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의, 동구에 의한, 동구를 위한 삶
배변 후 통증은 2주 동안 계속됐다. D+7일부터는 추가 진통제를 먹지 않아도 참을 수 있을 정도로 통증의 강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화장실에 갈 때마다 그야말로 큰일을 치렀다. 자연스럽게 일상의 포커스가 배변에 맞춰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이섬유 네 포와 함께 미지근한 물 두 잔을 마신다. 소식이 오는 즉시 화장실로 달려가 1분 안에 신속하게 일을 본다. 5분간 좌욕을 마친 뒤, 자리에 누워 아픔이 잦아들기를 기다린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회복되면 부엌으로 가서 샐러드를 조제한다. 샐러드라 쓰고 쌀러드라 읽는다. 오직 잘 싸기 위한 일념으로 모은 궁극의 재료들을 한데 쌓는다. 다양한 쌀러드 베리에이션이 존재하지만 언제나 변치 않는 단 하나의 사실은, 나의 특제 쌀러드에 들어가는 모든 식재료는 '변비에 좋은 음식'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명인사들이라는 것이다.
아침을 먹는 도중에 두번째 신호가 오면 지체없이 화장실로 향한다. 섣불리 바지를 내리기보다 허리춤을 잡고 변기 앞에 서서 변의가 극에 달할 때까지 대기하는 게 좋다. 설익은 여드름이 농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짜는 원리와 같다. 다시 좌욕으로 마무리. 잠시 누워서 동구를 진정시키다가 아까 먹은 쌀러드가 떠오를 만큼 괜찮아지면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재개한다.
오전에만 네다섯 번의 신호가 오더라도 너무 화를 내지 말자. 화를 낸다고 달라질 게 없으며, 무엇보다 동구건강에 좋지 않다. 수술받은 병원에 전화해서 "최대한 적게 싸고 싶은데 밥을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 안 될까요?" 같은 어리석은 질문도 하지 말자. 바쁜 의료진의 한숨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배출횟수를 줄이는 것보다 배출시간을 줄이는 게 회복의 관건이므로, 잘 먹고 잘 싸는 데 집중하자.
회복 기간엔 체온조절에도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만일 당신이 비염환자라면 필히 모자를 쓰고 양말을 신어 보온을 유지할 것. 치질수술 후 한동안은 재채기를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비염인 중 열에 아홉은 "추워서 재채기하는 게 아니고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잘 알고 있다. 나를 비롯한 비염인의 단골 대사니까. 그러나 단 한 번의 재채기라도 줄일 수 있다면, 응당 모든 재채기원을 차단해야 마땅하다. 명심하라. 사람처럼 재채기를 하려면 최소 5일은 지나야 한다(그나마도 동구를 잔뜩 사린다는 전제 하에).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재채기를 하는 것도, 하다못해 웃는 것마저도 동구가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동구를 잃어보기 전엔 몰랐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토록 살뜰히 뒤를 봐주고 있었던 동구의 헌신을. 동구야말로 평범한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든든한 뒷배임에 틀림없다.
몸 안에 동구가 있다면, 몸 밖에는 남편이 있다. 동구 과잉보호에 주력할 수 있게 2주 동안 실질적인 뒷배 노릇을 해준 남편에게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수술 다음날부터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고 했던 의사의 말은 틀렸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변의와 배변 후 통증을 수습하는 데만 꼬박 한 시간이 걸리는데, 어떻게 시간 맞춰 아이들 등교 준비를 해낸단 말인가. <배우자의 치질수술>이라는, 납득은 가지만 크게 안타깝지는 않은 사유로 2주 재택근무를 보장받은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돌봄과 환자 수발을 살뜰히 해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여 앞에선 말하지 못했지만 마음에선 매일같이 결의가 피어올랐다. 동구만 아물면 내 반드시 이 은혜를 갚겠소.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 살림과 육아에 매진하리이다. 정돈된 집에서 청결한 옷을 입고 정갈한 밥을 먹으며 살게 해줄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오.