 매 순간 나를 어르고 달래 일으켜야 한다. 인생, 피곤하다.
여전히 살림이 싫다. 누구는 빨래가 다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지를 못해 탈수 중간에 세탁기를 멈추고 곧장 건조기로 직행한다는데, 나는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는 신호음 따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세 시간은 버틸 수 있다. 인간이 세탁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제 페이스대로 행한다는 점에서는 그이나 나나 퍽 능동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역시나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사고회로가 사랑스럽다. 나는 나의 골수팬이다.
요리가 자기효능감을 높여준다는데,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살림에 치여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하면 밥을 지을 때마다 자존감이 떨어진다. 나의 존재이유는 밥이구나, 되도 않는 자기비하에 빠져있다가 "오늘 저녁은 뭐야?"라는 물음에 울컥 화가 치민다. 그런데 왜 화가 나는지를 생각해보니, 나의 존재이유는 밥이 맞기 때문이더라. 존재이유를 부정하니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밥을 짓는 것이, 방을 닦는 것이 나의 일이다. 주부가 된 이상 내게는, 나를 포함한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쾌적한 공간에서 건강한 음식으로 힘을 얻어 밖에 나가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도록 서포트할 의무가 있다. 다행히 이제는 근면을 지속할 뒷심과, 첫걸음을 망설이지 않는 추진력이 있다. 수술과 등산이 내게 남긴 것들이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했던가. 수술도 등산도 인생을 거저 먹는 치트키가 되어주지 않는다.
지난 10년, 동구가 아파서 근면이 어려웠던 나날들. 그때는 동구만 나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러나 동구가 낫는다고 저절로 근면해지는 일은 없었다. 수술 전보다 일상이 수월해진 건 사실이지만, 나태했던 10년을 말끔히 지우고 새로운 나날이 펼쳐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근면에 다가섰나 싶다가도 순간의 나태로 나락까지 떨어지는 일상이, 여전히 반복됐다. 건실한 루틴, 그거 어떻게 만드는 건데?
내가 원하는 하루를 그려본다. 만일 오늘이 건강한 동구로 누리는 마지막 날이라면 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아침엔 등산을 가겠다. 돌아와선 청소와 빨래를 마친 뒤 깨끗한 집을 뒤로 하고 근처 3층짜리 프렌차이즈 카페에 갈 거다. 콤부차를 하나 시켜놓고 3층에 앉아 글을 쓰겠다.
2시쯤 생협에 들러 간식거리와 저녁장을 보고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와 있을 테다. 들어서자마자 먹을 걸 찾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내어주고, 숙제하는 아이들 옆에서 중간중간 질문에 답해주며 책을 읽겠다. 4시부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저녁준비를 시작할 거다. 밑반찬 가지가지 지어 5시 30분엔 밥상을 차려야지. 밥만 뜨면 저녁을 먹을 수 있게 준비해두고 짬이 나면 오전에 쓴 글을 찬찬히 읽어보겠다. 저녁상을 치우는 즉시 설거지를 시작해 9시엔 부엌문을 닫는다. 10시에 아이들과 성경책을 읽고 할 수 있는 한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 혹시나 나의 근면에 감복한 동구가 내일을 허락한다면 내일도 산에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산악인, 작가, 엄마, 생활인이고 싶다.
그걸 바로 오늘 동구가 멀쩡한 지금, 하면 된다. 동구가 멀쩡하다고 절로 근면해지지는 않지만, 근면하기 위해선 필히 동구가 멀쩡해야 하니까. 새 동구가 언제까지나 건재하게 버텨줄거라 기대하지 말고 동구가 멀쩡한 오늘을 십분 활용하는 거다. 그러고 보면 시한부 동구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덕분에 뒤탈 없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멀쩡한 동구로 흘려보내는 시간을 아까워하게 되었으니까.
모든 글에 빠짐없이 <투병일기>라는 태그를 붙이면서 스스로도 겸연쩍었다. 치질 수술도 투병鬪病으로 치나. 고작 이따위 고통에 투병이라는 말을 갖다 써도 되나. 고민하면서도 결국 <투병일기>이기를 고집한 건, 지금까지 내가 싸워온 병이 비단 치질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5개월은 '나태'라는 고질병과 싸워온 내 삶의 축소판이다. 내가 싸워 이기고 싶었던 대상은 결국 나였다. 자꾸 발을 뻗고 누우려는 나를 거스르는 힘, 매 순간 일상을 일으키려는 힘이 나를 바로서게 한다. 수술도 등산도 해답이 아니다. 답은 나다.
서른 일곱. 앞으로도 치질 수술에 필적할 고비들이 지나갈 것이다. 그때마다 산악인의 열정과 생활인의 나태가 엎치락 뒤치락 승기를 잡으려 다투겠지. 솔직히 자신 없다. 그래도 서른 일곱, 망해도 망한 게 아닌 나이다. 급할 것도, 낙담할 것도 없다. 살아 있는 한, 변할 수 있다. 기회는 죽을 때까지다. 죽기 전엔 내가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